오프닝 크레딧이 오른 직후, 한 남자의 허리 살이 스크린 중앙에 떡하니 나타난다. 허리 라인에서 단박에 올라온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비춘다. 그 순간, 객석에서 “헉” 하는 여성 관객의 탄식이 김샌 오발탄처럼 울린다. 나와 동석한 이는 “어머, 어떡해. 에단 호크 배 나왔어”라고 반경 3m 이내 가청 영역의 데시벨로 뇌까린다. 공연히 내 아랫배에 힘이 들어간다. 에단 호크가 몇살이더라. 내 기억엔 1970년생이었던 것 같다(나중에 찾아보니 ‘칠공 개띠’ 맞다). 나보다 한살 위다. 기타를 메고 껄렁대면서 90년대식 얼터너티브 록을 연주하면 딱일 듯싶은 텁수룩한 수염과 헝클어진 헤어스타일은 내 친구를 떠올리게 한다. 수년 전부터 알코올성 내장비만이 생긴 친구는 기타를 배에 올려놓고 연주하면 안정감이 생긴다며 눙치는, 현직 로큰롤 뮤지션이다. 가지런한 치열을 드러내며 씨익 웃는 모습에선 한 시절 여자깨나 설레게 했던 전력이 고스란히 묻어나온다. 더 쫑알대면 때론 화를 낸다. 에단 호크도 어쩌면 그럴지 모른다. 남 말 말고 내 배나 잘 추스르자.
아랫배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한번만 더 말줄기를 삼천포로 빼자. 90년대 어느 영화 잡지에서 조니 뎁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무슨 말 끝에 그가 오십이 넘으면 볼록해진 배를 내밀고 아이들이랑 별장에서 하릴없이 노닥거리는 삶을 살고 싶다는 둥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 당시 조니 뎁은 삼십대, 나는 이십대였다. 그때는 잘 이해가 안됐었다. 공연한 위악이나 자조 혹은 가진 자(?)의 오만에 가까운 여유가 아닌가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씩 몸에 닿는다. 내 아랫배가 하반신 아래 그늘을 형성하려 해서도, 단순히 나이를 먹어서도 아니다. 단지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삶의 어떤 진실 하나를 짚어낸 말이라 여길 뿐이다. 타인을 유혹하는 것으로 삶의 한 시절을 빛낸 자(그 무렵 조니 뎁이 촬영한 영화는 제레미 레빈 감독의 <돈 주앙>이었다)가 필시 목도하게 될 변화와 몰락, 그리하여 결이 달라지는 삶의 태도 등을 암시한 발언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오십줄에 들어선 조니 뎁이 배가 나왔나? 내 알 바 아니니 똥배 얘기 그만.
영화보다 여친이 떠오르는 1편의 추억
1997년 내지는 98년 즈음, 어느 명절 직전이었을 거다. 나는 <비포 선라이즈>를 당시 여자친구와 고속버스터미널 근처 비디오방에서 봤었다. 귀성 차표를 느지막이 예매해놓고는 집에 가기 싫다며 칭얼거렸던 게 떠오른다. 그 친구는 어땠는지 몰라도, 적어도 내 기분상 영화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단지 잠깐이라도 그녀와 헤어지는 게 착잡했을 뿐, 뉴욕에서 온 청년과 파리에서 온 아가씨가 기차에서 우연히 만나 동화 같은 하룻밤 사랑을 엮어간다는 얘기는 별 흥밋거리도 아 니었다. 내 현실 상황과는 여건이 많이 다른 듯 여겨지는 외국 애들 연애놀음 따위가 뭐 중요하겠는가. 나는 다만, 버스를 타기 전 두 시간만이라도 여자친구와 단둘이 있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그 영화를 두고 구체적인 ‘물성’을 짚어보라면 지금도 입꼬리만 삐죽거리게 된다. 영화 안 보고 뭐했기에, 라는 질문은 짓궂지도 않고, 난감해질 것도 없다. 더 중요한 ‘물성’이 곁에 있었다는데, 멍청하게 뭐 그런 걸 묻나.
그러고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그 친구와는 21세기가 시작된 직후, 서른을 넘기면서 헤어졌다. 그 몇년 뒤 <비포 선셋>이 개봉됐으나 관심조차 없었다. 쫑알쫑알 말 많은 영화(우디 앨런? 차라리 경범죄 고발자와 대질심문 받는 걸 택하겠다)는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거니와 이른바 ‘로맨틱’한 연애 이야기(멕 라이언이 출연한 <도어즈> 말고 본 영화가 없다. 파멜라 역의 멕 라이언은 거의 엽기에 가까운, 멍청한 캐스팅이었다고 기억한다)라면 귓등으로 튕겨버리는 습성 탓이기도 하다. 남녀끼리 지지고 볶고 짓까부는 스토리는 내가 현실에서 그러고 있는 상황마저 이제는 진저리치는 편이다. 영화라면 차라리 처절하거나 무미하거나 고요한 쪽으로 눈과 귀가 동한다. 스크린에선 현실에서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불가해함’(데이비드 린치 정도면 러닝타임 다섯 시간이라도 눈꺼풀 요동 없이 견뎌낼 수 있다)이나 이생에선 ‘영원히 불가능할 법한 모험’(베르너 헤어초크 영화를 보면 심장이 눈 밑까지 기어오른다) 같은 것에 탐닉하고 싶지 어떤 핍진한 삶의 디테일을 미주알고주알 캐내는, 마치 설거지 안 한 주방(자취 23년차, 내 생활의 매치포인트 중 하나다) 같은 장면들엔 그만 딱 신물이 올라오고 만다. 그래도 가끔 신물을 참고 보면서 거기에 흡수돼 감정이입하거나 실소를 터뜨리거나 일순간 공감 영역이 확장되어 뭔가를 곱씹게 될 때도 있지만, 그럴 땐 그런 나를 일부러 경멸한다. 영화란 ‘내가 살고 있는 삶보다 두세뼘 더 멋진 것’이어야 한다는 질긴 ‘착각’ 탓이다. 그런데 그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자글자글하고 너부데데해진 그들
<비포 미드나잇>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팔자 좋게 외국 나다니는 친구가 염장 지르듯 ‘디카질’한 것 같은 풍경을 기대하면 김빠진다. 돌로 지은 오래된 건물, 언뜻언뜻 비치는 바다, 몇개의 고풍스러운 지명이 아니라면 제시와 셀린느가 거닐며 대화를 나누는 그 한적한 길들을 남해바다 어느 시골 읍내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리스여야 했고, 그리스를 왜 그런 식으로 담아야 했는지에 대해 공연히 분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중년에 접어든 두 남녀의 육체적, 정신적 정황과 많은 사랑과 이별의 스토리들이 가지고 있는 고전적인 낭만과 신비에 대한 감독의 어떤 의견이 반영되었으리라는 심증만 얘기할 수 있을 뿐이다. 요컨대 인물 내면의 외연으로서의 풍경이랄까. 쇠락해가는 그리스는 두 남녀의 배후에서 느릿느릿 그들의 ‘현재’를 돋을새김한다.
그리스는 유럽의 정신과 예술의 고전적 근거지였으나 현재는 경제/정치적으로 몰락을 향해 치닫는 국가다. 따사로운 햇볕과 옥빛 바다는 여전히 찬란할지라도 어떤 정점의 오라(aura)를 상실해가는 그곳에서 생의 중반기를 막 넘긴 남녀가 18년 동안 의 사랑을 반추하고 ‘정산’하며 미래를 얘기한다. 가슴 벅찬 설렘과 그리움, 망각이나 변심에 대한 두려움 따위 십수년 해가 ‘라이즈’하고 ‘셋’하는 가운데, 생의 둔탁한 굳은살로 눌어붙어버렸다. 고유한 미감과 햇살 쪼가리에 손금을 비춰보는 듯 쩌릿했던 감수성이 중화된 지금, 남아 있는 삶은 서로의 일상과 무의식 곳곳을 날렵한 바퀴벌레처럼 헤집기도 하고, 오래 동거한 고양이처럼 능글맞게 눙치고 뭉개기도 하면서 버텨야 하는, 확고하고도 불안한 일상뿐이다. 서로에 대한 더이상의 신비와 낭만은, 과거의 영화가 유적지로만 잔존하게 된 남부 펠로폰네소스의 체념한 듯한 거리에서처럼 남아 있지 않다. 그걸 적시하듯 카메라는 집요하게 제시의 방만하게 풀어진 몸태와 몰라볼 정도로 자글자글 너부데데해진 셀린느의 육체를 부각한다. 그런데 그 시선은 음흉한 관음이나 적나라한 직시에의 충고라기보다 위안과 공감으 로 수더분하게 건넨 손수건 같은 느낌이 강하다. “내가 지금 같았어도 그때 나에게 다가왔을 거야?”라고 묻는 셀린느의 모습은 그래서 솔직함 그 이상의 여운을 남긴다. 물론, 그런 질문 앞에서 남자는 일생일대의 재치와 배려심을 발휘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상대를 ‘업’시키는 사명에 맞닥뜨리게 되지만. 그런 점에서 에단 호크는 별넷을 받을 만하다. 자세한 건 직접 확인하시기를.
삶의 지난한 ‘나머지 공부’인지도
영화는 전편들이 그랬듯 때로 현란하고, 때로 적실하고, 때로 우스꽝스럽고, 때로 서글픈 말들의 향연으로 펼쳐진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시나리오에 직접 참여했던 만큼 그들의 대화는 배역이라는 가면에 빗대 서로에게 전하는, 자기 자신에의 성찰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그렇기에 제시가 말하는 에단 호크의 심정과 셀린느가 말하는 줄리 델피의 고민은 한 개인의 실존을 ‘육담’ 그대로 반영하는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모든 말은 유혹과 갈등의 시초이자, 그것들을 잠정적으로 화해시키거나 부풀리는, ‘쏟아졌다가 말라버린 물’과도 같다. 극적인 사건이나 눈알 부어오를 스펙터클 하나 없는 영화를 100여분 지켜보며 감정의 물밑이 스스로 발각되는 느낌이 드는 건 그 말들의 물성이 온전히 삶 자체에서 발원하고 공명하는 까닭일 터다. 남의 일인 듯 보다가 이미 헤어진 누가 떠올라 가슴속이 서늘해지고, 내 일인 듯 품에 안고 숨기려 들었다가 이내 모든 사람이 그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공공의 분투임을 깨닫고 암담해지는 걸 목도하는 것도 삶의 지난한 ‘나머지 공부’인지 모른다.
친구 부부의 칼로 물 베는 실랑이에 우연찮게 동석해 18년 애정의 빛과 그늘을 고스란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어쭙잖은 상황도 없지만, 어쩌면 영화라는 매체가 내게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불가해함’과 ‘불가능한 모험’은 데이비드 린치나 헤어초크에게서만 기대할 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꽤 쓸 만한 각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곁에 있는 사람의 심중에서 휘청휘청 사투해야 하는 ‘불가해성’만큼 삶의 밀도를 팽팽하게 하는 ‘모험’도 없을 테니 말이다.
한 남자가 있고, 한 여자가 있다. 해가 사라져 어둠 속에서 속살을 곱씹는 바다가 있고, 서늘한 바람이 있다. 한바탕 진실과 오해의 태그매치를 끝낸 뒤, 또다시 자신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남자는 여자를 유혹하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방식으로 여자는 유혹의 판타지 속에 현실을 포개버린다. 해가 뜰 때 헤어지고 해가 질 때 재회해서 어느덧 자정 직전, 그들은 다시 “환상적인 밤이 시작” 되길 꿈꾼다. 까마득해 보이는 18년이 지나고 보니 다만 해가 묵묵히 서진(西進)하는 하루 동안의 긴 여정에 불과했다. 이것은 허망한가, 애틋한가. 이 길고 긴 ‘로망’은 시간의 한끝이라는 유적지에서 어떤 꿈을 다시 꾸게 만들 것인가.
문득 지난날의 ‘그녀’가 보고 싶다. 그리고 다시 잊고 싶다. 더 많이 얘기 듣고, 더 많은 말을 바닷속에 묻어버리고 싶다. 모든 ‘옛사랑들’을 단 하나의 사랑이었다고 자위하며 여전히 곁을 비워둘 수밖에 없는 나는 마흔세살 대한민국 독신남. 이만큼 넌더리나면서도 끊기 힘든 자멸적 판타지도 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만큼 ‘불가해’한 현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