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에 나는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사랑도 늙으면 통속이 된다. 그때도 나는 이 지면에 실릴 글을 청탁받아 <비포 선셋>을 보았다. 파리에서 재회한 셀린느와 제시는 적당히 지쳐 보였고 적당히 변해 있었다. 영화는 먹먹했다. 삼십대 초반의 나에게 분명히 그랬다. 그때 나는 길고 길던 내 청춘의 시절이 마침내 끝났으며 돌이킬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 서른둘이었다.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그 매혹의 기만은 현실의 시간을 잔인하게 위무한다. 2004년에는 2013년이라는 시간이 이토록 빨리 들이닥칠 줄을 몰랐다. <비포 선라이즈>를 보았던 1996년에 2004년이라는 숫자가 그저 아득하기만 했듯이.
2013년 깊은 봄밤, <비포 미드나잇>을 보았다. 시사는 월요일 저녁 여덟시. 베이비시터가 퇴근하는 시간이 아닌가. 친정엄마더러 늦지 않게 꼭 오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나라를 구하는 것보다 더 중차대한 임무를 수행하러 나가는 듯이 미리 뻥을 쳐두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여섯시 반쯤 저녁을 먹인 다음, 아이들이 외할머니와 놀고 있을 일곱시에서 일곱시 반 사이에 마트 가듯 쓱 빠져나오면 될 것이다. “네가 좋아하는 망고 사러 가는데 우리 동네에서는 안 팔잖아. 저기 다른 동네까지 가서 꼭 구해올게.” 밤 외출을 할 때 벌써 몇번 써먹은 레퍼토리인데 눈치 빠른 큰애가 이번에도 알면서 속아줄지가 관건이었다.
내게는 각각 네살과 세살인 두딸이 있다. 미리 의도한 바는 아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두명의 조그만 여자아이들이 내 오른손과 왼손을 꽉 쥔 채 걷고 있었다. 지난해 가을 마흔 번째 생일이 지났다. 나는 여전히 일을 한다. 소설을 쓰고 에세이도 쓰고 이도 저도 아닌 잡문도 쓴다. 소처럼 쓰고 또 쓴다. ‘소처럼’이라니. 참 진부한 직유인 줄 알았는데 갓 사십대에 접어든 내 삶을 그보다 적확하게 함축하는 보조관념은 소 말고는 없을 것 같다. 머리 자르러 갈 시간조차 없이 매일 정신없이 휘몰아치면서 사는데 소설에게도 아이들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이 콜타르처럼 끈끈하게 영혼 밑바닥에 달라붙어 있다. 십년 뒤의 모습을, 인생 다 산 것처럼 허세를 부렸던 2004년의 내가 짐작이나 했을까. 지구 어디선가 이런 방식으로 허둥허둥 살아가는 여자들이 있나 보다 했었다. 작가가 밤 외출을 안 한다고? 그게 가능해? 진심으로 의아했었다. 청춘이 끝나고 나면 나머지 삶은 몇 발자국 떨어진 발코니에서 청춘의 폐허를 바라보며 맥주를 마시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극장 앞에서 남편과 만났다. 무척 바쁜 직장에 다니는 그가 기적적으로 일찍 퇴근한 것이다. 둘이 나란히 극장에 온 건, 그의 지난 겨울휴가 이후 처음이다. 밖에서 식구의 얼굴을 보면 어쩐지 서글퍼진다고 말한 작가가 누구였더라. 절반은 그럴싸하기도 한데, 절반은 동의하지 못하겠다. 너무 바빠서 서글프다는 감정의 여유를 음미할 틈이 없다. 우리는 근처 우동집에서 저녁밥을 후루룩 해치웠다. 일곱시 오십오분. 팝콘 하나 살 시간도 없이 상영관을 향해 돌진한다. 이미 첫 장면이 시작되었다.
오 마이 갓! 셀린느와 제시가 결혼하다니
아, 제시와 셀린느다. 불현듯 얼떨떨해진다. 이십년 전의 고등학교 동창들과 십년 전 ‘아이러브스쿨’ 덕분에 재회했다가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 또다시 십년 만에 열린 두 번째 동창회에 참석한 기분이다. 하루와 하루들로 이루어진 그 십년을 나는 차근차근 살아왔고, 그들도 그랬을 것이다. 그들은 그사이 결혼을 했다. 오 마이 갓. 셀린느와 제시 둘이, 말이다. 속편을 기다리는 십년 동안 단 한번도, 꿈에서도 상상해보지 않은 설정이다. 뒷자리에 아이들이 잠들어 있다. 셀린느와 제시의 얼굴에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놀라지는 않는다. 가끔 손거울로 내 얼굴을 가까이 비춰보다가 슬며시 내려놓을 뿐, 놀라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마음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어간다. 그리고 변해간다. 그건 슬퍼할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다. 순응할 일이다.
그들이 있는 곳은 그리스 서부의 해변 마을 카르다밀리. 제시가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초대를 받아 온 가족이 함께 두달간의 여름휴가를 즐기는 중이다. 작가 레지던시에 온 가족이 함께 갈 수 있다니. 두달이라니. 그리스라니. 너무도 머나먼 얘기라서 부럽지 않을 지경이다.
이 지점에서 <비포 미드나잇>은 <비포 선셋>과 출발을 달리한다. <비포 선셋>의 제시와 셀린느는 쉼없이 파리 골목골목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지만 사실 그들은 명백히 현실 안을 살고 있었다. 제시는 제한된 일정으로 공식적인 북 투어를 온 처지이며, 셀린느에게는 파리 자체가 생활의 터전이다. 이 설정은 <비포 선셋>의 정서를 이해하기에 아주 중요하다. 이미 각각의 삶을 바쁘 게 살아가고 있는 두 남녀가 이미 현실과 일상이라는 벗어날 수 없는 그물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일상은 그들에게 쉽사리 <비포 선라이즈>적인 이십대의 로맨스를 재현할 수 없도록 하는 제약조건인 동시에 면죄부로 작동한다. <비포 선셋>의 마지막까지 그들은 주저하고 망설인다. <비포 선셋>의 마지막 신이 셀린느의 집으로 끝난 것은 이들이 마침내 먼 길을 돌아 현실의 공간에서 마주보기 시작했음을 암시했다.
또다시 해후한다면, 그땐
그런데 <비포 미드나잇>은 결혼한 부부의 삶을 보여준다며 노골적인 현실을 표방했지만, 실제로 인물들은 현실과 유사해 보일 뿐인 매우 비현실적인 공간에 놓여 있다. 영화는 실제로 그들이 머무는 레지던시의 실내는 한 장면도 비추지 않는다. 애들은 누가 재우는지, 그 집 애들은 빨리 잠드는지, 목욕은 어디서 시키는지, 빨래는 어디서 하며 쓰레기는 누가 치우는지 휴가기간 동안 생활비는 어떻게 충당하는지 나는 그런 사소한 것들이 자꾸만 궁금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부부라는 남녀관계에서 얼마나 치명적인 흉기로 돌변할 수 있는지 알고 있어서다.
옛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면 무얼 해도 유쾌하고 사랑스럽다. 그 부부의 대화와 논쟁을 지켜보며 나는 자주 웃고 자주 공감했다. 여전히 어깨를 움츠리는 습관이 있는 제시의 뒷모습에 가슴이 아팠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과장하여 미리 냉소적인 자기방어의 제스처를 취하는 셀린느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렇지만 누군가 “그래서 이 영화가 좋았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라고 돌직구를 던진다면 침묵을 택하겠다. 지나치게 40대의 리얼라이프를 강조한 마케팅 탓에 더 피상적으로 느껴졌다는 비판도 하지 않겠다. 타인의 인생이었다. 이 시리즈를 눈여겨보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그들이 타인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그것만은 부인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영화가 아니라 셀린느와 제시의 삶인 것을! 타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으므로 나는 다시 묵묵히 내 몫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언어는 허약하다. 대부분의 언어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 점점 더 그런 생각이 든다. 십년 전 내가 쓴 <비포 선셋>의 감상문을 지금 읽으며 그랬듯이, 십년 뒤에 나는 이 글이 편파적이었다고 조금 부끄러워하리라.
셀린느와 제시에게 할 유일한 부탁이 있다. 만약 <비포 던>을 통해 훗날 우리가 또다시 해후할 수 있다면 그때는 그들의 진짜 생활공간에서이기를. 그만한 세월이면 이제 서로의 집에 초대해 진짜 침실을 공개해도 될 만한 친구 사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때 나는 지금보다는 늙고 굳건한 소가 되어 있겠지. 희망과 절망을 반복하며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