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전영객잔]
[신 전영객잔] 내가 만질 수 없는 그러나 나를 만져주는
2013-06-13
글 : 남다은 (영화평론가)
<러스트 앤 본> 특유의 육체성, 그 몸의 기억을 떠올리며

돌고래 쇼 중, 사고로 두 다리를 잃은 조련사 여인이 한 남자를 만나 육체적 감각을 되찾은 날. 그녀는 의족을 차고 어색한 걸음으로 사고 현장을 찾는다. 대형 수족관 앞에 선 그녀가 수족관 창을 손으로 두드리자, 마법처럼 어딘가에서 거대한 고래가 나타난다. 마치 고래를 쓰다듬듯 창을 쓰다듬던 여인이 손과 팔을 움직여 동작을 시작하자, 고래가 그에 따라 움직인다. 우리는 여인의 표정을 볼 수 없는 대신 고래의 표정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혹은 의족을 찬 다리로 어색하고 꼿꼿하게 서서 우아하고 능숙하게 팔을 움직이는 여인의 뒷모습이 그녀의 얼굴 표정 그 자체라고 느낀다. 둘 사이에 가로막힌 창. 이제는 서로 섞일 수 없는 두 세계. 그 창을 사이에 두고 고래와 여인은 서로를 만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창이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이 창은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한계를 리듬으로 전환한다. 여인의 손짓에 고래는 어디론가 다시 사라져버리고 창 앞에 여인 홀로, 하지만 뭔가 달라진 뒷모습으로 서 있다.

<러스트 앤 본>에서 내가 받은 감흥은 이 장면이 준 감동의 근원과 통하는 것 같다. 이 장면에서 여인과 고래는 몸으로 직접 접촉할 수 없어도(접촉했을 때 여인의 다리는 절단되었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보다 더 큰 접촉의 충만감을 전해준다. 영화를 보는 동안 나는 종종, 좀 이상한 표현이지만, ‘이 영화가 나를 만지고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만져주고 싶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영화의 서사와 실은 별 관계가 없는 어떤 순간들에 기인하는데, 순전히 그 감흥에 근거한 질문들을 통해 그간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들의 어떤 기질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영화를 만지고 싶다, 영화가 나를 만지고 있다’는 느낌을 좀 유식한 말로 바꾸면 ‘영화의 육체성’이라는 표현 정도가 될까. 영화가 육체적 이라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아니, 영화는 육체적일 수 있을까. 물론 몸을 서사의 중심으로 두고 몸의 효과로 진행되는 영화들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을 보고도 나는 똑같은 감흥을 느꼈던가? 당장 떠오른 대로 예를 들자면, 미키 루크가 퇴물 레슬러로 분한 <더 레슬러>에서 그의 쇠락한 육신을 대면하는 경험은 그 몸에 새겨진 영화 밖의 곡절 많은 역사 때문에 슬픈 것이지 <더 레슬러>라는 세계자체의 촉 때문은 아니다. 묶어서 말하기는 좀 애매하고 낡은 예이기는 하지만,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이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는? 외설과 예술의 경계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섹스 신을 통해 무언가의(대개의 경우, 정치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이런 유의 영화들은 신기하게도 그 섹스가 독해질수록 육체로부터 멀어진다는 인상을 준다. 이창동의 <오아시스> 속 카메라가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여인을 뚫어지게 바라볼 때 우리의 몸이 아프다면, 그건 엄밀히 말해 문소리라는 비장애인 배우가 온몸을 비틀어서 하는 연기의 과정 때문이지 공주라는 캐릭터의 몸에 기인하는 건 아니다. 최근 개봉했던 <홀리모터스>는 어떤가? 드니 라방의 기가 막힌 변신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육체와 연관해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내게 이 영화는 머리로 기술한 몸에 ‘대한’ 영화에 더 가깝다.

그러니까 스포츠 장면이건 섹스 신이건 몸으로 서사를 작동시킨다는 사실만으로 한편의 영화를 육체적이라고 말하는 건 무언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러스트 앤 본>에서 느낀 이 다른 육체성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스크린 속 몸의 어떤 순간들을 내 몸이 동시에 경험했고 그걸 ‘육체적 전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무엇이 이런 감흥을 가능하게 한 것인지 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의 예에서도 말했지만, 육체가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그런 경험을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체의 가장 극단적인 형상화인 포르노그래피나 각종 하드코어물을 보며 육체적 전이를 느끼지는 않는다. 그럼, 포르노를 보고 흥분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대체 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 흥분은 오히려 시각적 쾌감과 더 관련이 있다. 그 쾌감은 그들의 섹스를 훔쳐보는 일방적 시선이 작동한 결과이며, 그 몸의 일부분에 과잉된 의미를 부여해서 유기체로서의 육체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며 우리는 그런 과정을 물신화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포르노는 육체의 구체적인 현현인 것 같지만 실은 추상적인 것이며, 신음과 행위로 가득하지만 실은 살아 있는 전체를 살아 있지 않은 부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보는 이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과 내가 말하려고 하는 육체적 전이는 다른 맥락에 있다.

그렇다면 이 육체적 전이의 경험이 결국 관객이 영화를 수용하는 방식과 연관될 때, 영화 이론에서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동일시 작용의 선상에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차이를 말하기 위해서는 아주 긴 지면과 세밀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건 <러스트 앤 본>이 준 그 경험이 카메라 시선과의 동일시 혹은 등장인물과의 동일시로 쉽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을 기반에 둔 1970년대의 관객성 이론이 영화에 대한 관객의 상상적 동일시를 말하고, 관객의 수동성과 그 과정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논의했다면, 육체적 전이의 경험은 그와 정반대의 자리에 두어야 한다. 이데올로기를 무화하는 무의식적인 능동적 반응이라고 할까. 그 경험은 토마스 엘새서가 <영화 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에서 스크린에서 전개되는 것과 관객 육체의 생리학적, 감성적 반응 사이의 연속성에 대해 언급하는 맥락에 가장 가까이 있을 것이다. 그의 논의에서 관객이 스크린 속의 무언가와 접촉한다는 느낌은 스크린에 몸이 등장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며, 나 역시 그 느낌은 인물, 몸, 섹스와 같은 구체적인 대상 혹은 이미지가 아니라 영화적 리듬, 영화적 표면의 활기와 더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러스트 앤 본>에서만큼은 이 영화에 대한 나의 육체적 경험을 영화에 등장하는 몸에 대한 언급 없이 말하기 어렵다.

이 영화의 육체성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은 이런 것이다. ‘불의의 사고로 다리를 절단한 여자와 몸으로 먹고사는 거친 남자가 세상의 끝에서 만나 서로를 구한다. 여기서 잘린 신체와 부서진 몸의 접촉은 가장 위대한 소통이다.’ 이 설명은 뻔하다. 무엇보다 나는 이 영화에서 육체가 맡은 역할, 그것의 서사적 기능에서 감흥을 얻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이 영화의 좀 이상한 지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개의 사랑영화에서 상대에 대한 시선의 작동과 육체적 반응은 같이 간다. 상대를 탐색하고 욕망하는 시선의 동요를 전제하지 않은 육체의 접촉은 거의 불가능하다. 극적 긴장감을 위해서도, 욕망을 표현하는 방법을 위해서도 시선의 동요는 중요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그 부분이 부재한다. 물론 남자가 나이트 클럽 앞에 쓰러진 여자를 부축해서 집에 데려다주는 자동차 장면에서 그녀의 다리를 훔쳐보는 순간이나 야수처럼 싸우고 차로 돌아온 남자의 상반신에 여자가 시선을 두는 순간이 스쳐가기는 하지만, 그 이상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들이 서로를 쳐다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들의 서로에 대한 응시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나 이들의 몸에 새겨진 격렬함의 흔적들과 이와 비교해서 놀라울 정도로 차분하고 무표정한 이들의 응시 사이의 간극 혹은 충돌은 이 멜로가 응시와 육체의 분리로 진행되는 것 같다는 인상마저 준다. 요컨대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 있는 여자를 처음 대면할 때나 해변에서 그녀의 잘린 맨다리를 볼 때, 그의 시선에는 한치의 동요도 없다. 하지만 원래 그가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건 그가 다른 여자들과 섹스를 하기 위해 그녀들을 훔쳐볼 때 알 수 있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남자가 피를 흘리고 여기저기 얻어터지며 싸우는 광경, 그 몸을 흔들림없는 시선으로 쳐다본다. 오히려 영화가 이 싸움장면의 견딜 수 없는 긴장감을 슬로 화면과 음악으로 해소하려고 하지, 여자의 시선은 고요하고 서늘하기 그지없다.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건조한 응시와 뜨거운 육체가 이 영화를 지배한다. 이 영화는 시선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고 싶기도 하다(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몸으로 먹고 사는 남자가 마트 고용인들을 감시하는 카메라를 설치하는 일을 하다가 걸려 결국 누나를 해고시키는 데 일조한 건 단순히 우연한 설정만은 아닐 것이다). 알다시피 관음증은 이와 반대로 육체가 없는 뜨거운 시선과 관련이 있다. 토마스 엘새서도 “관음주의란 자기 육체의 존재에 대해서 특정한 장소와 특정한 시간 속에서는 아무런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라고 쓰고 있다. 말하자면 이와 정반대의 지점에선 <러스트 앤 본>에서 이들의 몸은 서로에게 단 한순간도 관음의 대상이 아니며, 이는 이들의 생경한 몸을 관음하려는 우리의 욕망도 차단한다. 또한 이들의 건조한 응시는 그들의 고통에 동화되고 이입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지도 않는 것 같다. 그 내면의 고통을 서사적으로 설명하는 데 영화는 의외로 골몰하지 않는다.

이들의 몸이 일깨우는 고통의 서사도, 이들의 몸을 훔쳐보고 싶은 욕망도 아니라면, 대체 내 몸은 이 영화의 무엇에 반응하고 있었던 것일까. 둘의 섹스 신보다 인상적인 두 장면이 있다. 하나는 해변 신이다. 남자를 따라 해변으로 나온 여자가 수영을 하기 위해 바지를 벗는다. 마치 고래의 피부처럼 매끈해진 잘린 다리의 표면이 생생하게 드러나고 남자는 그녀를 한번은 안고, 한번은 업고 바다를 오간다. 남자의 맨몸과 여자의 맨다리가 마치 한몸처럼 밀착해있다. 또 다른 하나는 화장실 신이다. 남자와 잠을 자던 여자가 새벽녘 침대 아래에서 침대를 등지고 앉아 있다. 그녀는 화장실에 가고 싶고, 잠에서 깬 남자가 조금 수치스러워하는 여자를 안고 화장실에 데려다준다. 여자를 변기에 앉히고 남자가 벌거벗은 몸으로 망설임 없이 맞은편에 앉는데, 소변을 보던 여자가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킥킥대고 그걸 남자가 바라본다. 침대로 돌아온 그들의 몸이 포개어져 있다. 실은 무척 애처로운 장면들이지만, 이상하게도 여기에는 그 슬픔을 누르려는, 아니, 그렇게 누르다가 결국은 넘어서는 기운이 있다. 이 장면들에서 이들의 부서진 몸이 민낯으로 접촉할 때, 내 몸은 그것을 성적인 욕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혹은 그 욕망보다 더 바닥에 자리한 원초적인 차원의 접촉처럼 느낀 것 같고 그 기운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더이상 자명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표면의 접촉. 시선의, 달리 말해 욕망의 지시를 받지 않는 것 같은 표면의 접촉. 그건 섹스를 통한 합일, 따위의 상투적인 문구로 이해될 수 없는, 그와는 다른 무엇이다. 지금으로서는 이 장면들과 나 사이의 육체적 전이를 이런 식으로밖에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영화의 육체성이란 거의 언제나 과잉과 연관된다고 여겨왔는데, 여기서의 강렬하지만 요란함이 제거된 육체성은 신기하게도 과잉에 근거한다고 말하기 망설여진다.

장르에 귀속되지 않는 몸

그러니 여자의 절단된 다리, 의족을 단 다리의 어색한 이미지와 걸음걸이, 남자의 피 흘리는 몸, 부서진 주먹, 그리고 이들의 접촉이 보는 이에게 안기는 생경함은 단지 고통의 전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내 몸이 느낀 그 생경한 전율은 잘린 육체가 죽음을 암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죽음 근처에서 여전히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토막 난 시체의 파편을 보고 우리는 그렇게 전율하지 않는다. 이 영화 속의 잘린 다리, 부서진 주먹이 (영화의 마지막 내레이션처럼)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지만 재생된다는 사실, 그 생의 의지가 끔찍함과 두려움, 생생함과 경외감이 뒤섞인,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정념으로 보는 이의 몸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 장면들에 대한 내 육체의 반응은 타자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그를 이해하려는 어떤 윤리적 차원에 있지 않다. 영화와 나 사이에 완전히 내 몸의 것도, 완전히 영화 속 타자의 것도 아닌 육체적인 뭔가가 오가는 느낌, 그것은 우리의 육체 저 밑바닥 어딘가에 잠자고 있는 몸의 기억, 어쩌면 우리가 현실에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으나 몸은 기억하는 무언가를 반응하게 하는 것 같다. 이 영화에서 지중해의 그 빛이 인상적인 이유는 시각적인 효과 때문이 아니라, 그런 몸의 기억을 살아나게 비춰주고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촉각적인 감흥 때문일 것이다.

자크 오디아르가 인간의 몸을 즐겨 다루는 건 맞다.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서 중요했던 건 실은 음악이 아니라 그 음악을 만들어내는 손이었다. 피아노에 조심스럽게 내려앉는 손이 그와 양립하기 어려운 치졸하고 비루한 행위를 한다는 사실, 즉 이 영화가 보여주고자 했던 건 손의 그 간극이었다. <예언자>에서 감옥 안에서 상처입고 찢긴 남자의 몸에 대해 정성일은 “자크 오디아르는 카메라 앞에 던져진 육신을 온통 남의 이야기를 채우는 데 ‘써먹기’ 시작한다”고 썼다. 덧붙여 이 남자를 그 자체로는 “텅 빈 기호가 되어버린 인물”이라고 묘사했다(<씨네21> 746호). 그 지적에 동의하는 나는 그의 말을 이렇게 바꿔도 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인물의 육신은 그 자신의 고유한 의미로서가 아니라, 장르를 채우기 위해 거기 존재한다. 말하자면 두 영화에서 육체는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로, 혹은 무언가에 대한 표식으로 결국 장르에 안착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러스트 앤 본>은 다르다. 이 영화의 몸은 통속의 한가운데를 버티고 서 있지만, 장르에 귀속되지 않는다. 수치심과 관능미가 제거된, 서로를 유혹하려 애쓰지 않으나 서로에게 기댄 몸, 그 몸의 접촉은 거기 덧붙여질 수 있는 모든 수사와 의미를 납작하게 눌러서 반드시 만나야만 하는 것이 된다. 이 글의 끝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나의 언어는 만질 수 없으나, 나의 몸 어딘가를 만져주고 있는 영화 속 저 몸들의 정직함을 나는 믿고 싶다. 그 감각을 일깨운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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