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개츠비 보러 갔다가…
2013-07-01
글 : 김혜리

*6월3일치 일기에 <에브리데이>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비디오로 여름나기’라는 제목으로 숨은 수작을 소개하는 기획은, 비디오 시대 영화잡지의 연례 행사였다. <완다라는 이름의 물고기>(1988)는 코미디 베스트에 빠지지 않던 작품. 5월25일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관객과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사의 걸작도, 흥행대작도 아닌 미들급 영화들이야말로 스크린에서 다시 보기 어렵다. 세대와 국경을 넘어 여전히 사람들을 웃기는 데에 성공하는 <완다…>가 무척 사랑스러웠다.

5/15

바즈 루어만 감독은 시대극 장르의 마이클 베이가 되고 싶은가보다. 3D로 만들어진 그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와 닉 일행이 뉴욕으로 차를 달리는 장면을 보다가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들의 드라이브는 역동적이다 못해 지금 <분노의 질주> 시리즈를 보고 있나 혼동될 지경이다. 영화 내적으로 보나 외적으로 보나 불필요한 과속이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토비 맥과이어, 캐리 멀리건의 캐스팅은 매우 적절하며 삼인조 모두 즐길 만한 연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관객의 시야를 점령하는 퍼포먼스는 세 배우의 연기가 아니라 바즈 루어만의 그것이다. 무대감독의 기질은 바즈 루어만의 재능이자 결함이다.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 배우의 연기와 현장에서 합류하는 우연들- 을 호기심을 품고 지켜보는 여유가 바즈 루어만의 연출에는 없다. 대신 “지금은 여기를 주목하시고, 다음은 이쪽으로 빨리!”라고 외치는 큐 사인의 환청이 들린다.

바즈 루어만이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원작 소설을 좋아하고 존경한다는 사실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 <위대한 개츠비>는 여러 장면과 대사를 고스란히 시나리오로 옮겨왔다. 보태면 모를까 줄이는 데에는 매우 조심스럽다. 그런데 얄궂게도, 몇 안되는 생략과 “이쯤이야” 싶은 가필(加筆)이 거슬리는 결과를 낳는다. 예컨대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보낸 시간이 닉(토비 맥과이어)을 폐인으로 만들 만큼 큰 충격을 남겼다는 추가 설정은 <위대한 개츠비> 전체의 이야기를 아주 예외적인 기담으로 보이게 한다. 진귀한 구경거리일 뿐 보편적인 삶과 연관지을 고리가 없어지는 것이다. 데이지(캐리 멀리건) 남편이 개츠비를 죽은 여자의 불륜 상대였다고 모함하는, 원작에 없던 추가 누명도 개츠비라는 남자의 별나게 기구한 팔자를 강조한다. 이와 같은 각색은 <위대한 개츠비>라는 스토리의 핵심이 기념비적으로 위대한 사랑에 있다고 보는 관점의 산물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핵심이 기념비적 사랑이 아니라 범용한 사랑을 하면서도 그 범용함을 필사적으로 부인했던 남자의 실패에 있다고 보는 독자라면 이 각색은 사소한 변화가 아니다. 닉 캐러웨이 캐릭터의 쓰임도 마찬가지다. 액자 구조로 인해 닉의 러닝타임 비중은 커졌으나 조던 베이커(엘리자베스 데비키)와 닉의 관계가 삭제됨으로써 닉의 역할은 철저히 목격자로 한정된다. 개츠비의 이야기는 닉을 포함한 ‘우리’의 세계 바깥에 머문다.

5/17

막상 피츠제럴드의 소설에서는 심상히 넘어갔는데 영화를 보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위대한 개츠비>의 광팬이라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개츠비가 데이지네 집쪽 기슭에서 반짝이는 초록 불빛을 만지기라도 할 듯 손을 내뻗는 장면은, <노르웨이의 숲>의 3장으로 곧장 나를 다시 데려갔다. 나오코가 잠정적 이별을 통보하는 편지를 보내온 여름 방학. 와타나베는 기숙사 친구로부터 병에 든 반딧불이를 선물받는다. 갇힌 채 빛을 잃어가는 반딧불이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그는 옥상에서 반딧불이를 놓아주는데 그것은 한참 웅크리고 있다가 날아간다. 하지만 와타나베는 반딧불이가 사라진 뒤에도 그것이 그린 빛의 궤적이 눈감은 자기 안의 어둠에 머물러 있다고 느낀다. “나는 그런 어둠 속으로 몇번이고 손을 뻗어보았다. 손끝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다. 그 자그마한 불빛은 언제나 내 손가락 끝의 조금 앞에 있었다.” 두 번째 ‘하루키 모멘트’는 개츠비가 옷장 가득한 고급 셔츠들을 계단 아래로 뿌리자 데이지가 벅차서 울음을 터뜨리는 대목에서 찾아왔다. 하루키는 단편 <토니 타키타니>에서 이 장면을 반복했다. 고독한 주인공 토니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준 아내를 잃는다. 그녀가 남긴 산더미 같은 옷의 존재감을 감당하지 못한 남자는 한 아가씨에게 아내의 옷을 입어 달라 부탁한다. 드레스 룸에 들어선 여자는 아름다움의 부피에 압도돼 오열한다. 물론 이치가와 준 감독의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도 동일한 장면이 나온다. 소설 <위대한 개츠비>와 바즈 루어만의 영화, 소설 <토니 타키타니>와 이치가와 준의 영화가 묘사한 네 광경의 뉘앙스가 모두 조금씩 다르다.

6/3

오직 예측할 수 없다는 점만 예측할 수 있는 감독을 꼽으라면 리안, 리처드 링클레이터, 스티븐 소더버그 그리고 마이클 윈터보텀이 맨 앞줄을 차지할 거다. <에브리데이>는 작품의 색깔뿐 아니라 완성도도 천차만별이었던 윈터보텀이 보내온 아름다운 신작이다. 아빠의 수감 생활로 5년 동안 떨어져 사는 가족의 이야기를 5년에 걸쳐 촬영한 <에브리데이>는 지난달 개봉한 <비포 미드나잇>과 나란히 영화가 시간에 대해 정중한 예를 갖추는 방법을 보여준다. 이안(존 심)은 영화가 관객에게 밝히지 않는 죄목으로 런던 지역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있다. 아내 카렌(셜리 헨더슨)은 홀로 사남매의 생계를 돌보며 아이들을 번갈아가며 데리고 주기적으로 면회를 간다. 관객은 비전문 배우가 연기한 어린 사남매의 키가 자라고 체중이 변하는 추이를 지켜보게 된다. 아주 이따금만 자식들과 만날 수 있는 아빠가 느낄 놀라움과 조바심을 희미하게 짐작하면서. 현재 시제에만 집중하길 강요하듯 윈터보텀 감독은 죄목뿐 아니라 이안의 형기도 관객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심지어 그가 형무소를 벗어나는 장면에서도 영구 석방인지 일시적인 가족 방문인지 알 길이 없다. 영화를 보면서 대체 무엇을 기다려야 하나 궁금해하는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대답하는 것은 마이클 니먼의 음악이다. 기승전결을 읽어내기 힘들어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니먼 특유의 선율은 영화가 뒤로 갈수록 고조되며 강물처럼 객석을 휩쓸어간다. “삶은 계속된다.” 가사 없는 음악이 노래한다.

<에브리데이>는 범죄영화나 수형 생활의 기록이 아니다. 윈터보텀은 살면서 누구나 범할 수 있는 실수로 부서진 평범한 가족이 분리의 시간을 어떻게 견디는지 관찰한 극히 사실적인 의미의 가족드라마를 만들었다. 제목에 충실하게도 <에브리데이>에 붕괴나 기적은 없다. 이안이 더 끔찍한 죄를 저지르지도 않고 카렌이 무너지거나 아이들이 비뚤어지는 위기도 닥치지 않는다. 대신 윈터보텀은 아주 자그마하고 중요한 순간들을 골라낸다. 자동차가 급정거할 때 세살배기 동생의 몸을 잡아주는 어린 형의 모습은 아빠 없이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고 들려준다. 면회 온 가족을 돌려보내고 혼자가 된 이안이 짓는 생판 다른 사람처럼 메마른 표정은 가족 밖의 그가 어떤 사람일지 상상하게 한다. 어쩌면 아직 원망하고 일탈할 나이에 이르지 않아서일 수도 있으나 어린 남매들은 내내 착하고 밝다. 그러나 그 맑은 모습을 보며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아이들의 사랑스러움에 대한 찬탄이 아니라,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엄마 카렌이 치러야 했을 수고와 고통을 향한 연민이다. 셜리 헨더슨의 카렌은 고요하게 영웅적이다. 그녀에게 주어진 과업은 팔뚝으로 댐을 막았다는 소년의 그것과 비슷하다. 이미 피할 도리 없는 고통이 범람하지만 않도록, 그래서 가족을 익사시키지만 않도록 수위를 관리하는 고단한 파수꾼이 그녀의 역할이다.

6/4

<에브리데이>의 공간적 배경은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다. 나는 그곳에서 1년을 생활한 적이 있다. 사적인 우연이 이 영화의 관객인 내게 베푼 혜택이 있다면, 지형이 평탄해 유독 바람이 모진 노포크 지역 날씨를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면회일이면 카렌은 런던 교도소에 늦지 않게 도착하기 위해 새벽 4시부터 일어난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노리치역까지 가서 런던 워털루역까지 기차여행을 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형무소까지 자동차를 타야 할 터다. 나는 카렌의 현실을 이루는 고통 한 조각도 감히 이해할 수 없지만, 2시간 거리의 목적지마저 땅끝처럼 아득하게 만드는 비 섞인 새벽바람의 냉기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다. 아, 나는 어쩌면 이 강인한 여인 앞에서 부끄러운 나머지 덜 미안해질 핑계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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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브 스틸>의 케빈 코스트너

한번 본 소감에 따르면 <맨 오브 스틸>은 <다크 나이트> 시리즈보다 <300>의 유전자가 강한 영화다. 단, 슈퍼맨의 두 아버지에 관한 묘사만큼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연작에 가깝다. 케빈 코스트너의 조너선 켄트는 아들의 정체가 뭐건 인간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소년 클라크의 아버지로서 염려하고 가르친다. 캔자스 시골 풍경이 이 배우에게 썩 잘 어울린다는 점은 말하나 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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