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태일이 몸담고 있는 인디밴드의 공연을 보러 홍대 앞 한 클럽을 찾았다. 마지막 공연이 될지도 모른다는데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클럽 입구의 작은 칠판에 태일의 밴드 이름이 분필로 적혀 있었다. 내일이 되면 이 이름은 지워진다. 갑자기 송곳이라도 들고 칠판에 무언가를 새기고 싶어졌다.
공연 삼십분 전인데 객석은 한산하다. 어슬렁거리는 몇 사람들은 클럽 관계자이거나 밴드의 지인들 같다. 무대 위에서 사운드 체크를 하고 있던 밴드 멤버들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인사를 한다. 정작 태일은 뒤로 돌아 베이스 앰프만 만지작거리고 있다. 원하는 톤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듯이. 나는 아무 의자에나 앉으려고 주위를 둘러본다. 한쪽 구석에 태일의 여자친구 혜원이 앉아 있었다.
“와 있었군요. 당연하지만.” “이적 오빠도 오셨네요. 일이 바빠서 못 올 거라고 태일 오빠가 그랬었는데.” “만약을 대비해서 괜히 연막 쳐놓는 거죠. 안 쪽팔리려고. 태일이 특기잖아요. 전 올 거라고 약속했는데.” “네….”
우리 둘은 나란히 앉아 어색하게 무대만 바라본다. 때마침 몸을 객석쪽으로 돌린 태일이 우리 둘을 발견하곤 과장되게 반긴다. 그리고 자신 앞의 마이크에 대고 행사 사회자같이 목소리를 꺾는다.
“여러분, 우리의 마지막 공연을 위해 가수 이적씨가 왕림해주셨습니다.”
혜원이 멋모르고 박수를 치며 나를 향해 웃는다.
“이거 저 멕이는 거예요.” “알아요. 근데 재밌잖아요.”
이 친구, 늘 한수 위다.
리허설이 끝나고 객석이 조금씩 더 차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 동안 태일의 밴드를 지켜왔던 골수팬들이 그들에게 가장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려 한다. 물론 이 공연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아직 누구도 확정할 수 없다. 태일조차. 하지만 말은 하지 않아도 평소보다 무거운 공기를 모두들 어깨에 나누어 지고 있다. 자리에 앉자마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등이 힘겹게 굽었다.
태일은 밴드 멤버들과 무대 옆의 간이 대기실에서 맥주를 마시는 듯하고, 혜원과 나는 계속 구석에 박혀 있기로 했다.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넨다.
“엊그제 영화를 하나 봤어요.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이라고.” “<페르세폴리스> 만들었던 이란 출신 감독 영화. 저도 지난주에 봤는데.” “아, 그렇구나. 그거 보고 생각했어요.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나도 태일 오빠에게 영원 불멸의 뮤즈가 되어줄 수 있을까?” “큭. 태일이한테요?”
나도 모르게 웃어버리고 말았다.
“알아요. 태일 오빠가 순정파가 아니란 거. 사실 저도 지고지순한 타입은 아니잖아요. 우리 만남이 얼마나 갈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헤어지고 몇 십년이 지나더라도 태일 오빠가 저를 그리워하며 곡을 쓰게 되는, 그런 존재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이런 면이 있다. 태일이 부러워진다. 난 미안함을 만회하려 노력해본다.
“그럴 수 있을 거예요, 혜원씨라면. 제가 태일이 안 지 이십년쯤 됐는데 이렇게 오래 만나는 여자친구는 혜원씨가 처음이에요. 아니, 여자를 여럿 만났었다는 건 아니고, 음, 어떻게 말해야 되나, 가끔씩 전해 듣거나 스치듯 본 여자들은 조금 있었죠. 없으면 이상하잖아요, 나이가 몇인데. 근데 정식으로 소개해주고 몇달씩이나 사귀는 걸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혜원씨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거겠죠. 정말 특별해요.”
혜원이 투명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다.
“이적 오빠도 그런 운명적인 사랑 믿으세요?” “음, 솔직히 얘기하면 그 영화나 <불멸의 연인> 같은, 필생 단 하나뿐인 숙명적인 사랑 얘기는 잘 안 믿어요. 낭만적인 건 좋지만 지나치면 자기도취같이 보여서. 이번 영화는 이야기 자체가 뭐랄까, 유럽에 중동의 이미지를 파는 것처럼 보인달까. 스스로를 상품화하는 오리엔탈리즘? <천일야화> 있잖아요. 거기 보면 이런 운명적 사랑 얘기가 의외로 많거든요. 심지어 소문만 듣고 사랑에 빠지는 경우도 나오고. 하긴 유럽에 <천일야화>가 처음 제대로 소개된 게 18세기 초 프랑스 사람 앙투안 갈랑의 편역본을 통해서였으니, 프랑스어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조르주 메라는 사람이 그랬다대요, ‘<천일야화>는 결국 앙투안 갈랑의 작품이며, 아랍 문학의 걸작이 아닌 프랑스 문학의 걸작이다.’ 여전히 아랍의 이미지는 유럽의 프리즘을 통하나 봐요.” “정확히 무슨 얘기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전 동화적이어서 재미있게 봤는데.” “실은 저도 제가 무슨 얘기하는지 잘 몰라요.”
얼굴이 붉어진다.
“그러고 보니 그 영화 보고 바로 다음날 또 프랑스영화 봤어요. <인 더 하우스>. 오종 감독? 태일 오빠랑 같이 봤는데, 되게 빠져들었어요.” “그래요? 어떤 영화인데요?” “고등학교에서 문학 수업 듣는 한 학생이 친구 집을 찾아가며 몰래 엿보는 것들을 계속 글에 담는데, 문학 선생이 거기에 점점 빠져들어서 무리한 시도를 부추기다 문제가 생기는, 그런 내용이에요. 태일이 오빠는 이야기가 하도 좋아서 자기 마음대로 ‘올해의 각본상’을 주려다가 마지막에 파국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보여주려는 거에 실망해서 접었대요.” “왠지 제가 <씨네21>에 쓰는 글이랑 비슷한 것 같네요.” “그런가요? 근래엔 제가 통 못 봐서. 어쨌든 태일이 오빠가 요즘 ‘어떻게 끝을 내느냐’에 대해서 생각이 많은가 봐요. 밴드의 마지막도 질질 끌어선 안된다고 술 마실 때마다 중얼거리고.”
인생이 영화라면, 태일의 밴드 이야기를 다룬 한편의 영화가 이제 끝나려 하고 있다. 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찍을지 우리는 언제나 고민한다. 미련 없이 쿨하게 마무리하고 싶지만, 어느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이야기이기에 쾌도난마의 결단은 쉽지 않다. 때로는 냉정히 끝낸 뒤에 허겁지겁 속편을 꿈꿔보기도 한다. 혜원과 영화 이야기가 잦아들 무렵, 클럽 안에 불이 꺼지고 무대에 단출한 조명이 들어온다. 많지 않은 관객은 어느 때보다 목 놓아 환호성을 보낸다. 이윽고 눈 화장을 화려하게 한 태일이 뛰어나오며 그들을 향해 펜더 베이스기타를 높이 들었다.
마지막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