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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길을 따라 덜컹거리는 고동이 전해진다. 쇠로 된 심장을 펄떡거릴 때마다 기차는 점점 가까워지고 곧 우레 같은 울림을 남기며 지나간다. 마치 폭풍과도 같은 거대한 에너지. 기차는 물류와 사람을 실어 나르는 걸 넘어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성을 지니는 생명체다. 넘을 수 없는 곳은 돌아가야 했던 종래의 운송수단과 달리 산을 뚫고 도시를 가로지르며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기차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운동 에너지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차에 매혹되고 기차를 동경하고 기차에 오른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수많은 영화들이 인생을 닮은 철길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매혹되어왔다. 봉준호 감독이 기차영화의 완결판이 될 것이라 공언했던 <설국열차>의 칸칸을 지날 때마다 그간 영화가 사랑해온 기차의 다양한 면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차영화들이 깔아놓은 선로를 따라 <설국열차>를 재구성해봤다. 봉준호 감독의 표현대로 “지극히 영화적인 공간”인 기차를 다시 한번 자신의 영화 속으로 녹여낸 <설국열차>의 설계도를 살펴보자.
1 꼬리칸
<북극의 제왕>(1973) 감독 로버트 알드리치
꼬리칸은 무임승차의 칸이다. 빙하기의 지구에서 살아남고자 필사적으로 기차에 몸을 실은 사람들을 기다리는 건 가혹한 생존경쟁과 차별의 벽이다. 앞칸에서 ‘베풀어주는’ 단백질 블록을 먹으며 햇빛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어 있는 고깃덩어리나 다름없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한줌의 빛을 발견하는 것이 사람. 알베르 카뮈의 표현을 빌리면 “저항하기에 인간”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꼬리칸의 혁명가 커티스(크리스 에반스)와 기차의 관리자 메이슨의 대립은 로버트 알드리치 감독의 <북극의 제왕>(1973)을 떠올리게 한다.
1933년 대공황을 배경으로 한 <북극의 제왕>은 기차에 몰래 타는 부랑아들과 그들을 막는 기차 승무원간의 대결을 그린다. 기본적으로 힘과 힘이 부딪치는 액션과 기차라는 한정되고 좁은 공간을 활용한 박진감 넘치는 장면이 압권인 영화다. 대공황 당시 머물 곳을 찾아 기차에 무임승차하며 전국을 떠도는 부랑아들이 넘쳐났는데, 19호 기차 승무원 샤크(어네스트 보그나인)는 무임승차한 이들을 불문곡직하고 망치로 때려죽이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에 분노한 방랑자 넘버원(리 마빈)은 19호 기차를 타고 포클랜드까지 가겠다고 선언한다. 무임승차한 승객과 승무원간의 사소하고 우스운 대결처럼 보이지만 이는 실상 악랄한 권위를 휘두르는 기득권과 이에 저항하는 자유인에 관한 이야기다. 열차에 오르지 못하는 부랑아들은 대공황 당시 사회에서 내쳐진 이들에 대한 상징이며, 샤크와 넘버원의 대결은 인간의 존엄과 살 권리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에 부랑아들이 생사에 내몰리고 있음에도 자신들의 세례행사에 바쁜 종교단체의 위선적인 모습 등이 아이러니를 한층 부각시킨다. 샤크 역을 맡은 어네스트 보그나인의 흉악한 미소 사이 징그러운 이빨이 메이슨 역을 맡은 틸다 스윈튼의 뻐드렁니와 겹쳐 보이는 건 단순한 착시가 아니다.
결국 <설국열차>는 기차의 영화다. 무엇보다 구성이 그러하다. 봉준호 감독의 말처럼 “이 영화는 돌진하는 영화”이며 “기차의 핵심적인 매력은 우회로가 없다는 점”이다. 그는 이를 위해 기차칸의 배열을 고스란히 신의 배열로, 기차칸 순서를 신 순서가 되도록 구성했다. 각 칸을 지날 때마다 새로운 세계와 또 다른 액션이 펼쳐지는 <설국열차>의 구성은 미닫이문을 열 때마다 적이 튀어나오는 찬바라영화를 닮았다. 제일 앞에 있는 엔진칸은 제일 높이 있는 최상층과 같고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꼬리칸은 딛고 기어 올라가야 할 바닥이다. 더 이상 떨어질 곳 없는 바닥, 꼬리칸 미술의 핵심은 거기에 있다.
2 단백질 블록 생산칸
<대열차작전>(1964) 감독 존 프랑켄하이머
2차대전 말기 연합군의 파리상륙 직전 독일군은 프랑스의 미술품들을 싣고 독일로 떠나려 하고 프랑스 저항군은 이를 막으려 한다. 철도 감독관 라비쉬(버트 랭커스터)는 미술품을 훼손시키지 않고 되찾기 위해 독일군 몰래 열차 선로를 조작해 교묘하게 열차를 다시 프랑스로 되돌리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대열차작전>은 기차를 활용한 액션이 총격전이나 폭파장면 없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보여주는 수작이다. <대열차작전>은 원래 아서 펜이 감독을 맡았지만 기차 액션을 부각하고 싶었던 배우 버트 랭커스터의 압력으로 촬영 3일 만에 존 프랑켄하이머로 감독이 교체되기도 했다. 멈추지 않고 지구를 일주하는 최첨단 기차인 설국열차 후미의 꼬리칸, 단백질 블록 생산칸, 관리자들이 기거하는 칸은 <대열차작전>처럼 기름때 낀 철의 질감을 바탕으로 묵직하고 무거운 증기기관차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기차 안팎을 넘나드는 <대열차작전>과는 달리 기차 내부에 한정되어 있지만 거칠게 밀어붙이는 가운데에도 ‘기차를 훼손시켜서는 안된다’는 제약이 한층 흥미를 배가시킨다는 점이 무척 닮았다.
3 물공급칸
<언스토퍼블>(2010) 감독 토니 스콧
<언스토퍼블>은 단순하다. 폭발물을 가득 실은 기차가 폭주하고 두 남자가 이를 막으려는 게 이야기의 전부다. 그러나 이 영화가 앞으로 내달리는 힘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단단한 직선의 길 위에서 영원히 균일한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기차의 본능. <언스토퍼블>의 설정은 안드레이 콘찰로프스키의 <폭주기관차>와 유사하지만 철도 방지턱부터 선로를 비트는 것까지 열차를 막기 위한 다양하고 현실적인 방법들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좀더 실감난다. 그럼에도 기차는 이 모든 걸 가볍게 무시하고 육중하게 내달린다. 다리와 계곡을 활용한 <설국열차> 유일의 기차 밖 액션은 이와 같은 불가항력의 무게감을 연상시킨다. 기차가 마치 금방이라도 선로를 벗어날 듯 한쪽만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있는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얼음을 깨부수고 나가는 설국열차의 위용은 이 영화가 답답한 컨테이너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폭주하듯 내달리는 기차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이어지는 긴 터널 장면도 기차였기에 활용 가능한 재기발랄한 설정이다.
4 온실칸, 고기칸, 교실칸
<다즐링 주식회사>(2007) 감독 웨스 앤더슨
기차가 꾸미기에 따라 얼마나 다채로울 수 있는지 궁금한 사람에겐 웨스 앤더슨의 <다즐링 주식회사>를 추천한다. 인도에 있는 엄마에게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하려 1년 만에 재회한 삼형제는 다즐링 주식회사의 기차를 타고 여행길에 오른다. 오래된 듯 새것 같은, 익숙한 듯 이국적인, 화려한 듯 차분한 웨스 앤더슨 특유의 색깔이 도드라지는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그들을 고향으로 안내하는 각양각색의 기차다. 앤더슨의 색깔인 노란색의 산뜻한 기차역부터 푸른색의 격자무늬가 매력적인 기차, 삼형제를 꼭 끌어안아주는 듯한 붉은 벽지의 기차까지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눈이 먼저 만족스럽다. 건조하고 어두운 설국열차 안에도 마치 현실이 아닌 듯한 광경들이 연이어 펼쳐지는데, 각종 작물을 기르는 초록색의 평화로운 온실칸, 꼬리칸 승객들이 꿈에라도 한번 먹어보고 싶어 했던 붉은색 고기가 주렁주렁 매달린 고기칸, 알록달록 동화나라에 온 듯한 교실칸을 연달아 보노라면 이곳이 같은 기차 안이 맞나 싶을 정도.
5 수영장칸
<원티드>(2010) 감독 티무어 베크맘베토프 <론 레인저>(2013) 감독 고어 버빈스키
앞서 꼬리칸쪽에서의 액션이 과밀도 상태에서 폭발하는 육체적인 에너지 중심이라면 앞쪽 칸 사람들이 거주하는 구역에서의 싸움은 일대일 위주의 빠르고 정밀한 액션으로 변모한다. 주인공 일행이 통유리로 되어 있는 수영장칸을 지나갈 때 기차의 곡선 구간을 계산하여 건너편 기차칸으로 총알을 날리는 장면은 흡사 티무어 베크맘베토프 감독의 <원티드>(2008)에서 휘어지는 총알을 날리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차가운 세계로부터 승객들을 보호해주는 든든한 기차 외벽이 손상되는 것마저 개의치 않는 격렬한 증오와 집요한 추적.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총알 한발. 길게 이어진 기차영화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액션이 <설국열차>에서도 발견된다. 건너편 차량으로 총을 쏘는 장면이야 기차영화의 정석이라고 할 만큼 다수의 영화에서 등장하지만 원형을 그리며 휘어진 차량을 가로질러 서로에게 총을 쏘는 장면은 그리 흔치 않다. 유리칸의 액션을 전후로 기차 안과 밖을 모두 활용하는 기차 액션의 끝판왕 <론 레인저>의 터널 장면과 다리 장면도 언뜻 눈꺼풀 위로 포개어지는 느낌이다.
6 사우나칸
<트랜스 시베리아>(2008) 감독 브래드 앤더슨
설정상의 분위기만으로 <설국열차>와 가장 유사한 영화를 꼽으라면 브래드 앤더슨 감독의 <트랜스 시베리아>가 떠오른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그린 이 영화의 긴장감은 기차라는 제한된 공간과 더불어 안과 밖을 단절시키는 러시아의 극한의 날씨를 통해 형성된다. 설원 위를 내달리는 기차 이미지가 핵심적이라 할 만한 영화다. 다만 <설국열차>와는 달리 격렬한 장면은 거의 없고 낯선 인물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긴장감을 뼈대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설국열차> 액션 시퀀스의 마감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우나칸에서 이루어지는데 생명체가 살 수조차 없는 바깥 환경과 대조되는, 그야말로 농담 같은 환경이다. 비록 기차영화는 아니지만 사우나에서의 액션장면이 인상적인 영화로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이스턴 프라미스>를 꼽을 수 있는데, 이 영화 속 마피아의 근거지가 되는 식당 이름이 ‘트랜스 시베리아’란 사실은 <설국열차>와는 전혀 상관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재미있는 연결이다.
7 엔진칸
<모스트>(2003) 감독 보비 가라베디안
‘설국열차’가 만들어진 이래 처음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꼬리칸부터 엔진칸까지 지나온 커티스. 그는 엔진칸에 이르러 기차의 설계자 윌포드(에드 해리스)로부터 윤리적인 딜레마를 강요받는다. 윌포드는 기차라는 폐쇄된 생태계를 유지해 나가기 위해 다소간의 희생은 불가피한하다고 말한다. 과연 전체를 위해 소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정당한가. 이 해묵고 진부한 논쟁을 파고드는 한편의 영화가 있다. 2004년 제76회 아카데미 시상식 단편영화작품상에 노미네이트된 체코 보비 가라베디안 감독의 단편영화 <모스트>(2003)다. 기차가 오가는 큰 다리를 관리하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따라온 아들, 기차는 그날따라 평소보다 빨리 들어오고 아들은 미처 눈치채지 못한 아버지를 대신해 다리를 내리려다 그만 다리 사이로 떨어진다. 그 모습을 목격한 아버지. 그리고 다가오는 기차. 아들을 살리고 기차 안의 사람들을 죽일 것인가, 아니면 아들을 죽이고 많은 사람들을 살릴 것인가. 종교적인 색채를 빼고 보아도 충분히 의미있는 질문을 남기는 이 영화가 하필 <설국열차>가 촬영된 체코의 영화라는 것도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