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시 언론시사 이후 SNS 반응들을 체크해봤나.
=요즘 가장 달라진 풍경 중 하나다. 무서워서 보다 말았다. (웃음) 그저 개봉 이후 관객의 냉정한 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해보니 <마더>와 <설국열차> 사이에 가장 달라진 분위기가 그거다. <마더> 개봉 때만 해도 SNS가 없었는데 적응하기 힘들 정도로 참 많이 달라졌다.
-외려 제작자이기도 한 박찬욱 감독은 꼼꼼히 SNS를 체크하고 있더라.
=나에게는 ‘갑’이어서 ‘갑찬욱’이라고 부르는데 역시 훌륭한 제작자다. (웃음) 어쨌건 영화가 개봉하면 그전까지 SNS의 소용돌이가 좀 잦아들지 않을까.
-송강호가 연기한 ‘남궁민수’라는 긴 이름이 기차처럼 느껴진다. 언제나 도입부에서 관객을 헛갈리게 만드는 요소를 집어넣는데 이번에는 ‘냄 궁민수’를 ‘남궁 민수’로 교정하는 장면이 그렇게 느껴졌다.
=그런가? (웃음) 내가 신천중학교를 나왔는데 3학년 때 ‘남궁민’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나는 걔를 ‘남궁’이라 부르면서 놀리고 남궁은 나를 ‘봉’이라 부르면서 놀렸다. (웃음) 어쨌건 목표는 외국인이 발음하기 힘든 이름을 써서 궁금증을 유발하고 싶었다. 독고철현, 남궁민수, 그렇게 고민하다가 (외국인 발음을 흉내내며) 남. 궁. 민. 수. 라고 지었다. 기차 같은 느낌일지는 모르겠는데 큰 이름 자막만으로도 화면이 꽉 차면 멋있기도 하고. (웃음)
-당신과 함께 각본가로 올라가 있는 사람이 바로 켈리 마스터슨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름이다. 어떻게 역할을 분담했나.
=2010년에는 내가 1년간 초고를 썼다. 물론 원작과는 완전히 다른 기본 컨셉을 확실히 만들었다. 그렇게 인물들의 기본 구조를 만든 초고가 그해 9월에 나왔고 영어로 번역하기 전에 한번 더 고쳐서 연말에 재고가 나왔다. 이후 영어권 작가를 찾았는데, 마침 지인의 추천으로 본 시드니 루멧의 유작 <악마가 너의 죽음을 알기 전에>(2007)의 시나리오가 굉장히 파워풀하고 좋더라.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이나 에단 호크 같은 강력한 캐릭터들이 간결하고 힘있는 대사를 잘 구사한다. 보통 할리우드 시나리오 크레딧을 보면 서너명의 이름이 함께 올라가 있어서 ‘누가 뭘 어떻게 쓴 걸까’ 헛갈리는데 다행히 그 작품은 오직 그 혼자 썼더라. 잘됐다고 생각했지. (웃음) 알고 보니 원래 희곡을 많이 쓴 작가로 연극계에서는 상당한 명성이 있는 분이었다. 그때부터 그가 번역된 시나리오를 고치고 다듬는 과정을 거쳤다. 모자와 신발을 비유하며 얘기하는 메이슨(틸다 스윈튼)의 연설 같은 것들이 켈리 마스터슨의 솜씨다.
-당신 영화에서 유일하게 눈을 본 건 <괴물> 마지막 장면에 쓸쓸하게 남겨진 눈 덮인 한강 매점이었다. 로케이션 촬영에 매혹을 느끼고 영화 속 기후를 중요하게 다루는 사람으로서, 혹시 눈장면을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이전에 한 적 있었나.
=현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촬영이 겨울까지 이어졌을 때 늘 눈을 치우거나 CG로 지운 기억이 난다. (웃음) 영화 속 배경은 가을인데 뒷배경에 눈이 쌓여 있으면 제작부가 열심히 치우는 거다. <설국열차>는 CG로 만든 눈도 나오고 실제 오스트리아 설원에서 촬영도 했다. 눈 자체보다는 외부의 혹한과 전혀 다른 실내 공간이라는, 그 나뉜 경계가 흥미로웠다. 그래서 초반부에 앤드류(이완 브렘너)의 팔을 밖으로 빼냈다가 작살내는 끔찍한 장면의 드라마를 넣었다. 절대 나갈 수 없는 바깥, 안에서는 인간들이 지저분하게 바글거리며 사는 모습, 그리고 그 경계를 잠시 넘었다가 끔찍하게 잘려나가는 앤드류의 팔, 그렇게 꼬리칸과 엔진실의 대조처럼 <설국열차>는 그 ‘경계’라는 느낌이 중요했다.
-꼬리칸 사람들의 식량인 단백질 블록은 양갱처럼 보이는데, 혹시 정말인가.
=그냥 양갱을 쓰면 편했겠지만, 따로 제작한 거다. 메이슨이 직접 먹는 장면에서 보면 찰랑찰랑 흔들린다. 실제 양갱은 좀 딱딱해서 그렇지 않다. 일본 관객도 볼 텐데 100% 양갱이면 좀 웃길 것 같기도 해서 고민이 됐다. 사실은 미역을 재료로 만든건데 바퀴벌레 날개 색깔로 만들어달라고 특별히 주문했다. (웃음) 그런데 먹기 좋게 설탕을 많이 넣었다. 나는 막상 먹어보니 들척지근한 게 참 기분이 나쁘던데 틸다 스윈튼과 제이미 벨은 인간적으로 너무 많이 먹어치웠다. (웃음) 그래서 소품팀이 배우들이 간식(?)으로 먹을 건 따로 통에 담아왔다.
-그걸 제조하는 사람이 바로 <괴물>에서 미국인 의사로 나온 폴 라자다.
=극중 이름도 폴인데 처음 시나리오 쓸 때부터 그분을 생각하며 썼다. 한 시퀀스에만 나오지만 의미있는 역이다. 원래 꼬리칸에 있다가 끌려간 사람이라는 설정이다. 예전에 <양들의 침묵>(1991), <필라델피아>(1993) 같은 영화에 나왔던 분인데 원래 ‘사시’인 그 느낌이 참 묘하다. 그 눈으로 단백질 블록을 만드는 이미지가 딱 떠올랐다. 다른 분들 중에도 흥미로운 필모그래피를 지닌 분들이 더 있다. 메이슨과 함께 다니는 일본인 장교 후유로 나온 분은 사실 한국계 동포인 스티브 박으로, 코언 형제의 <시리어스 맨>(2009)을 본 사람들은 꽤 알아볼 거다. <파고>(1996)에서는 마지(프랜시스 맥도먼드)의 고등학교 동창으로 나와 껄떡대던 마이크 야나기타로 분했다. (웃음) ‘에그 헤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민머리의 킬러 토마스 레마퀴스는 <노이 알비노이>(2003)의 노이를 연기했던 배우다.
-당신의 영화 중 액션의 요소가 강한 두편이 바로 <괴물>과 <설국열차>다. <괴물> 당시에도 한강이라는 너른 공간을 감안해 2.35:1로 촬영할 것을 고민하다가 굉장히 깊은 괴물의 은신처, 그리고 세대를 걸쳐 이어지는 ‘수직의 비극’ 등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1.85:1을 택했다. 그래서 기차가 나오는 <설국열차>는 2.35:1을 채택하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1.85:1이다.
=자연스럽게 끌렸다. 체질적으로 1.85:1이 나와 맞는 것 같다. (웃음) 오히려 <마더>는 2.35:1을 택했는데 마더(김혜자)를 둘러싼 불안한 느낌을 화면 곳곳에 심어놓고 싶었다. <괴물>과 <설국열차> 모두 액션이 강하긴 하지만 스펙터클하게 보여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닥터 지바고>(1965) 같은 광대한 설원이 나오기보다는 열차 내부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까. 좁은 열차 내부에 인물들이 빽빽하게 밀집돼 있고 그걸 1.85:1로 담아야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라는 고독한 히어로가 도드라져 보일 것이라 생각했다.
-무술감독으로 올라가 있는 사람이 바로 줄리언 스펜서와 파벨 카즐이다. 대니 보일의 파트너로도 유명한 줄리언 스펜서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2007)의 사우나 격투 신을 설계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설국열차 안에도 문이 열리면 사우나칸이 나올 때가 있다. 액션 컨셉에 관한 회의를 하는데 그때 줄리언 스펜서와 내 눈이 딱 마주치면서 ‘이번에도 사우나에서 세게 한번?’ 하는 느낌의 시선을 교환한 적이 있다. (웃음) 슈트를 입은 킬러가 몸에 꽂힌 칼을 직접 뽑아서 다시 사용하는 장면들을 고안했는데 마음에 들었다. 우리 프로듀서는 “저 칼을 또 써?” 했는데 나는 신났지. (웃음) 영국 출신이고 <28주후>(2007), <선샤인>(2007) 등 대니 보일 작품을 많이 했는데 크리스 에반스가 <선샤인>에도 출연했기에 호흡이 잘 맞았다. 줄리언 스펜서가 사실상 전체 액션을 디자인한 무술감독이었고 파벨 카즐은 체코 현지 스턴트를 관리한 사람이다. 체코 스턴트팀이 동유럽에서는 꽤 유명한데 <미이라>(1999), <블레이드2>(2002) 등 할리우드영화들도 체코로 많이 와 작업하니까 작품들도 꽤 많이 겹친다. 한번은 체코에서 돌아와 <미션 임파서블: 고스트 프로토콜>(2011)을 보는데, 초반 감옥 탈출 시퀀스에서 파벨을 비롯해 낯익은 팀원들이 대거 나와서 매우 반가웠다. (웃음)
-액션 연출의 컨셉에 대해 묻고 싶다. 의외로 원시적인 다찌마리 스타일로 찍었고, 슈트를 차려입은 킬러와의 대결은 일대일 컨셉이다.
=미래의 첨단기차가 등장하는 2031년의 SF영화에서 몽둥이와 도끼로 싸우는 원시적인 느낌을 주고 싶었다. 심지어 횃불까지 나오고. (웃음) 그 정점에 있는 게 예카테리나 브리지 전투 시퀀스인데 KKK단 같은 일군의 무리가 물고기 배를 가르며 겁을 준다. 원래 시나리오에 없던 건데 스토리보드를 만들다 그런 느낌이 떠올라서 삽입했다. 뭔가 열차 내에서 피의 축제가 시작된다는 느낌이랄까. 반면 킬러와의 대결은 원형 선로에서 서로 마주보며 일대일 총격전을 벌이면 좋을 것 같았다. 미래 열차에서 벌어지는 서부극 느낌을 주고 싶었다. 실제로 미국에 그런 거대한 협곡의 U자 코스가 있다는데 기차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필수 관람코스라더라. 그 킬러는 어딘가 정신이 이상한 상태인데, 광란의 클럽 좀비들도 그렇고 폐쇄된 기차 안에서만 17년이나 살면 어딘가 다들 정신적으로 이상해질 수밖에 없을 거다.
-수평 트래킹 액션 장면을 기대했다. 이전 영화들의 수평 트래킹 장면도 인상적이었고, 열차라는 공간은 거기에 더없이 들어맞는다.
=기차영화에서는 안 할 수 없다. (웃음) 가장 인상적인 건 역시 커티스의 고독한 혈투다. 그를 따르는 반란군이 있긴 하지만 그 안에서도 한없이 외롭게 보였으면 했다. 좁은 열차 칸 안의 악다구니 같은 요란한 싸움 속에서 갑자기 우아하면서도 측은해 보이는 고속촬영 장면을 떠올렸다. 그때 음악도 싹 바뀐다. 홍경표 촬영감독, 줄리언 스펜서 무술감독, 크리스 에반스 다 너무 고생했다. 다행히 크리스 에반스가 워낙 액션을 잘한다. 미리 합을 맞추면 타이밍이나 위치가 틀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거의 1cm도 실수가 없다. 그걸 보더니 (송)강호 형도 나한테 와서는 귓속말로 (송강호 성대모사로) “크리스 저 새끼 기계야 기계. 근육 한번 만져봐, 팔이 완전 돌덩어리야”라고 하더라. (웃음) 재밌는 것은 한번은 크리스 에반스가 <살인의 추억>을 여러 번 반복해서 봤다며, 초반에 박두만(송강호)이 서태윤(김상경)을 처음 만났을 때 “여기가 강간의 왕국이냐”며 거의 드롭킥으로 날아 차는 장면이 대단하다고 했다. 옆에 있는 그 주인공인 강호 형을 보면서, 자기가 아무리 봐도 그 장면은 합을 짠 게 아니라며, 한국영화는 그렇게 실제로 때리냐고 감탄하더라. (웃음) 그걸 주워들은 제이미 벨도 액션에 대해 묻기에 ‘송강호가 너하고 싸우는 신에서 진짜로 때릴 건데 어떡할래?’ 그랬더니 ‘당연히 나도 제대로 까야지, 맞받아 싸울 각오가 돼 있다’더라. 강호 형과 비교해도 쥐방울만한 녀석인데 종알종알대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웃음)
-원작에서는 기차가 잠깐 서기도 하고 외부로 나가기도 한다. 그래서 외부 공간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지는 않았나.
=내가 그런 결정은 빨리 내리는 편이다. (웃음) 원작에도 나오지만 밖에 나가서 비행기 타고, 그런 식으로 뭔가 더 벌이는 걸 싫어한다. 그런 공간의 집중도 면이랄까, 그래서 나는 <에이리언> 시리즈도 제임스 카메론의 2편보다는 리들리 스콧의 1편이 더 좋다. 새로운 메커닉도 등장하고 액션도 다채로워서 2편을 좋아하는 팬들도 많은데 1편은 우주선도 하나, 에일리언도 한 마리다. 명확해서 지지한다. 에일리언들이 떼로 덤비고 그러는 게 싫더라. (웃음) 기차라는 제한된 공간에 집중하는 응축된 긴장감과 박진감을 내내 고민했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이르러 어떤 절대자를 만나러 가는 과정은 <지옥의 묵시록>(1979)이나 <블레이드 러너>(1982) 등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다뤄졌다. 연출자로서 그 전개가 가장 고심한 부분이지 않을까.
=우리끼리도 커티스의 여정이라는 측면에서 <지옥의 묵시록>과 그 원작인 <암흑의 핵심>에 대한 얘기를 나누긴 했다. 부연하자면 초반의 길리엄(존 허트)과 후반의 윌포드(에드 해리스)를 양극단에 놓고 모두 유사 부자관계를 맺는다면, 좋은 아버지를 떠나 나쁜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이랄까. 그게 원작과 근본적으로 다른 핵심이다. 경계를 나누면서 시작했던 영화가 뒤로 가면서 결국 선과 악의 경계마저 붕괴돼가는 지점에 다다른다. 시나리오를 쓸 때 가장 만만치 않았던 부분이다.
-그 과정에서 길리엄의 모습은 <살인의 추억>의 신 반장(송재호)이나 <괴물>의 아버지(변희봉)를 떠올리게 하는데, 절대자 윌포드는 당신이 이제껏 다뤄보지 않은 장르적 캐릭터다.
=나는 주로 바보스런 캐릭터는 잘 만드는데 그런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를 다뤄본 적이 없어 낯설다. (웃음) 물론 그와 별개로 윌포드를 <지옥의 묵시록>의 커츠 대령(말론 브랜도)처럼 접근하지는 않았다. 윌포드는 무게만 잡는 게 아니라 느닷없이 성행위를 연상시키는 천박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에드 해리스도 내 의도를 알아채고는 바로 잘해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부분들은 내 의도를 떠나 존 허트나 에드 해리스 등 대배우들의 관록에 기댔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그분들은 이제 더이상 연기의 테크닉을 논할 수준의 배우들이 아니지 않은가. 에드 해리스는 그저 엔진실에 딱 서 있는 존재감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봤다. 맨 처음 그의 얼굴을 찍을 때 홍경표 촬영감독과 함께 만족한 얼굴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당신은 촬영현장의 변수를 즐기고 쉽게 흡수하는 스타일의 감독이다. 그런 점에서 결과적으로 질문하자면, 거의 100% 세트에서 촬영된 이번 영화의 환경이 개인의 연출 스타일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궁금하다. 일단은 참 답답했을 것 같다. (웃음)
=체코에서의 우리의 일상을 묘사해보겠다. 프라하 시내에 단기 전세인 숙소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아침마다 봉고차가 싹 돈다. 그러면 새벽 인력시장에 가는 사람들처럼 다들 부스스한 얼굴로 차에 올라탄다. 미국 스탭이 타면 ‘굿모닝~’ 하고 인사하고 체코 스탭이 타면 ‘도브리 덴~’ 하고 인사한다. 홍경표 감독의 얘기를 빌리자면 ‘탄 캐러 가는 광부들’처럼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거다. (웃음) <마더> 때는 참 좋았지. 김혜자 선생님과 식당을 가면 다들 알아보고는 정말 산해진미를 차려주신다. 그런 다음 새들이 지저귀는 이 산, 저 산으로 옮겨 다니며 즐겁게 촬영하는 거다. 그런데 <설국열차>는 출근과 동시에 하루 종일 갇혀서 일했다. 솔직히 그게 너무 힘들었다. 로케이션 촬영을 하다보면 날씨 때문에 부득이하게 촬영을 쉬는 날도 있으니, 그때 지난 편집본을 보면서 회의도 하고 배우들과 소주도 한잔하면 꽤 의미있는 충전의 시간이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게 어디 있나, 그냥 계속 찍는 거다. 그래서 예정된 스케줄을 오버할 일은 없었지만 촬영 중반에는 세트에 들어가기 싫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런 생활의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해서 얘기할 수는 없지만, 내가 로케이션의 신선한 공기를 좋아하는 감독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미 설계한 것도 막상 로케이션 촬영을 나가 여건에 맞게 콘티를 수정해서 좋아지는 경우도 많았다. 배우의 애드리브처럼 공간의 애드리브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다양한 배우들이 수시로 등장하는 건 좋았다. 칸마다 새로운 미술이 펼쳐지고 새로운 얼굴이 등장하니까, 그렇게 공간의 답답함을 배우들로 인해 많이 해소했다.
-이른바 ‘삑사리의 미학’이라 불렸던, <살인의 추억>에서 수사반장이 논두렁에서 굴러떨어지고 <괴물>의 괴물도 제풀에 한강에서 구르는 그런 모습을 혹시나 볼까 했다.
=이번에도 커티스가 생선 밟고 쓰러지는 장면이 있다. (웃음) 물론 분위기가 웃기지는 않은데, 한번은 크리스가 그러는 게 너무 황당한 거 아니냐고 묻더라. 그래서 내가 ‘중요한 순간에 그러면 가슴 아프잖아’라고 얘기해줬다. (웃음)
-메이슨이 연설할 때 뒤에서 뭔가 떨어지자 돌아보는 장면도 기억난다.
=그건 미리 세팅한 게 아니었는데, 틸다의 정말 놀라운 동물적 감각이다. 사실 NG나 다름없는데 그걸 받아서 돌아보고 바로 연설을 시작하는 그 느낌이 좋아서, 나중에 떨어지는 소음을 더 키우고 그 테이크를 썼다. 여자 송강호라고나 할까. (웃음) 송강호도 뭔가 하려고 했다가 입맛만 다시고는 다시 쫙 가라앉는 그런 순간들이 있는데 딱 그거였다. 게다가 더 놀란 건 사실 한국 사람인 내가 전혀 캐치할 수 없는 부분인데, 본인이 영국 요크셔 악센트를 쓰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했다. 나야 뉘앙스를 모르지만 그게 한국으로 치면 경북 사투리쯤 되나? 정치인도 꽤 나고 보수적이고 산업화된 지역이고, 하여간 그런 맥락이라는데 영어권 관객은 흥미롭게 반응할 것 같다.
-언론시사 이후 이미 SNS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얘기들이 오갔다. 봉준호라는 이름과 그 전작에 기대어 <설국열차>를 따라가려 했던 사람들로서는 의외의 영화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나는 그런 기대를 계속 배반하고 싶은 사람이다. 나의 새로운 영화가 어떤 꼴을 갖췄으면 좋겠다 미리 기대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몇 퍼센트 미리 재단해서 배합하여 영화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에 꽂혀서 달려들었다면 그걸 감당하기 위해 매 순간 아등바등 최선을 다해 싸우는 거다. <설국열차> 역시 2004년에 맨 처음 원작 만화를 접했던 순간으로부터 여기까지, 영화 속 인물들이 직진하듯 나 역시 그렇게 왔다. 좀더 지나서, 이 장면은 옛날 내 영화 무엇과 비슷하네, 이건 또 전혀 다르네, 그렇게 알게 되는 것이지 사실 만들고 난 직후나 개봉 즈음에는 전작과의 관계 설정이랄까, 혹은 내 필모그래피 안에서의 의미랄까, 그런 것들에 대해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보통은 나중에 해외영화제에 출품된 내 작품을 뒤늦게 오랜만에 보면서 ‘아 내가 저때 저래서 저걸 하고 싶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정도다. 일부 관객은 서둘러 ‘제2의 <살인의 추억>’ 혹은 ‘<괴물>의 못다 한 이야기’ 그런 걸 기대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떤 영화를 만들고 공개할 때는 무조건 그 영화하고만 정면 대결하려고 한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힘들다. (웃음) 시간이 한참 지나서 내 영화들을 돌아보면 <설국열차>까지가 나의 초기작으로 분류되지 않을까 싶다. 만드는 속도가 느려서 평생 15편 정도 찍는다고 하면, 내 초기작을 마무리하는 느낌으로 봐주면 딱 좋겠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영화 자체만 오롯이 남더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