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는 어떻게 재난을 사랑하게 되었나
2013-08-22
글 : 김경욱 (영화평론가)
1970년대 할리우드 재난영화부터 2000년대 한국형 재난영화까지
<타워>

지진, 쓰나미, 홍수, 화산 폭발 같은 자연재해 또는 화재, 선박과 비행기 사고, 바이러스 유출 등의 각종 사고를 다루는 재난영화(이 밖에 SF영화, 괴수/괴생명체 영화, 범죄영화 등과 장르를 혼합, 제작되는 다양한 재난영화가 있다)는 무성영화시대부터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화재 현장의 생존자들을 구조하는 소방관들의 활약을 그린 <파이어!>(1901), 베수비오 화산 폭발과 함께 잿더미가 된 폼페이 비극을 그린 <폼페이 최후의 날>(1908) 같은 영화가 있었다. 시각매체인 영화가 스펙터클을 극대화함으로써 관객에게 어필하려 할 때, 재난은 매우 좋은 소재였다. 옛날부터 불 구경, 물 구경, 싸움 구경을 3대 구경거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영화관을 찾은 관객은 스펙터클한 재난에 맞선 생존자들의 사투에 스릴을 만끽하며 울고 웃었다.

할리우드에서 재난영화가 가장 유행한 시기는 197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였다. 1977년 1월5일자 <버라이어티>에 실린 미국 영화사의 최고 흥행작 목록에는 이 시기 재난영화가 4편이나 들어 있었다. 세계 최대의 글라스타워 개관기념식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는 <타워링>(1974)은 4위, 보잉 항공기에 폭탄이 터져 탑승객 전원이 생존을 건 위기에 빠지는 <에어포트>(1970)는 14위, 초호화 여객선 포세이돈호가 해저 지진을 만나 전복되는 <포세이돈 어드벤쳐>(1972)는 16위, 진도 9.9의 지진이 캘리포니아 지역을 강타하는 <대지진>(1974)은 20위를 차지했다. <에어포트>가 1970년대 재난영화의 시작을 알렸다면, <포세이돈 어드벤쳐>와 <타워링>은 이 장르의 유행을 가져왔다. 이 영화들은 과거와 현재의 스타들을 대거 출연시킴으로써 더욱 화제를 모았다.

마이클 라이언과 더글러스 켈너는 <카메라 폴리티카>에서, 1970년대의 미국을 정치/경제/사회 전반의 ‘정당성의 위기’를 겪은 시대라고 진단한다. 1972년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1974년의 닉슨 대통령 사임, 1973년의 석유 파동(중동지역의 산유국들이 원유 가격을 4배로 올린 사건), 1975년의 베트남전 패배는 국가 위신의 대대적인 실추와 경제 위기(인플레이션과 실업 증가)를 초래했다. 이 시기의 조사 자료를 보면 정부에 대한 불신이 증폭되고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도는 떨어졌다. 반기업적인 정서가 팽배하고 기업에 대한 호감도는 하락했다. <에어포트> <포세이돈 어드벤쳐> <타워링> <대지진> 같은 재난영화는 미국사회에 불어닥친 위기에 대한 응답이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치명적인 재난이 발생해 모두가 생존의 위기에 빠지는 이야기는 시련에 처한 미국사회에 대한 은유였다.

<포세이돈 어드벤처>

<포세이돈 어드벤쳐> <타워링>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컨벤션

이중 <포세이돈 어드벤쳐>와 <타워링>을 살펴보면 초호화 여객선과 세계 최대의 빌딩이 해저 지진과 화재를 견디지 못하고 순식간에 무너져버린다. 이렇게 재난에 취약한 가장 큰 원인은 선박과 빌딩의 소유주들이 돈을 아끼려고 부실 시공을 했기 때문이다. 가공할 재난 앞에서 생존자들이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할 때, 이들을 구해줄 인물이 등장한다. <포세이돈 어드벤쳐>에서는 목사가 구원자/지도자로 등장하는데, 그를 믿고 따라나서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믿음이 부족하거나 나약한 사람들이 낙오하는 가운데 목사 일행은 무수한 시련을 거쳐 마침내 배의 맨 꼭대기에 도착한다. 목사는 자신의 목숨을 던져 출구를 확보하고, 결국 6명의 승객이 살아남는다. <타워링>에서는 소방수와 건축가가 힘을 합해 사투를 벌인다. 그들은 불을 끄기 위해 목숨을 걸고 빌딩의 대형물탱크를 터뜨리고,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생존하게 된다. 이 두편의 영화에서, 생존자들을 이끄는 영웅은 배의 선장이나 회사 대표 또는 시장이나 상류층 인사가 아니라(그들은 위기에 대처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구조를 기다릴 뿐이다) 종교인이나 중산층의 인물들이다. 위기의 해법을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구원신앙에서 찾거나, 강력한 남성 지도자와 가부장적인 부계질서에서 찾자는 보수적인 메시지인 셈이다. 그런데 <타워링>은 안전을 무시하고 이윤만 추구하는 대기업의 무책임한 횡포를 은유적으로 고발한다. 하지만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속성에서 빚어진 결과가 아니라 일부 나쁜 기업가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1970년대의 할리우드 재난영화는 이후 재난영화의 컨벤션을 만들어냈다. 영화의 중심이 재난의 스펙터클에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안정 상태에서 재난과 함께 무질서에 빠지고 일련의 시련을 겪는 패턴을 따라간다. 단순한 이야기 구조에 재미를 더하기 위해 재난 직전까지 다양한 인물이 등장해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 서브플롯의 중심은 가족의 멜로드라마와 로맨스다. 재난이 벌어지면 남성 인물들은 가족과 연인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또는 영웅적인 남성 인물이 등장해 헌신적으로 위기를 헤쳐나간다. 이때 정신없이 이어지는 시련 속에서 누가 살고 누가 죽는지는 영화의 마지막까지 관객을 사로잡는 주된 관심거리가 된다. 생존자와 희생자를 가르는 기준에는 어느 정도 권선징악의 가치가 개입하기도 한다.

할리우드 재난영화는 1980년대부터 침체기에 접어드는데, 1997년 영화 <타이타닉>이 대대적으로 흥행에 성공을 거두면서 부활을 예고했다(이 영화는 지금도 세계 영화 흥행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첨단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총동원해 빙산에 부딪혀 최후를 맞이한 타이타닉호의 비극을 실감나게 재현해냈다. 나날이 발전해가는 영화기술에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 대규모 지진과 쓰나미, 밀레니엄을 맞아 유행한 종말론, 9.11 테러,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의 창궐, 전세계를 떠도는 경제불황 등은 2000년대 재난영화의 유행에 충분한 자양분이 되었다.

이 요소들을 대거 망라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투모로우>(2004)와 <2012>(2009)를 들 수 있다. 급격한 지구온난화로 지구 전체가 순식간에 빙하기로 접어들거나(<투모로우>는 부시 행정부에서 무시한 환경문제의 재앙을 일깨우면서, 특히 부통령 딕 체니를 은유적으로 비판한다), 세계 곳곳에 대규모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설정으로 전세계로 재난의 규모가 확대된다. <2012>에서는 인류 멸망을 감지한 극소수의 특권층이 일종의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생존을 모색한다. 여기에 탑승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세계 최고의 권력자와 자본가 그리고 그들의 가족이다. 영화는 매우 현실적인 기준으로 생존자들을 선택한 다음 재빨리 특권층과는 거리가 먼 주인공 가족의 생존으로 관심을 돌려버린다. <투모로우>에서는 멕시코 정부가 남미의 부채를 전면 탕감받는 조건으로 국경에 밀려드는 미국인들을 받아들인다. 인류멸망은 상상할 수 있지만, 여전히 자본주의 이후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북반구 인구 또는 전세계 인구의 대부분이 몰살하는 가운데, 주인공 남성들은 특정 집단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오로지 가부장으로서 자신의 가족의 생존만을 위해 필사의 사투를 벌인다. 이것은 9.11 테러 이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자, 세계화에 따른 양육강식과 승자 독식 사회의 살벌한 풍경이기도 하다.

<타워링>

IMF 이후의 한국형 재난영화들

최근 한국의 재난영화로는 <해운대>(2009), <연가시>(2012), <타워>(2012) 그리고 개봉을 앞둔 <감기>가 있다. 모두 IMF 외환위기 이후인 2000년대에 등장했다. 먼저 쓰나미가 해운대를 강타하는 <해운대>는 1970년대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컨벤션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그래서 다양한 인물들의 가족 드라마와 로맨스, 코믹한 에피소드가 나열되다가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오면서 위기가 찾아온다. 할리우드 재난영화와 다른 점은 인물들의 생사가 갈릴 때마다 신파를 한껏 가미해 감정을 고조시키는 흥행 전략이다.

변종 연가시가 사람들에게 침투해 대량 살상을 빚는 <연가시>는 1970년대와 2000년대 할리우드 재난영화의 컨벤션을 따르면서,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의 설정을 가미했다. 가공할 재난의 원인은 장부 조작으로 제약회사를 헐값에 인수한 다음 거액에 팔기 위해 변종 연가시를 만들어낸 기업주와 연구원들이다. 반면 다른 제약회사들은 연가시 구충제 제조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 여기에 개인의 이익만 좇는 악덕 기업(그리고 한국사회에서 점점 더 이미지가 나빠지는 일명 ‘검은 머리 외국인’, 즉 혈통과 인종은 한국인이지만 국적과 사고방식은 외국인인 사람들. 그러니까 <연가시>에서는 제약회사의 사장)과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착한 기업을 분리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이 영화의 서브플롯은 남자주인공 재혁(김명민)이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이 연가시에 감염된 사실을 알고 가족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생계를 위해 밖에서 개처럼 일하는 가장을 두고 계곡으로 피서를 갔던 가족들이 그 대가로 치명적인 위기에 빠진 것이다. 재혁은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인 덕분에 유일한 연가시 구충제인 윈다졸을 남들보다 쉽게 손에 넣는다. 그런데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아기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그 엄마에게 약 한알을 건네준 선행 때문에 그는 가족을 구할 수 있는 윈다졸 모두를 잃는다. 이때 가족의 생사를 초월한 희생으로 숭고해야 할 장면이 오히려 주인공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전락하면서 매우 미묘한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이 장면과 함께 재혁의 반복되는 실패는 아버지의 자리가 모호한 한국영화와 아버지의 자리를 구축해가는 할리우드영화 사이에서 형성된 균열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재난 앞에서 정부는 일단 감염자들을 특정 장소에 격리 수용한다. 이들은 전염병 환자가 아닌데도 가족을 만나지 못하는 등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부는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면모를 보인다. 이 영화는 <괴물>에서 설정한 국가기구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과 일반 대중영화의 순응 사이에서 이렇게 모호하게 머문다.

초고층 주상복합 빌딩 타워스카이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타워>는 좋게 말하면 <타워링>을 벤치마킹한 영화이다. 또는 영화의 기획부터 시나리오와 제작에 이르기까지, 대기업의 영화 제작 담당자들이 더욱 깊숙이 개입하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영화가 더 전면적으로 할리우드영화를 추종하게 된 결과물의 하나이다. 그래서 <타워링>과 차이를 만들려다보니 무리수를 두게 된 설정이 여러 군데 눈에 띈다. 가장 다른 설정은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된 국회의원 부부가 애완견과 함께 무사히 빌딩을 빠져나가는 장면과 오로지 그들의 안위만을 위해 일하는 고위층 소방 관계자의 등장이다. 이를 통해 권선징악보다 한국사회의 현실 원칙을 따르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생존자와 희생자를 이야기의 흐름이나 어떤 원칙에 따라 치밀하게 선택한 것 같지는 않다. 또 다른 설정은 헌신적인 소방대장 강영기(설경구)가 <포세이돈 어드벤쳐>의 목사처럼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대목이다. 그의 죽음은 2000년대 초반의 한국형 블록버스터에서 반복된 남자주인공의 죽음을 답습했다기보다 표절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해운대>

정치/경제적 위기와 재난영화

<카메라 폴리티카>에서는 1970년대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에어포트>에서 <대지진>으로 갈수록 재난의 규모가 점점 커지고 희생자들의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난다고 지적한다. <에어포트>에서는 비행기가 폭파되지 않고 온전한 형태로 끝나는데, <포세이돈 어드벤쳐>에서는 배가 뒤집히고 목사는 죽는다. <타워링>에서는 고층 빌딩이 전소하고, <대지진>에서는 지상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1970년대 미국의 백인 중산층들은 정치/경제적 위기가 심화되면서 심한 좌절에 빠졌다. 이러한 재난영화의 변화는 이들이 좀더 많은 사람들이 제거되고 사라지기를 바라면서, 계급적이고 도덕적인 적들을 일시에 삼켜버릴 재난을 상상한 결과로 해석된다.

최근 한국 재난영화의 경우, 이미 <투모로우> 같은 세계적인 규모의 재난을 그린 영화 이후에 등장했기 때문에 재난의 규모와 희생자의 숫자가 점점 더 확대된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할리우드영화를 지나치게 벤치마킹하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재난영화가 등장하는 점에 주목해 이것을 한국사회의 정치/경제적 위기가 심화되는 징후로 볼 수 있을까? 극심한 경쟁에서 낙오된 중산층이 나머지의 전멸을 상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런 관점에서 김성수 감독의 <감기>를 바라보면 매우 흥미로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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