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폭력
2013-08-22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감기>의 진짜 재난이 바이러스가 아닌 국가인 이유

“이처럼 재앙을 막연히 공상하는 일은 우리를 일반적인 의무에서 해방시켜준다는 데에 그 매력이 있다.”(수잔 손택의 글, <재앙의 상상력> 중에서)

재난영화와 관련한 이러한 의견은 오늘날 영화 창작자들에게나 관객에게 특별하지 않거니와 상식이 된 지 오래인 것 같다.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의무는 재난 영화의 장르적 소재와 쾌감을 어쩌지 못하며 재난의 상상에는 그 정도가 없다는 뜻일 것이다. 집단 질병이 바로 그 의무로부터 벗어나버린 공상 중 하나다. 그것은 집단적 전파와 공포라는 필요 아래 전염병이라는 존재로 종종 등장해왔다. <감기>가 그 장르적 맥락에 놓여 있음은 물론이다.

<감기>의 주인공 지구(장혁)는 119 구조대원이다. 또 한명의 주인공 인해(수애)는 감염내과 전문의인데 그녀는 싱글 맘이며 딸 미르(박민하)를 혼자 키우고 있다. 영화 초반부에 위험에 처했던 인해를 도운 뒤, 지구는 인해에게 애정을 갖게 된다. 그즈음 동남아 밀입국자를 실은 컨테이너에서 최초 변종 바이러스가 발병하고 그중 한명은 살아남아 도주한다. 그들을 밀입국시키려던 형제가 나란히 병에 걸리고 동남아 생존자를 우연히 만난 인해의 딸 미르도 병에 걸린다. 병은 삽시간에 퍼지고 분당 지역은 감염 환자들로 넘쳐나게 된다. 정부는 분당을 폐쇄하고 감염자 및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들을 감염 캠프로 몰아넣는다. 지구와 인해와 미르도 그 안에 섞여 있다. 지구는 어떻게든 인해의 딸 미르를 보호하려 하고 인해는 치료제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갇힌 시민들은 점점 동요하기 시작한다.

폐쇄 공간에서 탄생한 공포와 지옥도

<감기>는 일단 감염 재난 장르의 전통적 틀을 얼마간 갖추었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직업이 의술이나 과학에 능통한 자여야 한다는 철칙을 따르고 있으며 다방면의 전개를 위해 지구와 인해 외에도 몇몇의 주요 인물을 더 등장시킨다. 다만 주인공들을 포함한 인물들의 허술한 묘사, 이야기의 투박한 전개 방식, 다소 틀에 박힌 감정선 등 이 영화는 전반적으로 좀 흔들린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전반적으로는 다소 모방적이거나 관습적인데 일부분에서는 아주 강렬하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그 강렬한 일부를 만드는 것인가. 감염 재난 영화들이 장르적 긴장도를 높이는 몇 가지 방식들이 있다. <아웃브레이크>의 경우는 상황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헌신적인 영웅과 그의 위기 탈출의 서사로 그 긴장을 높인다. 이것이 일반적이다. 혹은 감염 재난 영화의 수작이라고 할 만한 스티븐 소더버그의 <컨테이젼>은 그 긴장에의 강박을 아예 버리고 인물들을 평면으로 분산시킨 뒤에, 발병과 역학조사라는, 차라리 리드미컬한 질병 보고서라고 불러야 옳은 방식을 파격적으로 택하기도 한다.

국내의 또 다른 감염 재난 영화 <연가시>와 <감기>를 비교해본다면 이 영화의 어떤 특징은 더 선명해진다. <연가시>에는 특별한 장르적 퍼포먼스가 있었다. 변종괴물 연가시가 사람의 몸에 들어와 감염된 자를 물가로 끌고 들어가 자살하게 하는 것이다. 즉 집단적 자살을 연상시키는 퍼포먼스다. 물론 <감기>의 감염자들도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하지만 그건 이 영화의 핵심이 아니며 가장 끔찍한 장면도 아니다.

<연가시>에서 주인공의 가족은 감염되어 수용소 안에 있지만 주인공은 홀로 바깥에서 고군분투한다. 그런 그가 마침내 약을 구한다. <감기>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다르다. 감염자이건 비감염자이건 그 누구라도 질병 발생 이후에는 폐쇄된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감기>에서 이른바 질병보다 더 막강한 두려움과 공포감을 조성하는 것이 있다면 그들이 지금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상황이다. 그것이 분당이라는, 즉 비교적 풍족한 서울 외곽도시라는 설정보다도 더 중요해 보인다. <감기>의 설정은 사람들이 일괄적으로 일정한 폐쇄회로 안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며 인간 이하의 상황에 놓인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한쪽에서는 끔찍한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가고 아직 살아남은 자들은 자제력을 잃고 집단적 동요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분당과 분당 바깥으로 모든 게 결정된다. 그러자 안에서는 하나의 끔찍한 지옥도가 그려진다.

재난영화 특히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할리우드 재난영화들 그리고 근래 들어 그것을 모방하고 있는 한국 재난영화들은 대체로 인물들의 어떤 표본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계층적 표본 혹은 인물 중요도의 표본을 제시한 다음 거기에서 죽음의 안타까움의 계열을 나누는 것이 관례였다. 거기에서 희생자와 생존자도 갈린다. 그걸 거의 공식적으로 따랐던 영화가 <타워>다. 그런데 <감기>는 인물들의 표본 추출의 그 과정을 철저하게 무시한다. 이 안에는 상류층이 속해 있겠지만 그들은 그냥 질병 발생 지역인 분당 안에 있는 감염자 혹은 의심환자로만 취급된다. 모조리 하나의 무차별한 계열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이 바로 분당에 남은 자들에게 가장 끔찍한 점이다.

국가의 방식이라는 재난

국가의 행정적 편의주의가 이 강력한 구분과 공포를 지휘하는 진원지다. 처음에 질병 소식을 접했을 때 지역구 국회의원의 태도에 대해 영화는 좀 우스꽝스럽게 묘사한다. 대책회의 장면은 엉망진창이며 의료진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국회의원과 구의원 등은 식사 타령을 하거나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 못하거나 자기 안위부터 걱정한다. 전문가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는 교만한 관료란 재난영화의 흔한 캐릭터이지만 이 장면은 훨씬 신랄하게 묘사되어 현실적이라는 인상을 주는데, 그 국회의원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나서도 변함없이 편의주의로 일관한다. 국가의 고위 각료들이 다 모였을 때에도 의료진은 백신 개발에 치중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지만 분당 폐쇄, 감염자 살처분이라는 방침은 바뀌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은 마지막 선택에 이르기까지 내내 무력하게 지켜볼 뿐이다.

통제, 격리, 수용의 무서운 현장. <감기>가 참조했을 법한 감염 재난 영화 <아웃브레이크>에서도 같은 상황이 발생하지만 그 영화는 <감기>와 같은 맥락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또한 같은 국가재난사태에 처했다 해도 <연가시>에서는 국가가 그것을 막지 못해 허덕이면서 국가의 무능이 문제가 되었다면, <감기>에서는 국가가 무능을 피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처리하는 행정의 방식이 문제가 되고 있다. 무엇이 <감기>의 진짜 재난인가. 재난에 대처하는 국가의 방식이 바로 <감기>의 진짜 재난이다. 그 국가의 방식이 가장 문제적이고, 그 문제적인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호소력이며, 그 호소력으로 이 영화는 몇개의 강력한 재난 장면을 이루어내게 된다.

따라서 <감기>의 클라이맥스는 영화의 후반부에 있지 않다. 후반부는 감정적으로 거친 데다 허술하다. 영화의 중반부에 해당하는 감염 캠프 장면이 <감기>의 클라이맥스다. 이 영화의 미술 스탭들이 이미 밝힌 것처럼 비닐 장막으로 끝없이 둘러쳐진 난잡한 텐트들이라는 공간의 느낌은 불안하고 살벌하다. 참혹한 살처분장의 묘사도 뛰어나다. 여기에 방독면과 장총으로 무장하고 완력으로 통제하고 있는 군부대의 모습까지 더해지면서 감염 캠프는 떼죽음, 대학살의 현장으로 그려진다. 그런 점에서 <감기>는 마땅히 감염 재난 영화가 아니라 ‘감염 캠프 재난 영화’라는 특별한 면모를 지니게 됐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국가 행정이라는 현실이 장르적 요소를 덮친 사례다.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바이러스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다.” 뛰어난 감염 재난 영화 <컨테이젼>을 연출한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의 말이다. 병균은 무차별한 병균일 뿐이라는 말일 것이다. <감기>의 바이러스에도 이데올로기란 없다. 하지만 <감기>의 그 바이러스를 제압하고 해결하는 방식에는 이데올로기가 개입한다. 1970년대의 할리우드 재난영화들이란 대체로 당대 미국의 정치•사회적 구조의 허약함을 몸소 드러낸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내쉬빌> 그에 반하여 <죠스> 또는 재방문한 재앙의 상상력’이라는 글의 서론에서 평론가 짐 호버먼은 다른 식의 의견을 짧게 제시한다. 당시의 “재난영화는 최신의 팍스 아메리카나 서사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재난이 닥쳤을 때 영웅이 역경을 뚫고 사람들을 통솔하여 서로 돕게 한다는 그 서사가 도리어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의 통솔하에 유지되는 평화주의)를 강화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감기>의 대단원에서 대통령의 결단은 그 팍스 아메리카나에 정확히 맞서게 된다. 바이러스에는 이데올로기가 없는가. 그렇다 해도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의 잔여를 상대해야 하는 것이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어느 모로 보나 <감기>는 한 국가의 현실적 환경과 의무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마침내 재난영화라는 장르적 쾌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감기>라는 재난영화에는 특별한 역설적 징후가 있는 것 같다. 말하자면 “재앙을 막연히 공상하는 일은 우리를 일반적인 의무에서 해방시켜준다는 데에 그 매력이 있다”는 말은 잠시 맥락을 달리하여 뒤집혀 이해되어도 좋겠다. 그 ‘우리’ 안에 혹여 국가라는 단위를 넣어 볼 수 있는 것이라면, 국가가 수행해야 하는 일반적 의무가 무엇인지 반드시 가정한 가운데에서만 <감기>라는 이 재난영화는 흥분되고 떨리는 장르적 공상을 마침내 허락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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