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대종사>를 취재하기 위해 서울 시내의 한 호텔 복도 앞에 모인 수많은 매체 기자들은 고수와의 대련을 앞둔 도전자처럼 보였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거대한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손에 들린 질문지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다. 문이 30분마다 열리는 까닭에 또각또각하는 구두 소리만 들릴 뿐 복도는 날카로운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장소가 복도로 바뀌었다”는 스탭의 안내를 받고 복도 한쪽 모퉁이에 자리한 소파에 이르자 장쯔이가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 흐트러짐 없는 자세, 고집이 느껴지는 무표정 등 그의 태도에선 30분마다 상대를 바꿔가며 대련한 데서 오는 피곤한 기색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영화에서 그가 연기한 위엄 가득한 ‘궁이’처럼.
전국 무술계를 제패한 ‘궁(宮)가’의 유일한 혈육. 인생의 봄에서 겨울로 훌쩍 뛰어넘는 시기의 엽문(양조위)과 무술로 교감한 여자. 아버지인 궁 대인(왕경상)이 자신의 후계자였던 제자 마삼(장첸)의 손에 죽임을 당하자 “복수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어기고 행복해지기 위해 결단을 도모하는 여자.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는 건 감히 꿈도 꾸지 못했던 1930년대 중국 여성들과 달리 궁이는 그야말로 ‘신여성’이었다. 하지만 장쯔이와 인터뷰하기 전 잠깐 만난 왕가위 감독은 궁이를 “단순히 여성이라기보다 아름다움의 최상위에 있는 존재”라고 밝혔다. 그는 “당시 무술세계에 여성은 없었어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한 존재였던 시대니깐요. 운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진취적으로 뚫고 나가는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물이에요”라고 궁이가 가상의 인물임을 설명했다. 장쯔이 역시 감독의 말에 동의하며 자신의 인상을 보탰다. “여자가 아니라고 했다고요? 하하. 맞아요. 한마디로 구(球) 같은 사람. 어느 방향으로 봐도 일관되고 완벽해요.”
명쾌한 정리와 달리 장쯔이는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도 촬영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궁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몰랐다고 한다. “그의 인생을 완전하게 본 건 영화를 완성한 뒤 극장에서 상영할 때였어요. 어쨌거나 여배우로서 무협영화나 쿵후영화에서 이같은 진취적인 여성을 맡을 기회가 쉽게 있을까요? 전 없다고 봐요. 굳이 끌어들이자면 리안 감독의 <와호장룡>에서 제가 연기한 ‘용’을 비슷한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강호의 삶을 동경하며, 정략결혼에 희생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과 열정을 끊임없이 내보였던 그 뜨거운 용 말이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려면 멈추지 말라”는 궁 대인의 가르침대로 장쯔이는 궁리에 들어가 ‘잎사귀 아래 숨겨진 꽃’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흩날리기도 하고, 복수의 칼날을 가는 여인의 가장 차가운 모습을 서늘하게 내보이기도 한다. “무술의 첫 번째 단계는 자신을 보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는 천지를 보는 것이며, 마지막 단계는 중생을 보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과 달리 궁이는 “천지를 본 단계까지 이르는 데 그쳤”다. 하지만 결국 스스로 옳다고 생각한 것은 행동에 옮겼다. “궁이는 자신의 선택에 행복했을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장쯔이는 이렇게 대답했다. “굉장히 행복했을 것 같아요.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것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었으니깐요. 제가 궁이라면 그같은 선택을 했겠냐고요? 전 궁이가 아니에요. 그런 선택을 할 자신이 없어요. 그러니까 궁이가 존경받을 만한 거예요.”
장쯔이가 왕가위 감독과 함께 작업한 건 <2046>(2004) 이후 거의 10년 만이다. 그에게 왕가위라는 이름 석자는 “인생의 중요한 사람”이라는 의미란다. “장이모 감독의 <집으로 가는 길>(1999)은 배우로서 제 이름을 세상에 알려준 작품이고, <와호장룡>은 중국 밖에 있는 관객에게 제 이름을 알려준 작품이며, <2046>은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케 한 작품이에요. 그런 점에서 왕가위 감독님이 함께하자고 하면 바로 출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라며 왕가위 감독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냈다. 그의 다음 선택은 또 다른 거장, 오우삼의 신작 <태평륜>이다.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금융가에서 태어난 한 여자의 인생을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일대종사>의 궁이가 그랬듯이 이번에도 장쯔이는 시대와 만만치 않은 싸움을 벌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