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세기 동안 지식층과 시네필만을 주요 타깃으로 한 콧대 높은 영화제라는 인식이 높았던 뉴욕영화제가 조심스럽게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지난 9월27일부터 10월12일까지 개최된 제51회 뉴욕영화제에서는 총 51편의 장편과 30편의 단편영화가 소개됐다. 이번 행사는 25년간 프로그램 디렉터를 맡아온 리처드 페냐가 지난해 은퇴한 뒤 처음으로 새로운 디렉터 켄트 존스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영화학자 출신인 페냐가 지금까지 대부분의 상영작들을 칸이나 베를린, 토론토영화제에서 소개된 작품으로 채운 반면, 평론가 출신인 존스는 이번 영화제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공개되는 할리우드 상업영화 3편을 프로그램에 포함했다. 그래서인지 일부 미디어에서는 “이중인격을 가진 영화제 같다”, “이러다 내년에는 <다 큰 녀석들3>(애덤 샌들러가 출연하는 코미디영화)도 상영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일반 관객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간 영화제가 된 것을 반가워하는 시선도 존재했다.
개/폐막작 폴 그린그래스의 <캡틴 필립스>와 스파이크 존즈의 <허>
뉴욕영화제는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페스티벌이나 선댄스영화제처럼 최신 인디 미국영화를 접할 수 있는 장소도 아니고, 트라이베카영화제처럼 수백편의 작품을 상영하지도 않는다. 뉴요커에게 세계의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게 바로 비경쟁 영화제인 뉴욕영화제가 추구하는 바다. 이번 영화제를 통해 세계에 처음 소개된 작품들로는, 개막작으로 상영된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캡틴 필립스>, 센터피스 갈라 부문에서 소개된 벤 스틸러 감독의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폐막작인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허> 등이다. 오랜만에 장편영화로 관객과 만난 존즈 감독은 이번 스크리닝에 주인공 와킨 피닉스는 물론 에이미 애덤스와 루니 마라, 올리비아 와일드 등 많은 배우들과 함께 참석해 관객의 환호를 받았다. <허>는 유토피아에 가까운 미래에 한 이혼남이 인공지능(A.I.)과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으로, A.I.의 목소리는 스칼렛 요한슨이 맡았다. 또 영화제에서 소개된 뒤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은 J. C. 챈더 감독, 로버트 레드퍼드 주연의 <올 이즈 로스트>, 지아장커 감독의 <천주정>, 스티브 매퀸 감독의 <노예 12년> 등도 뉴욕에서 개봉해 더욱 관심을 집중시켰다. 특히 <올 이즈 로스트>는 레드퍼드의 열연으로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 후보로 이미 거론되고 있다. 레드퍼드는 이 작품에서 인도양에서 조난당한 한 남자를, 거의 대사 없이 첫 장면부터 마지막까지 홀로 연기해 찬사를 받고 있다. 이번 영화제 기간 중 필름 코멘트 프레젠테이션 부문에서 소개된 <노예 12년>은 얼마 전 개봉된 리 대니얼스 감독의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와 비교되며, 작품상과 연기상 후보로 부족함이 없다는 평을 얻고 있다.
올해 영화제에서 특히 관심을 모은 작품들로는 배우 제임스 프랭코가 연출한 <차일드 오브 갓>과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압델라티프 케시시의 <아델의 삶-1&2>가 있다. <차일드 오브 갓>은 코맥 매카시의 1973년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주연을 맡은 스콧 헤이즈의 과감한 연기가 돋보였다. 1960년대 초반 테네시주 외곽 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지적장애를 가진 레스터가 부모가 물려준 농장에서 쫓겨난 뒤 거의 사람과의 접촉이 없이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는 내용을 잔인하리만치 자세하게 그린다. 연출을 맡은 프랭코는 이 작품에서 단역으로 잠시 출연하지만, 영화제 기간 뉴욕에 개봉된 또 다른 연출작 <애즈 아이 레이 다잉>(윌리엄 포크너 원작)에서 <차일드 오브 갓>의 여러 출연진과 함께 주연으로 나와 화제가 됐다. 하지만 평론가들로부터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꼽히고 있는 <차일드 오브 갓>은 영화의 잔인한 내용 때문인지 아직 배급사를 찾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코언 형제, 짐 자무시, 알렉산더 페인 신작 상영
이번 행사에는 낯익은 감독들의 신작들도 대거 소개됐다. 코언 형제의 신작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 짐 자무시 감독의 뱀파이어 로맨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알렉산더 페인 감독의 흑백영화 <네브래스카> 등도 관객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코언 형제와 짐 자무시의 신작에는 영화 전반에 걸쳐 다양한 음악들이 소개돼 기자들은 물론 관객 역시 사운드트랙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최근 <블루 재스민>으로 호평을 받고 있는 케이트 블란쳇과 두 번째 감독 데뷔작 <인비저블 우먼>을 선보인 레이프 파인즈가 갈라 트리뷰트 주인공으로 선정됐다. 특히 파인즈는 찰스 디킨스의 팬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디킨스의 연인 넬리 터넌과의 관계를 섬세하게 그린 <인비저블 우먼>을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올해 뉴욕영화제에는 홍상수 감독의 작품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도 초대됐는데, 2002년 <생활의 발견>을 시작으로 총 7편의 작품이 뉴욕영화제에서 소개됐다.
한편 뉴욕영화제는 지난해 개봉 25주년 기념으로 <프린세스 브라이드>의 감독과 주요 배우들이 모두 참석한 특별 상영회를 개최해 뜨거운 반응을 얻은 바 있다. 올해도 컬트 팬들을 거느리고 있는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의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한국 개봉명 <라스트 스쿨 데이>)를 상영해 잔재미를 더했다. 이번 20주년 기념 상영회에는 링클레이터는 물론 주연배우 제이슨 런던과 파커 포지, 앤서니 랩 등이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