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영화의 비밀 현장에 있습니다 (1)
2014-01-02
글 : 이주현
글 : 김성훈
한국영화 B컷祕史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부터 <관상>까지 숨은 이야기들

2013년 한국영화 촬영현장의 풍경을 한권의 사진첩으로 정리해보려 한다. 스틸 작가들의 컴퓨터에 잠들어 있는 사진을 통째로 싹싹 긁어모으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으나 사실 그러지는 못했다(얽힌 이해관계가 많아서였으니 너그러이 이해해주시길). 대신 가까이서 현장을 관찰하고 기록해온 스틸 작가들의 생생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바탕으로, 올 한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영화들의 현장 사진첩을 꾸며보았다. 홍보용으로 쓰인 A컷이 아니라 공개되지 않은(혹은 공개되지 못한) B컷들을 여기 공개한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우리 선희> <베를린> <신세계> <설국열차> <관상>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친구2>의 현장 풍경이 지금부터 펼쳐진다.

어린아이처럼

김진영 스틸 작가가 말하는 <우리 선희> 현장비사

삼각관계? 이것이 영화 메이킹 스틸이 아니라 파파라치 컷이었다면 정유미를 둘러싸고 사랑 싸움을 벌이는 두 남자에 대한 기사를 쓸 수도 있으리라. 여자친구 선희(정유미)가 자리를 뜨자 괴로운 듯 문수(이선균)가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장면인데, 이선균이 홍상수 감독의 디렉션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유미씨는 카메라 셔터 소리가 나면 바로 카메라쪽으로 고개를 돌려 장난을 친다. ‘메롱’이나 손가락으로 V를 그리는 건 기본이고 눈동자를 모아서 사팔뜨기 흉내도 낸다. 사진 찍는 거 신경 쓰지 말고 평소대로 하라고 눈짓을 보내면 더 장난을 친다. 그만큼 어린애처럼 귀엽고 사랑스러운 배우다. 아마 홍 감독님한테 장난치는 배우는 유미씨가 유일무이하지 않나 싶다. 문소리, 예지원 선배님도 농담은 하지만 장난은 치지 않는데….” 홍상수 감독, 배우 정재영과 함께 앉아 있는 사진에 말풍선을 그려넣고 싶어진다. 정재영: “얘 또 이런다.” 홍상수: “모르는 사람인 척하고 싶어.”

취할랑 말랑? 영화에 취한!

김진영 스틸 작가가 말하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현장비사

홍상수 감독 영화의 현장 스틸에는 시나리오를 들고 읽는 배우들의 모습이 유독 많다. 그날그날 나오는 따끈한 시나리오를 짧은 시간 안에 완벽히 외워야 하기 때문에 배우들은 시험공부하는 학생들처럼 시나리오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심지어 길을 걸을 때도 예외는 아니다. 카페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 홍상수 감독과 정은채의 모습은 흡사 과외선생님과 학생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시나리오를 가장 빨리 외우는 배우는 누굴까. 김진영 스틸 작가는 “이선균”이라고 답했다. “이선균 선배님은 놀라울 정도로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대사를 습득한다. 그 반대 배우는 누구냐고? 글쎄…. (웃음)”

두 배우의 눈이 풀렸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분장도 아니고 연기도 아니다. 성준(이선균)과 해원(정은채)이 우연히 성준의 제자들이자 해원의 친구들 술자리에 동석해 연거푸 술잔을 비우는 장면을 촬영하던 날. “이날 은채씨의 볼이 발그레해졌다. 취할랑 말랑이 아니라 취한 상태였다. 이선균 선배님 역시 소주를 글라스로 드셨을 거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하나같이 ‘술 마시면서 연기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홍상수 감독과의 작업이 처음인 정은채 역시 제대로 신고식을 치른 것 같아 보인다.

홍상수 감독의 현장에선 업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 흔하다. 손이 비는 사람이 이쪽저쪽 일을 거든다. 워낙 소수정예 스탭들로 영화를 찍기에 벌어지는 일이다. 해원(정은채)과 엄마(김자옥)가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장면에선 홍상수 감독이 직접 슬레이트를 들었다. 카페 내부가 너무 협소해 두명의 배우와 카메라만으로도 공간이 꽉 찼기 때문이다. 김진영 스틸 작가는 “홍 감독님 현장에선 너나 할 것 없이 슬레이트를 친다”고 했다. 김진영 스틸 작가 역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우리 선희>에서 1인다역을 소화했다. 공식적으로는 스틸 작가였지만 어떤 날엔 조명부, 어떤 날엔 연출부, 또 어떤 날엔 제작부 스탭이 되었다. “그러다보면 아무래도 본업에 소홀해지기도 한다. 배우들이 리허설할 때 카메라 대신 조명 장비를 들고 있기 일쑤였으니까. 처음엔 찍어야 할 장면을 놓쳐서 속상했는데 시간이 지나다보니 ‘여긴 화보 찍는 현장이 아니라 영화 찍는 현장’이란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해지더라.”

감자, 고추장찌개 그리고 스파이

김설우 스틸 작가가 말하는 <베를린> 현장비사

<베를린> 현장에 ‘화가’ 하정우 납시었다. 하정우가 스탭의 팔뚝을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 뒤편에 걸린 단발머리 스탭의 오른쪽 팔뚝에도 ‘하정우표 문신’이 새겨져 있다. 김설우 스틸 작가의 말에 따르면 하정우는 분장팀과 의상팀 스탭들의 팔에 주로 “추상화 느낌의 문양”을 그려주었다고. 연기면 연기, 그림이면 그림, 개그면 개그. 팔방미인 하정우만이 할 수 있는 발상이 아닐까 싶다. 김설우 스틸 작가는 그런 하정우를 두고 “힘든 해외 촬영 기간 동안 늘 특유의 개그로 스탭들을 웃게 만든, 위트 넘치는 배우”라고 했다.

“본인의 연기를 체크하는 저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옆에서 사진기 들기도 참 민망해진다.” 김설우 스틸 작가는 “한석규 선배님의 이런 집중력이 <베를린>의 정진수를 빚어낸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촬영장에서 한석규는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된다. 평소엔 인자하기 그지없는 선배이자 동료지만 카메라가 돌아가면 눈빛부터 달라진다. “야수 같은 눈빛” 하나만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한석규. 배우의 카리스마란 바로 이런 것일지도.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농가주택 장면을 찍을 때, 감독은 물론 스탭과 배우들까지 모두 예민해져 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액션의 합을 맞추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해외 촬영을 빠듯하게 끝내고 돌아온 터라 체력도 떨어져가던 때였다. 김설우 스틸 작가는 “아마도 감독님이랑 승범씨랑 서로 의지가 많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류승범은 스탭들과의 첫 미팅에서 ‘오직 인물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얘기를 했었고, 촬영 내내 혼자 과묵히 있을 때가 많았다고 한다. “형인 류승완 감독과도 교류를 많이 하지 않으려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해외 촬영 때 감독님이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승범씨가 감독님에게 고추장찌개를 끓여준 적이 있었는데, 그때 감독님이 크게 감동했었다.” 이런 훈훈한 형제를 보았나.

<베를린>에서 동명수(류승범)의 오른팔이자 저격수로 출연한 배정남(왼쪽)이 류승완 감독과 액션 장면에 대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영화에서 배정남의 출연 분량은 많지 않다. 하지만 배정남이라는 이름 석자를 알리게 되는 의외의 사건이 영화 촬영 도중 생긴다. <베를린>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맨손으로 택시 강도를 잡아 영등포경찰서로부터 감사장까지 받게 된 것. 그 사실을 알게 된 <베를린> 스탭들은 “진짜 사나이 배정남”을 외쳤다고. “늘 성실한 자세로 촬영에 임했던 배정남은 류승완 감독이 가장 총애한 배우이기도 했다.”

농가주택 폭파 장면 촬영 중, 류승완 감독의 설명을 듣고 있는 전지현의 표정이 담담하다. “전지현씨의 액션에 대한 칭찬이야 워낙 많이 나온 터라….” <베를린>에서 액션 신의 상당 부분을 몸소 연기한 전지현은 몸 쓰는 것만 잘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한번은 전지현씨가 집에서 감자를 삶아와 스탭들에게 돌린 적이 있다.” 마음 씀씀이마저 고운 그녀다.

남자와 남자 사이

노주한 스틸 작가가 말하는 <신세계> 현장비사

<신세계>에서 정청(황정민)의 첫 등장 신. 정청은 맨발에 기내 슬리퍼를 신고 공항 입국장으로 걸어나온다. 이는 황정민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황정민의 슬리퍼 사랑은 계속된다. 강 과장(최민식)과 마주하고 있는 이 장면에서도 황정민은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다. 촬영현장에서 신고 다니던 슬리퍼라는데, 영화에는 그의 맨발이 나오지 않는다. 숏의 사이즈에 따라 배우들의 복장과 태도는 달라지기 마련이다. 전신이 나오는 풀숏일 때 배우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지만 클로즈업일 땐 굳이 발끝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노주한 스틸 작가는 황정민이 “현장에서 편하게 있는 걸 좋아하는 배우”라고 했다. 최대한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두는 것. 어쩌면 그것이 황정민의 연기 비결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경찰도 아니고 조폭도 아닌 이자성은 고독한 남자다. 이자성을 연기한 이정재는 촬영 내내 그 고독과 사투를 벌여야 했다. “영화에서 이자성이란 인물이 거의 웃음 없는 캐릭터이다 보니 카메라가 돌아가지 않을 때도 이정재 선배는 항상 이자성의 감정을 유지하려 했다.” 현장에서 모니터를 확인하는 이정재의 눈빛이 매서운 이유도 그 때문이다.

최민식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은 누구? 액션 신이 없어 섭섭했던 걸까. 최민식이 애꿎은 정정훈 촬영감독의 팔을 꺾으며 힘을 과시하고 있다.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등에서 호흡을 맞춘 두 사람은 아주 막역한 사이다. “현장에서 두분이 유치한 장난을 많이 쳤다. 주로 먼저 장난을 거는 건 최민식 선배다. 최민식 선배는 누가 뭐래도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다. 현장이 ‘빡시다’ 싶으면 정정훈 촬영감독을 콕 집어 장난을 시작한다. 그렇게 두분이서 장난을 치면 분위기가 금세 좋아진다.” 두 ‘어르신’은 “촬영만 잘하면 문제없겠다”, “이제 최민식 선배만 연기 잘하면 되겠다”는 농담을 서로 주고받는 사이라고.

황정민과 마주 선 허명행 무술감독의 몸이 땀범벅이다. 두 사람의 액션 합을 지켜보고 있는 박훈정(가운데) 감독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다. 한여름의 창고 장면 촬영이었다. “카메라가 너무 뜨거워져 촬영을 쉰 적도 있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비오듯 할 만큼 더웠다. 슬레이트로 된 창고였는데, 실내 온도가 40도가 넘었을 거다.”

자성과 강 과장의 접선 장소인 폐낚시터. “영화 보면서도 느꼈겠지만 물이 굉장히 더러웠다. 냄새도 고약하고. 배우들의 정면숏을 찍으려면 물속에 들어가야 했는데, 물이 닿으면 피부가 썩을 것 같아서 스탭들이 ‘어부장화’를 신고 촬영했다. 현장에선 어부장화를 입은 모습이 꼭 슈퍼마리오 같다고 해서 ‘마리오복’으로도 불렸다. 거기서 끝난 게 아니다. 한여름이라 마리오복 안에 땀이 어마어마하게 찼다.” 그런데 잠깐, 영화에선 강 과장이 낚시터에 빠지는 장면이 있다. 누가 그 물에 빠졌을까. 연출부 중에 최민식과 체격이 비슷한 스탭이 대역을 소화했다. 그 뒤로 “물에 빠진 연출부 스탭의 피부가 날이 갈수록 안 좋아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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