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 영화가 분다. 겨울이면 찾아오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가 9번째를 맞아 1월16일부터 2월23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 올해도 영화의 영원한 친구를 자청하는 이들이 엄선한 총 25편의 영화가 당신을 찾아간다. 단순한 희귀작부터 올 타임 마스터피스, 짐작불가 괴작까지 다양하다. 그중 친구 9인의 각양각색 추천사와 함께 그들 각자의 기억으로부터 꺼내 든 추천작을 소개한다.
영화들이 모여 영화가 되길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의 추천작
<마일스톤> Milestones
로버트 크레이머, 존 더글러스 / 1975년 / 195분 / 미국 / 컬러 / 35mm / 15세 관람가
“올해로 사후 15년을 맞는 작가 로버트 크레이머는 더이상 찾아보지 않는 작가가 됐고 거론하는 이도 많지 않지만, 그의 1970년대 문제작 <마일스톤>을 이제 보아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 베트남 반전투쟁과 68혁명을 뜨겁게 겪어낸 젊은이들이 패배 이후에 각자의 자유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변혁의 목표가 몽상으로 치부된 1970년대 세대에 이제 남은 것은 경제적 곤궁과 전망 부재뿐. 50명 넘는 운동세대의 거대한 모자이크 자화상은 어떻게 우리가 이 세계에 다시 뿌리내릴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무엇보다 하나의 시대가 끝나가면서 그렇게 부모가 되어갔던 이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싶다.”(김성욱) <마일스톤>은 베트남전을 겪은 뒤 개인적, 정치적 삶의 변화에 마주친 히피, 학생, 농부, 이민자, 전과자, 정치 운동가 등 50여명의 미국인 이야기를 엮어낸 실험적 픽션 다큐멘터리다. 1960~70년대에 저항적인 뉴스릴(Newsreel) 운동을 이끌었던 로버트 크레이머는 “언젠가는 내가 만든 이 모든 영화들이 결국 한편의 긴 영화, 항상 진화 중인 하나의 이야기를 이룰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영화도 그들의 과거로부터 우리의 현재로까지 이어지는 한편의 긴 영화를 상상케 할 것이다.
삐뚤어질 테다
김지운 영화감독의 추천작
<기나긴 이별> The Long Goodbye
로버트 알트먼 / 1973년 / 112분 / 미국 / 컬러 / 35mm / 15세 관람가
필연적인 조합이다. 하워드 혹스가 연출을 거절하지 않았다면, 피터 보그다노비치가 로버트 알트먼을 추천하지 않았다면, 로버트 알트먼이 로버트 미첨이나 리 마빈 대신 엘리엇 굴드를 고집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못했을 작품이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가 친구의 아내의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을 다룬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담배를 비스듬히 꼬나물고 비열한 냉소로 누군가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상남자의 영화 포스터를 보았다. 그 남자의 이름은 엘리엇 굴드다.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은 주류 할리우드영화에 그만큼이나 고약한 시선과 시니컬한 응답으로 일관한 비주류영화의 백과사전, 삐뚤어지기의 거장 로버트 알트먼이다. 그 둘이 하드보일드문학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위해 만났다. <기나긴 이별>은 로버트 알트먼의 전성기 때 만들어진 영화이긴 하지만 그의 대표작은 아니다. 나는 만인의 명작을 추천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로버트 알트먼과 엘리엇 굴드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대작 <기나긴 이별>을 얼마나 더 삐딱하고 능글맞고 비정하고 암울하게 그려놓는지가 궁금할 뿐이다. 새해를 <기나긴 이별>과 함께 삐뚤어지게 시작할 테다.”(김지운)
걸작, 명작보다 희귀작
김홍준 영화감독의 추천작
<두 연인> Two People
로버트 와이즈 / 1973년 / 100분 / 미국 / 컬러 / 디지베타 / 15세 관람가
교과서에 실릴 법한 걸작의 반대말로서 의미를 지니는 영화가 한편 더 있다. “너무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숨은 걸작이라서가 아니라 내 기억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어서 골랐다. 딱 40년 전, 고3 때 이 영화를 봤다.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였는데 재개봉관까지 가서 여러 번 본 기억이 난다. 내 마음을 흔든 뭔가가 있었나보다. 근데 다시 보려니 해외 사이트를 아무리 뒤져도 구할 수가 없더라. 1년에 수입되는 영화가 20~30편에 불과했던 한국에까지 수입된 메이저 스튜디오 작품인데 VHS나 DVD도 나온 적 없고 영화사에도 디지베타밖에 남아 있는 게 없단다. 지난 40년간 적어도 한국에선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희귀한 물건은 희귀함 그 자체로 가치가 생기잖나.”(김홍준) 보편적 걸작으로도 예외적 망작으로도 분류되지 못해 희귀작이 되어버린 <두 연인>은 뉴욕에서 활동하는 패션모델과 베트남전 탈영병 사이의 우연적이고도 짧은 사랑을 담은 멜로드라마다. 개봉 당시엔 혹평을 받았다. 로저 에버트조차 “따분함을 향한 몹시 어색한 여정”이라 썼다. 하지만 결국 어떤 관객의 마음에는 깊이 남아 시간을 살아남는 작품으로 불려나오게 됐다.
수상한 시절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
오승욱 영화감독의 추천작
<아일랜드의 연풍> The Quiet Man
존 포드 / 1952년 / 129분 / 미국 / 컬러 / DCP / 15세 관람가
고향 아일랜드에 대한 존 포드의 이상과 동경이 담긴 이 영화는 당시 스튜디오들로부터 “돈 한푼 벌어들이지 못할 아일랜드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외면받았다. 신생 영화사에서 ‘돈 되는 서부극’(<리오 그란데>)을 먼저 만들어주는 대가로 겨우 제작될 수 있었던 작품. 농장을 물려받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전직 복서 션 쏘튼이 적대관계에 있는 가문의 여자와 결혼하면서 겪는 우여곡절을 담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다. “중/고등학교 때 정영일 선생이 놓치면 안 되는 걸작이라고 해서 봤는데, 그때는 잘 몰랐다. 30대 때 배창호 감독님께서 존 포드의 ‘평상심’이 존경스러운 작품이라고 해서 다시 봤는데, 그때도 잘 몰랐다. 신교도들이 교구 폐쇄 위협에 처하자 견원지간이던 구교도들이 신교도로 변장해 시찰단을 맞는 장면이 있다. 그 관용의 정신, 상식적인 선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위하는 마음의 소중함을 나이가 드니 알겠더라. 시절이 수상할 때 꺼내보면 좋을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5, 6년 전부터는 꼭 봐야 하는 영화가 됐다. 몇년 전부터 이 영화를 1순위 추천작으로 꼽았는데 이제야 보게 돼서 기쁘다. 아주 아름답게 촬영된 아일랜드의 녹색 풍경도 만끽할 수 있을 거다.”(오승욱)
7시간30분의 압도적인 미학
이동진 영화감독의 추천작
<사탄탱고> Sátántangó
벨라 타르 / 1994년 / 450분 / 헝가리, 독일, 스위스 / 흑백 / 35mm / 15세 관람가
“걸작을 두 부류로 나누면, 영화 현장을 포함한 시공간의 우연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만들어진 신비한 걸작과 감독이란 예술가가 자신의 텍스트를 완전히 장악해 만든 완벽한 걸작이 있다. 후자의 걸작을 만드는 대표주자가 벨라 타르라고 생각한다. <사탄탱고>는 한명의 예술가가 어떻게 450분이란 시간을 자신만의 미학적인 장으로 활용해내는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감독이 창조해낸 시공간의 물성을 고스란히 체험케 하는 폐곡선적인 세계의 영화는 내용적으로도 풍부하다. 이상적 공동체에 대한 꿈과 좌절을 담은 사회실험극으로도, 욕망이나 결핍에 대한 실존주의적 보고서로도, <소돔과 고모라>의 모티브를 변주한 종교적 텍스트로도 읽힌다. 더불어 음악, 연기, 촬영 모든 것이 훌륭해서 마을 사람들이 바 안에서 춤추다 멈추다 하는 장면은 정말 짜릿짜릿하다.”(이동진) 구원에 관한 감독의 염세주의적 시선이 압도적인 작품이다. 공산주의 몰락기의 헝가리를 배경으로 죽은 줄 알았으나 2년 만에 다시 나타난 사내와 돈을 훔쳐 달아나려는 주민들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킨다. 수전 손택이 “죽을 때까지 매년 보고 싶다”라고 한 영화이자 구스 반 산트가 ‘죽음 3부작’의 중요한 영감으로 삼은 작품이다.
좌도 우도 아닌 중국 영화사의 걸작
장률 영화감독의 추천작
<작은 마을의 봄> 小城之春
페이 무 / 1948년 / 92분 / 중국 / 흑백 / DCP / 12세 관람가
전후 중국의 작은 마을, 아픈 남편을 보살피며 쓸쓸하게 살아가던 주유웬 앞에 남편의 옛 친구이자 자신의 옛 연인이었던 의사가 나타나면서 세 남녀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든다. 이 영화가 만들어진 1948년 당시에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으나 1980년대에 새롭게 발굴되어 지금은 중국 영화사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항상 거론되는 작품이다. “그러니 첫째로 이것은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작품이다. 요즘 우리는 촬영한 지 몇달 지나서도 개봉하지 못한 영화를 ‘묵었다’고 하는데, 그런 조급한 마음들을 되돌다보고 영화와 우리의 관계의 시간성을 생각하게 한다. 이 영화는 당시엔 좌도 우도 아니라는 이유로 욕을 먹었다. 나도 모든 것이 이데올로기의 평가를 받았던 시대에 성장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좌우를 모두 좋아할 수 있고 편견도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의 감정을 통해 감동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세월을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로 유럽에서 온 영화란 매체가 한 나라, 한 문화권의 전통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를 반성하게 하는 영화다. 특히 성벽의 풍경 안에서 주인공의 감정, 영화의 정서를 조화해내는 것이 놀라웠다. 동양의 표현방식으로 만들어도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아서 추천!
장준환 영화감독의 추천작
<5번가의 비명> Five Corners
토니 빌 / 1987년 / 90분 / 미국, 영국 / 컬러 / 35mm / 15세 관람가
마지막 장면에 흘러나오는 비틀스의 <인 마이 라이프>로 이 영화를 기억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실제로 조지 해리슨이 제작자로 참여한 이 컬트영화는 존 F. 케네디가 죽고 베트남전이 시작된 1964년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음울한 브롱크스의 풍경 속에서 강간죄로 감옥에 갔다온 사내, 그의 사랑과 집착이 두려운 여자, 그들 사이에 낀 어느 비폭력주의자(?), 세 남녀의 이야기가 어지럽게 뒤엉킨다. “‘나만 재밌는 건가?’ 그런 고민을 자주 한다. 그래서 늘 내 머릿속에 있는 영화 중 하나를 관객과 함께 보고 싶다. 대학생 때 하숙집 형들과 대단한 아트하우스필름도, 대단한 블록버스터도 아닌 영화를 많이 봤는데, 그중에서도 아주 특이하게 기억되는 영화다. (스포일러 유의) 존 터투로가 조디 포스터의 마음을 얻으려고 동물원에서 펭귄을 훔쳐 선물하는 명장면이 있다. 조디 포스터가 거절하니까 존 터투로가 펭귄을 막 때려 죽인다. 그때 존 터투로의 폭발적인 미치광이 모습과 조디 포스터의 반응이 교차되며 굉장한 긴장감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제정신으로 살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보였다.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내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고른 추억의 영화다.”(장준환)
1시간 안에 볼지 말지 판단하라
정성일 영화평론가의 추천작
<영혼의 목소리> Dukhovnye golosa
알렉산더 소쿠로프 / 1995년 / 328분 / 러시아 / 컬러 / 베타 / 15세 관람가
부제가 ‘전쟁에서의 일기’다. 알렉산더 소쿠로프 감독이 직접 아프가니스탄-타지키스탄 국경 인근의 부대를 찾아 군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만든 다큐멘터리다. 그는 카메라로 그들의 반복적인 일상을 찍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내레이션으로 덧붙였다. 그렇게 탄생한 5시간 반짜리 영화는, 비단 인내에의 요구가 아니라 사유와 믿음에의 호소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황당무계했다. 느닷없이 40분짜리 롱테이크가 나온다. 아무 정보 없이 그 장면과 마주쳤다. 봐도 봐도 그 장면인 거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나중에 칸영화제에서 <러시아 방주>를 보고 결국 소쿠로프의 영화가 이 장면의 변주라고 생각됐다. 물론 그건 미학적 깨달음에 불과했다. 두편의 다큐멘터리를 작업하면서 이제 이 장면 자체가 나한테 믿음이 됐다. 이 영화에 동의하는 관객은 미래의 내 영화의 관객도 돼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런 내 믿음을 확인하고 싶다는 이기적인 이유로 선택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나에게로 돌아오기 위한 재귀대명사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단, 1시간 보고 계속 볼지 뛰쳐나갈지 빨리 판단해야 한다. 이 영화에 동의한다면 그 인내를 영화적 시간으로 보답받을 것이다.”(정성일)
죽어도 좋아
특별상영작
<호수의 이방인> L’inconnu du lac
알랭 기로디 / 2013년 / 97분 / 프랑스 / 컬러 / DCP / 청소년 관람불가
호수와 남자. 이 두 가지 요소만을 가지고 알랭 기로디는 단순하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무섭고 또 아름답기까지 한 한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어느 여름날, 프랑크는 게이들의 낙원호수에 도착한다. 준수한 외모의 그는 매일 매력적인 상대를 찾아 헤매지만, 대신 뚱뚱하고 못생긴 앙리와 수다를 떨다 집으로 돌아갈 때가 많다. 그러던 어느 날 콧수염이 멋진 미셸을 발견하는데, 그가 전 애인을 익사시키는 장면까지 목격하고도 그를 향한 열정을 접지 못한다. 기대와 두려움을 각각 조금씩 안고 호숫가를 맴도는 인물들과 카메라의 윤무가 어떤 음악 이상으로 유려한 가운데, 해질녘 하늘 아래 무섭게 일렁이는 호수는 섬뜩함을 안긴다.
알랭 기로디는 처음에 이 영화를 남녀 사이의 사랑 이야기로 써보려 노력했다고 한다. 하지만 잘 써지지 않았다. 그는 두 주인공이 모든 면에서 동등한 인간이길 바랐고, 결국 두 남자를 등장시켜 자신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에 이르렀다. 칸영화제에서 그는 “에로티시즘은 죽음까지 파고드는 삶이다”라는 바타유의 말을 인용한 바 있는데, 특히 육체적 욕망과 죽음의 공포가 살을 맞대고 있는 마지막 장면이 가슴이 메어올 정도로 서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