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1일. 그것은 이미 예고된 사건이었다. 전세계에서 1천만명이 넘는 시청자가 2년 만에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21세기 셜록 홈스를 영접하기 위해 TV 앞에 모여들었다. 막상 공개된 시즌3가 시즌1, 2에 비해 실망스럽다는 평들도 그들의 열기를 식히진 못했다. 이쯤 되면 그냥 ‘영드’가 아니라 컬트라고 불러야 할 정도다. 여전히 마력을 지닌 <셜록> 시즌3의 정체는 무엇인가. 셜록이 베이커가 221B번지만큼이나 자주 들락거린다는 성바톨로뮤병원 연구실에 물었다. 다음은 그 결과 나온 <셜록> 시즌3의 성분분석표다.
51%의 브로맨스
I’M ◯◯◯◯ LOCKED. 빈칸에 들어갈 글자는? 시즌2의 정답은 ‘SHER’이었지만, 시즌3의 정답은 ‘JOHN’이다. 혹시 아직 셜덕(<셜록> 오타쿠)이 아니거나 브로맨스 비입문자인 이들을 위해 짧게 덧붙이자면, 존록(johnlock)이란, 존 왓슨과 셜록 홈스의 커플링 명칭으로 한국에서는 ‘셜존’이나 ‘존셜’이 더 보편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더 친절한 설명을 원한다면 OCN에서 제작했던 시즌1, 2의 예고편을 복습하자. 월/화요일 밤마다 다음날 출근해야 하는 OL언니들의 다크서클을 붙잡고 늘어졌던 <퀴어 애즈 포크>가 그립지 않다. 이 예고편을 계기로 전세계 셜덕들 사이에서 한국은 “뭘 좀 아는” 나라가 됐다.
그 예고편에 대한 화답이기라도 한 걸까. 시즌3는 말 그대로 존록 덕후들을 위한 떡밥의 진수성찬이다. 시즌2에서 둘이 손잡고 뛰어다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존이 이제 셜록은 그만 잊고 메리와 결혼할 거라며 “전 게이가 아니라고요!”라고 백번 소리쳐봤자 마이동풍이다. 심지어 그간 인터뷰마다 같은 항변을 거듭해왔던 <셜록>의 공동 크리에이터 스티븐 모팻도 인정해야 했다. “시청자들은 셜록과 존 사이를 오가는 장면들을 사랑해 마지않는다. 시즌3는 전체적으로 그들의 관계에 관한 것이되 거기에 약간의 탐정 놀이가 가미됐을 따름이다. 이것은 탐정 이야기라기보다 탐정에 관한 이야기이다. 탐정 놀이는 순위에서 한참 아래에 있다.”
그러니 존의 말이 맞다.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가 아니라 ‘왜’다. 2년 전, 셜록이 위장 자살한 이유는 실은 존과 이렇게 격렬하게 재회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재회를 빌미 삼아 존록은 이제 공공장소에서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애정고백을 쏟아내며, 은근슬쩍 서로의 과거를 캐묻기도 한다. 결국 시즌1부터 스스로를 “고기능 소시오패스”로 소개해온 셜록이 ‘잠금해제’하고 존의 결혼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서약을 장황하게 읊어댈 때, 혹은 총에 맞은 셜록이 존을 떠올리며 죽음에서 두번 살아올 때, 존록 덕후들은 속으로 셜록의 저 유명한 대사를 되뇌었으리라. “Obviously!”
6%의 ‘패밀리 플롯’
시즌1, 2, 3를 거칠게 나누면 셜록의 소년기, 청년기, 중년기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범죄 수사에 빠져 멋모르고 뛰어다니던 소년은 한 여자를 만나 마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인생 최대의 적을 만나 좌절을 맛보기도 하면서 어엿한 남자가 되어간다. 시즌3는 이 성장담의 정점을 장식하는데, 그 중심에 ‘가족’이 있다. 이제 그는 친구의 결혼식에서 어엿한 축사와 축가를 선물하기도 하고, 심각한 갈등에 빠진 친구 부부 사이에 중재자로 나설 줄도 알며, 부모님 댁에서 가족과 보내는 크리스마스를 제법 잘 참아내기도 한다. “셜록에게도 가족이 있으면 좋겠냐”는 질문에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원작을 읽어보긴 한 건가?!”라며 질겁했지만, 이 정도면 ‘우리 셜록이 달라졌어요’를 부제로 달아도 무방하겠다.
한편 ‘가족의 탄생’ 뒤에는 진짜 가족이 있었다. “뭐, <셜록>은 족벌주의의 답습이죠. 전 (모펫) 제작자와 부부 사이고, 제작책임자 중 한명은 제 장모고, 마크(마크 개티스, 공동 크리에이터)와 전 죽마고우고, 마틴(마틴 프리먼)은 아내 역을 맡은 아만다 애빙턴과 실제 부부죠. … 베네딕트 컴버배치같은 특별한 사람의 유전자를 조합해낼 수 있는 것도 그의 부모밖에 없잖아요. 다른 누가 그의 부모처럼 보이겠어요. 그래서 그의 실제 부모를 캐스팅했죠.” 이렇듯 안락한 작업환경 속에서 존록은 메리와 함께 안정적 삼각구도를 형성해가며, 셜록은 ‘가족’ 혹은 ‘핏줄’이란 말을 조금씩 이해해간다.
4%의 ‘더 테러 라이브’
영화 <셜록 홈즈>가 <BBC>의 <셜록>을 결코 뛰어넘기 어려운 이유를 꼽으라면 단연 ‘동시대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19세기의 셜록 홈스를 어떻게 21세기로 데려올 생각을 했냐고 묻는 수많은 기자들을 향해 모팻과 개티스가 하는 말은 늘 같다. 아서 코난 도일의 시리즈는 당시에도 이미 모던했다는 것이다. 그 모던의 동의어는 ‘속도’다. “셜록은 빅토리아 시대의 다른 어떤 것들보다 800배는 빨랐다. 당시 독자들에겐 충격이었을 것이다.” 시즌1, 2는 그 속도의 충격을 스마트폰 시대의 시청자들에게 적확하게 전달했다.
원작의 번역에 있어 시즌3는 조금 다른 노선을 취한다. 속도라는 미학적 요소보다 영국 사회라는 소재적 측면에 방점을 찍는다. 1화는 9.11 테러 이후 끊임없이 논란이 돼온 영국의 반테러법, 런던 지하철 테러 사건, 보리스 존슨 런던 시장의 템스 하구 공항(일명 ‘보리스 아일랜드’) 건설 계획 등을 직간접적으로 다룬다. 2화는 이라크전 당시 병력난을 해소하고자 청소년까지 상대로 과도한 모병 선전을 벌였던 영국 정부를 가리킨다. 3화는 루퍼트 머독에 비견되는 미디어 재벌가 찰스 오거스터스 마그누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뉴스 오브 더 월드’의 도청 사건을 강하게 환기한다.
이에 영국의 보수 언론 <데일리 메일>은 <셜록>을 “좌파” 드라마라고 비난했다. 그들이 제시한 추가 증거는, 모팻이 2010년 총선 당시 “제임스 머독(루퍼트 머독 차남)에게 <BBC>를 맡길 수 있겠나? 모든 게 얼마나 개판이 될지 상상해보라”고 말한 것과 극 속 셜록이 <가디언>을 읽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질세라 <가디언>도 셜록이 “코카인할 시간을 쪼개 투표소에 간다면 노동당에 표를 던질 수는 있겠”지만 그는 “디킨스의 캐릭터들과 달리” 그저 “정의에 헌신할 뿐 사회적 정의에는 별 관심이 없다”고 반격했다. 어느 쪽에 손을 들든 분명한 사실은 <셜록>이 미국 드라마 <홈랜드> <뉴스룸>만큼이나 동시대적인 드라마란 점이다.
9%의 크리스토퍼 놀란
시즌1의 파일럿 에피소드가 공개됐을 때 셜덕들은 <셜록>과 <다크 나이트> 시리즈 사이에 거대한 평행이론이 존재하는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모팻 말고는 모두가 싫어해서 삭제된 한 장면이 계기가 됐다. 해질 무렵, 존이 ‘핑크색 연구’의 사건 현장을 뒤늦게 홀로 나서면서 문득 하늘을 바라보는데 먼 지붕 위에 셜록이 서 있다. 밤의 영웅 배트맨이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브루스 웨인의 집사 알프레드도 군의관이었다는 점, 배트맨-로빈과 존록이 유사한 관계라는 점, 셀리나 카일/캣우먼과 아이린 애들러/더 우먼이 닮은 꼴이라는 점들도 추가로 지적됐다. 그러나 그것은 코믹 원작자 밥 케인이 인정했듯, <셜록>이 <배트맨> 원작에 미친 영향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어쩌면 모팻의 마음을 흔든 것은 배트맨이 아니라 배트맨을 중세적이면서도 하이테크한 ‘다크 나이트’로 되살린 크리스토퍼 놀란의 비전이었던 것은 아닐까. 시즌3는 그런 의심을 거의 확신케 한다. 특히 세 번째 에피소드 중 셜록의 무의식 시퀀스는 놀란이 <인셉션>에서 보여준 시각적 테크닉을 고스란히 연상케 한다. 셜록이 뒤로 넘어질 때의 무중력 효과가 그러하고, 그가 계단을 달려 내려가는 동시에 각기 다른 차원의 무의식 속으로 한 단계씩 빠져들어가게 된다는 설정도 그러하다. 그런가 하면 셜록이 무의식의 밑바닥에서 모리아티와 함께 갇히는 탑처럼 생긴 감옥이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존을 구하기 위해 오토바이 뒤에 메리를 태우고 달리는 장면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빌려왔다. 짐작건대,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들은 21세기 셜록 홈스가 가장 탐냈을 만한 비주얼 테크놀로지였던 것 같다.
16%의 ‘베니’(베네딕트 컴버배치 애칭)
“1화는 1300만명 이상의 시청자들이 봤다고 함. ㄷㄷㄷㄷㄷ. 저 중에 베니 덕후만 몇명이냐 대체….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김베니를 내 남자로 만들기 위해서 처치해야 할 라이벌이 몇백 만명일지 대충 감이 왔다. 근데 처치할 방법을 모르겠….” 한 네티즌의 하소연을 흘려듣지 못하겠다. 이 고성능 소시오패스의 페로몬은 4년째 식을 줄을 모른다, 특히 1화의 오프닝 신, 그가 번지점프줄의 반동을 이용해 중간층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머리와 옷깃의 매무새를 다듬더니 바로 이어 몰리 후퍼에게 폭풍 키스하는 장면은 전세계 베니 덕후들의 숨을 잠시 멎게 했다. 또 존의 결혼식에서 하객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신랑 들러리 베니나 마그누센의 비서에게 접근하는 정상인 남친 베니는 어떤가. 거기다 세르비아에서 돌아온 베니는 <스타트렉 다크니스>의 칸을, 볼품없는 추리닝 차림의 베니는 <제5계급>의 줄리언 어산지를 닮았다. 보호해주고픈 아이부터 거친 마초까지 마구 아우르는 그는 그런 자기의 매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사람들이 셜록을 탐하는 건 그가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갖기 위해 그가 자신의 어떤 부분을 이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외모는 그가 가진 무기의 일부분이다. 그건 자만심과는 다른 것이다.” 앞으로도 그 무기를 마구 휘둘러다오.
11%의 마인드 팰리스
“마인드 팰리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폭탄이 터지기 2분 전, 존은 셜록을 향해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 처박혀 있는 폭탄 해체 방법을 찾아내라 다그친다. 여기서 ‘마인드 팰리스’는 ‘장소법’(method of loci)으로 불리는 기억술의 일종으로, 외워야 하는 항목들을 자신이 친숙한 장소의 심상과 연결시켜 기억 속에 저장해두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는 셜록뿐 아니라 셜덕들에게도 긴요한 사유법이다. 셜록과 함께 그의 마인드 팰리스 속을 여행하듯 <셜록> 시리즈와 그 저변을 누비는 것은 셜덕들이 누리는 가장 큰 재미 중 하나다. 특기할 사실은 셜덕의 마인드 팰리스 안에서 드라마와 원작이 차지하는 비율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방대한 서고에는 팬픽부터, 셜록 홈스 패스티시 문학, 관련 드라마와 영화들, 미디어와 팬들이 생산해내는 편집 영상 및 리뷰 등이 다양하게 비치돼 있다. 그 다중적 텍스트 사이를 방탕하게 오가면서 볼 때 <셜록>의 재미는 배가된다. 말하자면 셜덕에게 텍스트의 즐거움이란 셜록에 관한 셜록이 되는 과정 자체인 것이다.
3%의 시즌4 일기예보
“나 보고 싶었어?” 달달한 시즌3보다 다크한 시즌2를 더 높게 평가하는 팬들도, 마그누센과의 전쟁을 의외로 싱겁게 끝내버린 존록도, 모리아티의 재등장이 반가웠을 듯하다. 모리아티도 셜록처럼 부활의 아이콘으로 등극할지 아니면 모리아티의 뒤를 이을 또 하나의 악당이 탄생할지 여전히 미지수인 가운데, 시즌4의 배는 이미 항구를 떠나 순항 중이라는 소문이다. 모팻의 귀띔에 따르면 “<셜록> 시즌3 촬영버스 옥상”에서 구상을 시작한 시즌4, 5의 방향은 “‘이 세상을 폭파시키고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배우를 캐스팅하자’는 식이기보다 ‘이번에는 어떤 흥분감 넘치는 방향 전환이나 반전을 추가할 수 있을까?’에 더 가깝다”고 한다. 그는 심지어 “이제까지 우리가 내놓은 아이디어 중 최고”라고 자부하기도 했다. 한편 <BBC>의 한 관계자는 영국 일간지 <더 선>에 “<BBC>는 <셜록> 시즌4를 올해 크리스마스 스페셜 프로그램으로 편성하기 위해 안달이 나 있는 상태”라고 제보하기도 했다고. 지난여름 시즌4 계약을 끝낸 제작진과 배우들이 올봄까지 무사히 촬영에 들어간다면, 이번에는 존록과의 재회를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이다. 이미 동풍은 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