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음악의 여정을 떠나네 그 절실한 마음을 따라
2014-02-05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한 가난한 예술가의 초상 그린 <인사이드 르윈>의 깊은 울림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쯤 뉴욕의 그리니치빌리지에 한 사내가 살았다. 그는 르윈 데이비스라는 이름의 포크싱어로,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스스로 무대에 올라 울부짖듯 노래하곤 했다. <더 브레이브> 이후 4년 만에 돌아온 코언 형제의 신작 <인사이드 르윈>은 그 포크싱어의 음악적 여정을 뒤쫓는다. 그리고 그 울부짖음 속에 담긴 어느 가난한 예술가의 절실함을 좀더 깊이 헤아리게 할 것이다. 다음은 그 마음의 행로를 따라가보고자 했던 한 관객의 영화 동행기다.

극장의 불이 꺼지면, 스크린은 곧 무대로 바뀐다. 1961년 가스등 카페. 이름 모를 한 사내가 기타 줄을 튕기며 노래를 시작한다. “날 매달아주오. 나 죽어 사라질 테니/ 날 매달아주오. 나 죽어 사라질 테니/ 목숨엔 미련 없지만 무덤 속에 누워 지낼 긴 세월이 서럽다오/ 불쌍한 놈, 세상 구경 잘했소// 케이프 지라르도 아칸소 안 가본 데 없소/ 케이프 지라르도 아칸소 안 가본 데 없소/ 망할, 얼마나 굶었는지 뱃가죽이 등에 붙었다오/ 불쌍한 놈, 세상 구경 잘했소.” 그렇게 마지막 소절이 놓인 자리까지 고단하게 걸어가는 그의 목소리는, 그 시절 그 카페로 옮겨 앉은 관객의 귀를 단숨에 파고든다. 하지만 그 노래에 우리의 마음까지 온전히 젖어들기 위해서는 좀더 먼 길을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 우회로를 영화 밖에서 찾고자 하는 많은 이들은 1960년대 초 포크 리바이벌 신이나 그 신의 중심에 있었던 포크싱어 데이브 밴 롱크를 중요하게 언급한다. 코언 형제조차 “우린 늘 그 시기에 관심이 있었”고 “데이브 밴 롱크의 자서전 <맥두걸가의 시장>(The Mayor of Macdougal Street)을 중요하게 참고했다”며 그런 선긋기가 아주 부질없는 짓이 아님을 확인시킨다. 하지만 르윈 데이비스를 연기한 오스카 아이작의 지적대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맥두걸가의 시장은커녕 어디의 시장도 못 되는” 무명 포크싱어다. 그가 데이브 밴 롱크에게 물려받은 것이라곤 가스등 카페의 무대와 선원 자격증과 약간의 가난뿐이다. 완성된 영화의 목적 또한 그리니치빌리지를 중심으로 융성했던 프리 밥 딜런 시대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며, 밥 딜런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위대한 포크싱어 데이브 밴 롱크를 재발굴하는 것도 아니다.

더 중요한 우회로는 영화 안에 있다. 르윈의 음악적 오디세이다. 그가 고양이 한마리와 함께 이런저런 사람들과 이런저런 노래들을 거쳐 어느덧 처음 그 자리 그 노래로 돌아올 때, 그것은 더이상 같은 자리 같은 노래가 아니다. 비로소 ‘나’의 노래에 충실할 수 있게 된 르윈의 목소리엔 전에 없던 힘이 실려 있다. 그 힘이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코언 형제가 “뮤지션이 노래를 부를 때만 드러내는 무언가”를 포착하고자 전곡 라이브 녹화를 고수했던 것도 그 노래의 표정 변화를 담아내고자 한 게 아니었을까. 그러니 <인사이드 르윈>은 미국 음악사를 되짚어보는 교육영화도 아니고, 어느 음악가의 복권을 주장하는 전기영화도 아니며, 1960년대의 골든 베스트를 열람하는 음악영화도 아닌 것이다. 한 가난한 포크싱어의 절실한 마음에 다가가기 위해 기꺼이 먼 길을 돌아가고자 하는 음악적 오디세이다.

코언 형제의 가장 심도 깊은 캐릭터 연구물

르윈 데이비스는 누구이며 왜 가난한 포크싱어의 길을 택한 것일까. 그의 음악적 여정은 그 존재론적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필름 코멘트>에 실린 조너선 롬니의 리뷰 중 “<인사이드 르윈>은 코언 형제의 영화 가운데 가장 심도 깊은 캐릭터 연구물 중 하나”라는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밥 딜런이 말하길, “포크송은 천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연주하려면 그들 모두를 만나야 한다”고 했다. “뮤지션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코언 형제는 이렇게 바꾸어 말한다. 르윈의 포크송은 르윈만의 얼굴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들으려면 르윈을 만나야 한다고. 그러니 이 여행의 첫 번째 목적은 르윈이라는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다.

출발은, 모든 여행이 그렇듯, 설렘으로 가득하다. 턴테이블 위 LP판이 돌기 시작하면, 르윈은 어쩌다 맡게 된 고양이와 길을 나선다. “노아의 비둘기처럼 내게도 날개가 있다면/ 강 건너 사랑하는 이에게로 날아갈 텐데”라는 노랫말이 그들의 발걸음을 실어 나르고, 그들도 덩달아 허겁지겁 지하철에 오른다. 황토색 코듀로이 재킷과 황토색 줄무늬 털로 ‘깔’맞춰 입은 그들을 향해 맞은편에 앉아 있던 흑인 쌍둥이 형제가 싱긋. 창밖 너머로 쌩쌩 지나쳐가는 역들을 구경하는 고양이의 호기심 어린 얼굴이 챙챙거리는 기타 줄의 리듬과 함께 너울거리는 사이 영화는 어느새 그리니치빌리지로 들어선다. 글로 옮기기 어려운 이 신의 리듬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꺼이 르윈과 같은 리듬으로 뉴욕의 겨울을 누비게 만든다.

그러나 주인공의 불행과 결핍을 창작의 낙으로 삼아온 코언형제가 그를 가만둘 리 없다. “한 포크가수가 카페 뒤 어두운 골목에서 얻어맞고 있으면 어떨까?” 코언 형제 특유의 독한 농담조 질문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곧장 르윈을 “꼴통 새끼”로 전락시킨다. 가장 친한 동료가수의 여자친구를 임신시켜놓고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친구에게 낙태수술비를 빌리려 하는 무모함, 누나 집에 빌붙으러 가서는 음악계 운운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누나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멸시할 정도의 뻔뻔함, 2년 전 자신이 임신시켰던 여자가 낙태수술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될 정도의 무책임함, 저녁식사에 초대한 친구들의 호의를 무례로 되갚곤 하는 비상한 재주 등이 속속 밝혀진다. 심술쟁이 코언 형제의 피조물로 영락없다.

그토록 비루한 르윈의 마음은 포크송에 대한 환멸로 가득 차 있다. 심지어 포크송은 종종 그를 업신여긴다. 친구의 여자친구로부터 임신 사실을 전해들은 그에게 포크송은 “늦어버린 뒤에야 깨달은” 꼴이라고 빈정대거나(<마지막 남은 것>), “이렇게 집으로 돌아갈 순 없다”고 원망하거나(<500마일>), “독수공방 외로울 아내”를 위해 “우주로 보내지 말아달라”고 칭얼대면서(<미스터 케네디>), 그의 아픈 곳을 들쑤신다. 티 본 버넷 음악감독은 이 영화의 선곡 과정에 대해 “음악은 캐릭터로부터 자라나기 마련”이라고 설명한 바 있는데, 르윈으로부터 자라난 저 노래들은 ‘가시’나 ‘뿔’이 되어 도로 그를 찔러댄다. 르윈의 반응 숏들이 저 노래들의 온화하거나 흥겨운 분위기와 융화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고양이의 행방에 숨죽이는 까닭은

포크송에 대한 환멸은 ‘나’ 자신에 대한 자괴감으로 번져나간다. 그 심연을 탁월하게 장면화한 단락이 시카고행 시퀀스다. “결혼해 교외에 자리잡고 살려 노력하는 것”을 “속물적” 욕망이라 욕하던 르윈은 시카고의 유명 클럽 매니저의 눈에 들어 팔자나 펴보자는 심산으로 길에 오른다. 이 자기기만적 도피를, 거구의 재즈 뮤지션과 그의 기사 노릇을 하는 짝퉁 제임스 딘이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들은 포크송도 음악이냐는 태도로 르윈과 그의 음악을 천대하는데, 지금 르윈에겐 포크송을 변호할 힘이 없다.

그를 실은 자동차는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보다 긴 터널 속에서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그의 자기기만적 도피도 철저히 실패한다. 시카고 클럽을 찾은 그가 오디션용으로 선택하는 곡은 <왕비 제인의 죽음>이다. 출산을 앞두고 목숨이 위험해진 왕비 제인은 헨리 8세에게 자신의 옆구리를 찢어서라도 아이를 꺼내달라고 애원하고 헨리 8세는 그녀를 잃느니 차라리 아이도 함께 잃겠노라 울부짖는 내용의 노래다. 르윈이 자신의 상황과 미묘하게 교차하는 이 “중세시대 제왕절개에 관한 노래”를 태연자약하다 못해 진지한 얼굴로 끝까지 불러내자 클럽 매니저가 한마디 한다. “돈이 안 되겠군.” 결국 그는 동전 한닢 얻지 못한 채 다시 겨울바람을 뚫고 뉴욕행에 오른다.

한밤중의 뉴욕행은 이 영화에서 가장 무섭고도 아픈 대목이다. 단지 그가 앞서 고속도로에 버려두고 온 길고양이를 차로 친 것처럼 보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은 르윈의 저 얼어붙은 표정과 발걸음이다. 망부석처럼 멈춰 선 그는 어둠 속에서 절룩거리는 작은 짐승을 향해 단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한다. 아마도 그는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조지 워싱턴 다리에서 뛰어내린 친구를 붙잡지 못한 내가, 벌써 두살쯤 됐을 아들의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내가, 남의 여자친구를 임신시키고 남의 고양이를 길가에 내다버린 내가, 저 작은 짐승을 구하려 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잃어버린 고양이를 걱정하던 나에게 “네가 걱정해야 할 게 그거니?”라고 다그쳤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때 그 고양이는 ‘나’의 왜곡된 윤리의 징표이며, 잔뜩 찡그린 표정은 ‘나’를 향한 환멸의 표현이다. 이 신은 ‘나’의 가장 끔찍한 밑바닥을 직시하기 위해 불려나온 초현실주의적 악몽이다.

뉴욕의 현실로 돌아온 르윈은 이미 녹초가 돼 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는지, 코언 형제는 그의 절망에 쐐기를 박는다. 그는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선원 자격을 갱신하지만 정작 자격증을 분실해 빈털터리 신세가 되고, 오랜만에 찾아간 아버지는 그의 노래를 듣고 오줌을 싼다. 그런 그의 리버스숏 속에서는, 야속하게도 눈부시게 하얀 스웨터 차림의 4인조 그룹이 “허기”를 노래하고 있다. 다른 누군가의 노래에 위안을 받지도, 자신의 노래로 다른 누군가를 위로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그토록 적나라하게 확인한 그는 “포크송이 싫다”고 절규하며 포크송을 저주한다.

예술을 향한 그 절박한 외침에 홀리다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그다음이다. 가스등 카페에서 깽판을 부리다 쫓겨난 뒤 “최후의 안식처” 골파인 교수댁을 찾은 르윈은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고양이가 돌아왔으며 그의 이름이 “율리시스”임을 알게 되고, 다음날에는 길에서 영화 <머나먼 여정>의 포스터도 보게 된다. 포스터에는 고양이 한 마리와 개 두 마리가 그려져 있고, “오로지 본능만으로 200마일에 이르는 캐나다 야생 숲을 횡단하다”라고 쓰여 있다. 자신이 상처준 존재들이 각자 나름대로 자신의 몫을 감당해나가고 있으리란 작은 믿음은 그 숏들처럼 불현듯 찾아온다. 그리고 그는 비로소 죽은 친구 없이는 끝까지 부를 수 없었던 노래를 끝까지 불러낸다. 그러니 <인사이드 르윈>은 르윈이 ‘나’라는 인간을 온전히 끌어안은 뒤 그 간절한 마음으로 음악적 홀로서기를 시작하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음악적 오디세이가 맞다.

르윈이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가 <날 매달아주오>와 <내게 날개가 있다면>을 부를 때, 거기엔 청중의 리액션숏이 없다. 이제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오장육부에 새겨진 절망을 들여다보며 노래한다. 그를 연기한 오스카 아이작에게 티 본 버넷이 했던 가장 중요한 충고도 “나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한 것처럼 노래하라”는 것이었다. 포크송이 아무런 돈이 되지 않던 시절 자청해 무대에 오르는 사내는 그를 별 볼일 없이 여기는 뭇 사람들의 질문에 이제 온 마음을 다해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포크송을 부르는 것은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저 답변은 비단 르윈 데이비스뿐 아니라, 자신에게 절실해서 노래를 부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영화를 만들거나 글을 쓰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가난한 예술가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말일 테다. 르윈의 지극히 개인적인 답변이 오래된 포크송처럼 깊은 울림을 갖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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