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크리스천 베일] 어려운 길을 가는 남자
2014-02-24
글 : 김보연 (객원기자)
<아메리칸 허슬> 크리스천 베일

문자 그대로, <아메리칸 허슬>은 크리스천 베일의 불룩하게 솟아오른 배에서 시작한다. 이는 베일이 이 영화에서 얼마나 망가졌는지 보라는 감독의 노골적인 메시지다. <배트맨> 시리즈에서 건장한 슈퍼히어로의 몸을 보여준 그가 갑자기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육중한 몸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베일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저게 진짜 배가 맞나, 관객이 아직도 의심하고 있을 때 베일은 태연하게 자신의 대머리에 부분 가발을 얹고, 남은 머리카락을 풀로 정성스럽게 고정한다. 그는 지금 매우 심각하지만 관객은 웃을 수밖에 없다. 그 상황 자체도 웃기지만 크리스천 베일이 이런 모습으로 이런 연기를 하는 것이 몰입을 방해할 정도의 파격인 것이다(이는 크리스천 베일이 데이비드 O. 러셀과 처음으로 함께 작업했던 <파이터>에서 66kg의 몸으로 휘청거리며 등장했을 때를 떠올리게 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인상적인 오프닝으로 꼽을 만한 이 장면에서 크리스천 베일은 그 커다란 몸과 과감한 헤어스타일을 통해 영화의 초반 분위기를 완전히 지배한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충격 효과로만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아메리칸 허슬>과 관련해 크리스천 베일은 외모 변신에 대한 질문을 (당연히) 많이 받았는데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어빙 로젠필드를 연기하는 것은 내게 도전이었다. 그런데 그 인물을 잘 연기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건 도전이 아니라 무엇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이다. 그게 내가 연기를 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은 다음 어빙을 상상해보았다. 그때 그의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가발을 쓰고, 불룩하게 나온 배에, 이상하게 걷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게 완벽하게 느껴졌다. 그때부터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몸을 만들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니 어느 날 감독이 말했다. ‘어, 살이 좀 쪘는데?’”

그 순간 크리스천 베일이 정확하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물론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웃었던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디테일이 좋은 연기를 위해 ‘필요’하다고 그가 말한 것은 새겨둘 만하다. 물론 어빙 로젠필드의 실제 모델인 멜 와인버그가 대머리이고 살집이 많은 체형이긴 하지만 크리스천 베일이 그걸 그대로 따라할 필요는 없으며, 이렇게 극단적으로 모사할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천 베일은 실제의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그 어려운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배우이다. 심지어 감독이 시키지 않아도 말이다.

그렇게 크리스천 베일이 연기한 어빙 로젠필드는 영화 내내 육중한 몸으로 열정적인 활약을 펼치며 다른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게 다일까? 단지 크리스천 베일의 망가진 모습에 즐거워하고, 작품마다 변화무쌍하게 오르내리는 그의 체중을 신기해하며, 실제 인물의 외모까지 똑같이 닮으려 하는 그의 열정에 감탄하면 그만인 것일까.

<아메리칸 허슬>

물론 그렇지 않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크리스천 베일의 온몸을 바친 연기는 <아메리칸 허슬>의 완성도와 메시지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어느 정도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극화한 이 영화에서 어빙 로젠필드는 ‘평범한’ 사기꾼이었지만 FBI와 함께 손잡고 거대한 사기극을 벌여 시장을 비롯한 하원의원들을 뇌물죄로 구속시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이 자체로도 충분히 극적인 이야기이지만 감독은 한 발짝 더 나아간다. 크리스천 베일을 포함해 다섯명의 주인공을 내세워 강렬한 에너지로 가득 찬 군상극을 만든 것이다. 어빙 로젠필드와 그의 애인 시드니 프로서(에이미 애덤스), 아내인 로잘린 로젠필드(제니퍼 로렌스), FBI 요원인 리치 다마소(브래들리 쿠퍼), 그리고 사기의 피해자인 시장 카마인 폴리토(제레미 레너)까지.

기구한 사연을 가진 개성 넘치는 인물들을 저 화려한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있으니 신이 났던 것일까. 감독은 숨가쁘게 배우들 사이를 오가며 절제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냅다 달린다. 에이미 애덤스는 숨겨두었던 섹시미를 아낌없이 발산하고, 브래들리 쿠퍼는 물오른 미친 연기를 선보이며, 제니퍼 로렌스는 그녀의 연기 경력에서 가장 멍청하고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크리스천 베일은 어땠을까. 시작부터 그토록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었으니 이들에 뒤질세라 더 폭발적인 연기를 보였을까. 그런데 의외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영화를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다. 그는 최고의 무기가 될 수 있는 그 이상한 비주얼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방금 언급한 배우들의 폭풍 같은 연기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연기를 펼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연기가 지나칠 정도로 흥분이 넘치는 영화에 무게와 사실감을 실어준다. 모두가 앞에 놓인 파국을 모르고 경주마처럼 달리기만 할 때 베일은 시선을 숨기는 짙은 선글라스를 낀 채 일이 꼬여가고 있다는 것을 유일하게 알아차리며 어떻게 이를 바로잡을지 반성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제야 비로소 크리스천 베일의 둥글게 나온 배와 단정하게 널어놓은 머리칼은 더이상 개그의 대상이 아니라 보통 사람으로서 그가 가진 평범함을 강조하는 장치로 자리잡는다.

이 영화가 매우 격렬하다는 한 기자의 지적에 크리스천 베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맞다. 이 영화에는 많은 감정과 엄청난 격렬함이 있다. 그리고 동시에 멋진 혼란이 있다. 나는 그 혼란이 좋고, 그 혼란이 창작에 많은 도움을 준다.” 크리스천 베일은 이 혼란 속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다른 캐릭터들이 앞다투어 격렬한 사건을 만들고 있을 때 그는 휘둘리지 않은 채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결국 마지막에는 작은 감동까지 만들어낸다. 그가 연기한 인물이 희대의 악당 사기꾼임을 생각해보면 이는 놀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가 연기한 인물은 사기꾼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보통 사람처럼 보인다. 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온 그런 사람 말이다. 이것 또한 그의 연기가 벌인 사기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사기라면 몇번이고 속아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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