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여배우들
2014-03-06
글 : 김혜리

호세 파딜라 감독의 <로보캅>에는 위장을 메슥거리게 하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중상을 입은 경찰 알렉스 머피(요엘 신나만)가 로봇공학의 힘을 빌려 반인간 반기계로 거듭난 본인의 실체를 첫 대면하는 장면이다. 슈트가 천천히 벗겨지면 내부는 텅 비어 있다. 아니, 얼굴과 뇌, 척수와 폐, 그리고 오른손이 잔재로 남아 있다. 관객은 순간 알렉스가 느끼는 구토감을 공유한다. 신체 호러의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찬조연출한 듯한 이 장면은, 이물감이나 통증 없이 인간과 천연덕스런 일체를 이루는 첨단 슈트 및 인공지능 로봇에 익숙해진 우리를 뒤흔든다. 기계와의 접합을 위해, 훼손을 면한 신체 일부도 절제했으리라는 짐작이 공포를 더한다. 이 장면은 <아이언맨3>에서 토니 스타크의 몸에 고분고분 날아와 붙는 슈트 조각의 경쾌한 이미지와 대척점에 있다. 아무리 자신의 뇌가 최종통제권을 갖는다고 해도 알렉스는 이 신체에 감금된 가엾은 수인으로 보인다.

2/11

에이미 애덤스가 좋아, 제니퍼 로렌스가 좋아? 누가 물어보지도 않았건만 <아메리칸 허슬>을 보는 동안 나는 양자택일의 자문을 던지며 시험에 들었다. 우선 에이미 애덤스가 연기하는 시드니는, 속임수와 진실이 비등하게 엎치락뒤치락하며 영화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이 이야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어빙(크리스천 베일)을 깊이 사랑하는 만큼 원망하고, FBI 수사관 리치(브래들리 쿠퍼)를 이용하면서도 매력을 느낀다. 심지어 연적인 어빙의 아내 로잘린(제니퍼 로렌스)과도 결점 많은 한 남자를 동시에 원하는 동병상련의 교감을 나누는 장면이 있다. 좋은 배우가, 남들에게 보이는 얼굴과 사적인 자아를 오가는 넓은 의미의 ‘배우’ 캐릭터를 연기하는 내용의 영화는 언제나 특별한 호소력이 있는데, 가면과 진짜 얼굴을 자신도 분별하지 못하게 되는 경계를 생생히 표현하기 때문이다. 탕웨이의 <색, 계>, 이병헌의 <광해, 왕이 된 남자>, 아네트 베닝의 <줄리아>, 케이트 블란쳇의 <엘리자베스> 그리고 첩보원들의 정신적 ‘직업병’을 다룬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쉽게 떠오르는 사례다.

<아메리칸 허슬>의 시드니는 리치에게 더이상 국적을 속이지 않기로 결심한 다음에도 영국식 가짜 억양을 한동안 내려놓지 못한다. 필요가 다했다고 곧장 위장을 벗지 못하는 것이다. 시드니는 미리 수립한 목표와 전략대로만 행동하는 팜므파탈이 아니다. 거짓말을 하는 도중에도 돌발 변수에 의해 감정과 생각이 바뀔 수 있는 인간이다. 우리가 보는 그녀는 언제나 ‘과정’에 있다. 현행범으로 시드니를 체포한 리치가 “어빙은 처자식을 위해 당신을 이용하는 유부남일 뿐이며 당신은 그의 삶에서 우선순위를 차지하지 못한다”고 회유할 때 그 고발의 내용은 시드니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제3자의 말로 객관화된 자신의 상황은 그녀를 새삼 흔들어놓는다. 같은 맥락에서, <아메리칸 허슬>을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장면은, 감옥에서 풀려난 초췌한 시드니가 같이 멀리 도망치자는 제안을 거절하는 어빙 앞에서 분노하는 실내 대화 신이다. 그녀는 외친다. 지금 당신이 준 실연의 슬픔까지 이용해 수사관 리치와 가까워질 것이며 그 친밀함이 나중에 우리의 비상구를 터줄 거라고. 팀원으로서 의리는 지키겠으나 철저히 연기하는 동안 어쩌면 그 남자를 정말로 좋아할 수도 있다고. 130분의 연기 배틀 <아메리칸 허슬> 중에서도 에이미 애덤스의 이 장면이 다른 차원의 울림을 남기는 까닭은, 그녀가 미리 준비한 카드를 꺼내드는 게 아니라 어빙과 언쟁하는 동안 실망하고 체념하고 오기가 동하여 결심에 이르기 때문이다. 에이미 애덤스는 자신이 격앙돼 쏟아낸 말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신의 시작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장면을 마무리 짓는다. 컷이 다음 장면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그때껏 숨을 참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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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여기에 맞서는 제니퍼 로렌스는? <아메리칸 허슬>에서 그녀가 맡은 로잘린의 자리는 미묘하다. 감정의 줄긋기나 존재감으로 치면, 어빙, 시드니, 리치, 로잘린의 콰르텟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는 영화지만 엄밀히 말해 로잘린은 나머지 셋이 주체가 되어 벌이는 게임에 던져진 불규칙 바운드 변수다. 네 주인공 중 로잘린만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사건을 회고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어빙과 시드니, 리치는 현재의 제 모습이 불만스러워 자아를 재발명하려는 ‘연기자’들인 반면 로잘린은 “변화가 싫어. 변하기 전에 죽었으면 좋겠어”라고 뇌까린다. 그녀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너무 좋아한다. 남편 어빙은 그녀를 가리켜 남들을 등쳐먹고 산 대가로 제게 내려진 업보이며 ‘수동적 공격형 가라테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피카소’라고 정의한다. 사기와 책략의 고수들이 심혈을 기울여 고안한 설계는 막무가내 성격 자체가 무기인 이 여자 앞에서 무용지물이다. 로잘린은 풍만하고 산만하고 자신만만하고 천진난만하고 만만디(慢慢的)다. 영화에서 그녀가 아끼는 매니큐어 향을 묘사하는 “쓰레기 옆에 핀 꽃냄새. 시큼한 악취가 섞여 있기에 도리어 끊을 수 없는 향기”라는 대사는 다름 아닌 로잘린 캐릭터의 요약이다. 말로 하긴 쉬워도 이 특징을 사실적 인물의 성격으로 형상화하는 일의 요령은 짐작도 안 가는 바다. 그런데 로렌스는 이 과업을 고무장갑 끼고 싱크대 훔쳐내듯 쓱싹 해낸다. 고비마다 일을 그르치는 무책임과 민폐의 총화를 기어코 귀여운 여자로 그려낸다. 이 배우가 바로 <윈터스 본>과 <헝거게임>에서 스토아적 미덕마저 갖춘 의젓한 맏딸을, 한치도 덜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연기했던 그 배우다. 제니퍼 로렌스의 어이없는 점이다. 그래서 에이미 애덤스인가, 제니퍼 로렌스인가? 구태여 따지자면 나는 에이미 애덤스가 연기하는 인물에 가까운 인간이다. 그래서 에이미 애덤스가 몸부림칠 때면 함께 가슴을 졸이고, 제니퍼 로렌스가 몸부림칠 때면 그저 턱을 빠뜨린 채 매료당한다.

2/16

3년 전 배우 대니얼 래드클리프가 성소수자 청소년 자살 방지를 위한 단체 트레버 프로젝트로부터 공로상을 받았다는 뉴스를 읽고 은근히 놀란 기억이 있다. 세계 최대의 청소년 및 가족 관객을 거느린 <해리 포터> 시리즈의 얼굴이자 소녀 팬덤을 보유한 스무살 남짓의 스타가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가 종결되기 훨씬 전부터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 트랜스젠더 10대들을 고무하는 운동에 꾸준히 나섰다는 사실이 여러 생각을 불렀다.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당시 인터뷰를 했을 때 접했던 소년 배우의 조숙한 취향과, 스타는커녕 배우라는 직업도 선택지의 하나에 불과하니 차차 생각해볼 거라던 느긋한 태도가 기억에 새로웠다. 그때의 반듯한 소년이 흔들림 없이 성장하고 있구나 괜히 뿌듯했고 ‘해리 포터’의 한마디는 실제로 적잖은 아이들을 돕지 않았을까 짐작도 했다. 그즈음 그가 게이일 거라는 항간의 추측에 래드클리프는 어깨를 으쓱하는 선선한 어조로 “원하는 대로 말해도 상관없지만 나는 이성애자다. 게이였다 해도 이 프로젝트에 나섰겠지만 커밍아웃 않는 배우들의 선택도 이해한다. 남이 이래라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최근 래드클리프는 <킬 유어 달링스>에서 게이 시인 앨런 긴즈버그 역으로 분했고 섹스 신 연기에 대해 역시 무람없는 코멘트를 남겨 뉴스에 인용됐다.

오늘 배우 엘렌 페이지가 레즈비언으로서 성 정체성을 공표했다. 이중고가 따르는 결단이다. 이제 그녀는 무지개 깃발처럼 상징이 되어 펄럭여야 하고, 장년 이후 커밍아웃한 스타들과는 달리 이성애 시나리오가 지배적인 영화산업에서 앞으로도 긴 세월 암묵적인 캐스팅 제약을 감수해야 한다. 반면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라는 자리는 커밍아웃의 최대 장애물일 뿐만 아니라 사적인 취향을 굳이 연단에서 공개하도록 그녀를 밀어붙인 힘이었으리라. 감히 상상하건대 1인분의 정직한 인생을 사는 해방감이 커밍아웃이 가져다줄 보상의 전부였다면 페이지의 고민은 다른 경로를 거치지 않았을까. 알려진 인물이기에 사적인 고백이 공적인 영향력을 갖는다는 현실, 따돌림받고 자해하기에 이르는 성 소수자 청소년을 둘러싼 강고한 벽에 당장 창을 내줄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젊고 패기 있는 예술가에게 뿌리치기 어려운 동기였을 것이다. 엘렌 페이지가 포기한 것은, 수중에 있는 힘을 쓰지 않을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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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허슬>의 헤어

<인사이드 르윈>이 수염에 파묻힌 영화였다면 <아메리칸 허슬>에는 과장된 헤어가 있다. 이 영화에서 머리칼은 인물들을 보호하는 헬멧이다. ‘속알머리’ 없는 크리스천 베일에게 정수리를 커버하는 기술은 자존심이고, 용수철 펌을 한 브래들리 쿠퍼는 원래 생머리 아니냐는 지적에 상처받는다. 영국 귀족의 우아한 컬과 야한 사자머리를 오가는 에이미 애덤스는 위태롭게 분열하고 제니퍼 로렌스와 제레미 레너의 푹신한 앞머리는 한번의 손길로도 흘러내릴 듯 허세스럽다. 오스카 헤어•메이크업 부문 후보에서 누락된 <아메리칸 허슬>의 스탭들은 지난해 감독상 노미네이션에서 간과된 <아르고>의 벤 애플렉만큼 억울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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