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혁의 바디무비]
[김중혁의 바디무비] 시간을 고의로 잃어버렸던 적이 있나요
2014-03-06
글 : 김중혁 (작가)
일러스트레이션 : 이민혜 (일러스트레이션)
K와 <인사이드 르윈>과 야구와 루저였던 인생의 한 시기에 대하여

코언 형제의 신작 <인사이드 르윈>에는 나처럼 좌우대칭 이야기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 탄성을 지를 만한 장면이 등장한다. 지질하기 이를 데 없는 르윈 데이비스(오스카 아이작)가 친구의 여자친구이자 자신과 하룻밤을 보낸 뒤 임신을 하게 된 진 버키(캐리 멀리건)의 집을 찾아가는데, 좁은 복도 끝에는 두개의 문이 양쪽으로 나뉘어져 있다. 복도는 어찌나 좁고 양쪽의 문은 어찌나 사이좋게 대칭이던지 핏줄에 연결된 인간의 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복도와 두개의 문은, 말하자면 르윈의 ‘내부’(인사이드)로 들어갔을 때 만나게 되는 풍경인 셈이다. 흔히 알려진 대로 좌뇌는 말과 계산 등 논리적인 기능을 담당하고, 우뇌는 음악과 그림 같은 이미지를 떠올리는 기능을 담당한다. 좌뇌는 논리적인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지만, 우뇌는 직관적 판단에 의해 문제를 해결한다. (이것은 스포일러일지 모르겠지만) 진 버키의 집은 오른쪽이고, 르윈 같은 경우는 직관적 판단으로 문제를 망치는 쪽이다. <인사이드 르윈>은 어쩌면 우뇌에 옹기종기 모여서 음악하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농담이다. 지나치게 미셸 공드리적인 상상이었다.

코언 형제는 내가 이런 농담을 할 것을 미리 예측했는지, 좌와 우를 나누고 무엇이든 구분하길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농담을 던진다. 우리의 우뇌 사용 지질이 르윈 데이비스는 진 버키 앞에서 또 잘난 체를 해본다. “내 경험에 의하면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으로 나뉘어져 있어. 우선 이 세상을 두 종류로 나누는 사람과….” 르윈의 말을 끊고 진 버키가 비아냥거린다. “그리고 루저?” 이런, 폐부를 찌르는 말이다. 우리는 어쩌면 루저가 되지 않기 위해 이 세상을 두 종류로 끊임없이 분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진 버키의 말을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 세상을 두 종류로 나누는 네가 바로 루저’라는 말 같기도 하다. 세상이 전부 루저투성이다. 원래 나 같은 루저들이 그렇지. 분류하는 걸 좋아하고, 나누는 걸 좋아하고, 정의 내리는 걸 좋아하지. 시간이 무척 많으니까. 그래도 어쩌겠나, 그게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데. 나는 르윈 데이비스가 마치지 못한 말이 궁금해 죽겠다. 르윈 데이비스의 정답은 무엇이었을까. 이 세상은, 이 세상을 두 종류로 나누는 사람과 또 어떤 사람으로 이뤄져 있는 것일까. 이 세상을 두 종류로 나눈 걸 다시 네 종류로 나누는 사람일까. 그러면 상대방이 그걸 다시 여덟 종류로 나누고, 그걸 또 열여섯 종류로 나누고…. 코언 형제에게 편지라도 보내볼까보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두 종류로 나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나에겐 두 종류의 문학이 있다. 내 작품이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작품들, 그리고 내가 쓴 작품.” 오, 이건 알 듯 말 듯 오묘한 자뻑 같기도 한 말이고.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문학을 하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면 천진무구하고 소박한(naive) 문학을 하는 사람과 성찰적인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라고 했으며, (나는 아마도 소박한 문학쪽이겠지) 부동산계의 큰손이자 매번 4천만 ‘땡겨달라’고 말하는 (개그맨 김숙이 연기하는) 난다김 여사님은 세상의 땅을 두 종류로 나눈다. “내 땅과 내 땅이 될 땅.” 세상을 두 종류로 나누는 게임을 하다보면 은연중에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드러난다. 극단은, 위험하지만 명료하다. 분류는, 난폭하지만 편리하다. 아니 바꿔서 말해야겠다. 극단은, 명료하지만 위험하다. 분류는, 편리하지만 난폭하다.

야구 경기를 볼 때마다 ‘야구야말로 우뇌와 좌뇌를 동시에 사용해야 하는 스포츠가 아닐까’ 싶다. 야구는 빠르면서 동시에 느리고, 격렬하지만 정지해 있는 순간 또한 많으며 본능적이지만 논리적인 스포츠다. “타자는 0.25초 만에 본능적으로 공의 궤적을 판단해야 하며, 공과 배트의 중심선이 정면으로 맞을 수 있는 폭은 1.2센티미터에 지나지 않는다.”(레너드 코페트의 <야구란 무엇인가>) 던지고 치는 일은 순식간에 일어나지만 그 사이엔 수많은 작전과 움직임이 포함돼 있다.

투수가 공을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던지고, 타자는 망설이지 않고 빨리 치고, 안타를 친 주자가 무조건 계속 달린다면 야구 경기 시간은 엄청나게 단축될 것이다. 하지만 야구는 그만큼 재미없어질 것이다.

나는 박찬호 선수가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97년과 2000년 사이에 야구의 묘미를 알게 됐다. 2000년에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 나는 여러 가지 일을 하기도 했지만 아무리 여러 가지 일을 한다고 해도 마땅한 직업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시간이 무척 많았다. 백수일 때 백수이더라도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는 취지에서 아침 9시에 눈을 뜬 다음, 야구를 봤다. 9시에 시작한 야구는 12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처음엔 박찬호 선수의 경기를 주로 봤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전 처음 보는 팀들의 경기를 보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재미없는 경기를 어떻게 참고 보나 싶을 정도로 지루했는데, 나중엔 서너 시간이 눈 깜빡하는 사이에 지나갔다. 메이저리그의 중계 기술이 워낙 뛰어난 까닭도 있겠지만 텔레비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투수의 손가락, 타자의 습관, 주자의 신발 각도, 포수의 사인, 감독이 의자에 앉은 모습, 외야수의 선글라스, 그 모든 것들을 용광로에 넣어 녹인 것이 야구라는 스포츠였다. 어쩌면 그 시절의 나는 야구처럼 지루한 스포츠를 원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느리게 진행되고, 휴지부가 많은 스포츠를 원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시간을 견디는 자만이 이길 수 있다는 교훈을 얻기 위해 야구를 본 것인지도 몰랐다. 나에게는 시간이 많았고, 이야기가 필요했다.

야구는 느리게 진행되고, 빈 시간이 많고, 이야기가 끼어들 여지가 많다. 미국에서 야구가 발전한 이유가, <꿈의 구장>부터 <머니볼>에 이르기까지 미국에 그토록 많은 야구영화가 생산된 것은 신화와 이야기가 필요한 미국이라는 나라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미식축구가 몸으로 부딪치는 전투적인 미국을 상징하는 스포츠라면, 야구는 자신들만의 이야기와 전설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기록하는 스포츠일 것이다.

야구광인 소설가 폴 오스터는 자전적 에세이인 <겨울일기>에서 야구에 대한 정의를 멋지게 내려놓았다. “공을 던지고 받기, 땅볼 처리하기, 경기 내내 매 순간 아웃이 몇개나 있고 주자가 몇명이나 출루해 있느냐에 따라 어디에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하는지 파악하기, 야구방망이에 맞은 공이 당신쪽으로 날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 예측하기, 홈으로 송구하고 2루로 송구하고 더블플레이 시도하기, … (중략) … 야구 평론가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순간도 지루하지 않았다. 항상 기대에 차 준비된 자세를 취하고 있었고 머릿속에는 수많은 가능성들이 들끓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확 폭발했다. … (중략) … 스윙을 하고 난 뒤 들려오는 바로 그 소리, 그리고 외야 멀리 날아가는 공을 볼 때의 느낌. 그 기분에 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폴 오스터는 야구 선수로 뛰었을 때의 환희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나는 보는 사람으로서 똑같은 환희를 느꼈다.

르윈처럼 뻔뻔하게 말해보자면, 세상에는 시간과 맞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시간을 쪼개서 얻는 것이고, 둘째는 시간을 고의로 잃는 것이다. 아마도 1997년 즈음 야구가 사라지기라도 했다면 나는 불안하고 지루하던 20대의 시간들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시간을 고의로 잃으면서 다른 시간을 벌었던 것 같다. 야구가 그걸 가능케 했다. 그 시절의 내가 진정한 루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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