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영화제] 위대한 영화 순례
2014-04-16
글 : 박인호 (영화평론가)
‘월드시네마 11’, 부산 영화의 전당 시네마테크에서 4월25일까지
<빅 퍼레이드>

올해 열한 번째 여행을 시작한 ‘월드시네마’의 지도가 예년에 비해 풍성해졌다. 감독의 이름과 영화의 명성보다는 각별한 영화적 순간을 만들어낸 영화들과 국내에서 처음 상영되는 작품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영화사에서 빠지지 않는 대가들의 숨어 있는 보물과 같은 영화들, 미지의 영토에서 온 매혹적인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할리우드 시스템이 정착되는 1920년대부터 변혁의 시기인 1970년대까지 제작된 영화들의 목록이 흥미롭다. 그 시작은 뛰어난 무성영화 두편이다. 킹 비더의 이름을 각인시킨 <빅 퍼레이드>(1925)는 1차 세계대전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스펙터클하게 직조된 전쟁 장면의 위용뿐 아니라 가슴을 저미는 사랑, 출신 배경이 다른 세 젊은이의 전우애 등 소소한 일상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빛나는 영화적 순간을 만들어낸다. <시티 걸>(1930)은 F. W. 무르나우가 할리우드의 산업 시스템에서 만들어낸 마지막 작품으로, 캐릭터로서의 카메라가 서사와 함께 호흡하면서 빚어내는 자연풍경의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다. 독일 표현주의와 실내극에서 일가를 이룬 감독이 세밀한 관찰을 통해 포착한 리얼리즘의 영역에 어떻게 도달하는지 동참할 수 있다.

윌리엄 웰먼의 숨은 걸작 <히어로즈 포 세일>(1933)은 공황기를 배경으로 한 어떤 영화보다 감동적이다. 혼란스러웠던 시대지만 인간답게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한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서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혼재, 노조의 발흥, 아메리칸드림의 이면에 숨겨진 가난과 배고픔, 자본의 욕망에 따라 쉽게 변질되는 가치관의 투쟁을 통해 웰먼의 사회비판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에른스트 루비치의 <사느냐 죽느냐>(1942)는 1930년대 ‘루비치 터치’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더욱 명쾌해진 그의 재치와 날카로운 풍자가 어우러진 영화다.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내가 죽인 남자>(1932)로부터 10년 뒤에 발표된 이 영화가 지닌 유쾌함과 시대를 읽어내는 감식안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그의 <모퉁이 가게>(1940)를 뮤지컬로 리메이크한 로버트 Z. 레너드의 <즐거운 여름>에서는 MGM에서 슬랩스틱 코미디의 걸작을 발표했던 버스터 키튼을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육체 하나로 온전히 세계와 맞섰던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시네필이라면 무성영화의 순수성을 믿었던 그가 뮤지컬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에 만감이 교차할지 모른다. 슬랩스틱 코미디의 연출도 겸한 이 영화에서 그는 말을 하고 노래도 부른다. 또한 프레임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충실하게 연기하는 ‘그레이트 스톤 페이스’의 삶과 영화에서의 역할이 묘하게 맞물려 있는 것에 비애를 느낄 수도 있다. 어릴 때부터 보드빌 쇼에서 공연을 하면서 살아온 그가 비슷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주디 갤런드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뭉클한 순간이다.

버드 뵈티커는 돈 시겔, 앤서니 만, 새뮤얼 풀러와 더불어 1950, 60년대 저예산 웨스턴의 걸작들을 만들었다. 국내에서 처음 상영되는 <7인의 무뢰한>(1956)은 뵈티커의 페르소나인 랜돌프 스콧, 제작자 해리 조 브라운과 협력한 ‘Ranown cycle’의 첫 작품이다. 평생 제식으로서의 투우에 매료되었으며 투우적인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그의 형식미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패배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눈을 사로잡는다. 잔인함과 우아함이 공존하는 서부와 거리를 두고 탐색하던 인물들이 서서히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서사 구조, 서부의 풍광보다는 육체의 아름다움에 몰두했던 뵈티커의 영화적 세계는 웨스턴의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할 것이다.

<히어로즈 포 세일>

앙리 조르주 클루조의 <공포의 보수>(1953)를 자신만의 색깔로 리메이크한 <소서러>(1977)는 한마디로 괴물과도 같은 영화다. <프렌치 커넥션>(1971), <엑소시스트>(1973)를 뛰어넘는 윌리엄 프리드킨의 이 영화가 관객을 포획하고 끌어당기는 힘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범죄에 연루된 인물들이 벌이는 필사적인 임무 수행이 미국 자본이 망쳐놓은 독재국가의 현실, 반유대주의와 나치 전범들의 문제, 석유 채굴에 동원되는 육체뿐인 노동자들의 죽음과 긴밀하게 연계되는 지점은 색다른 영화적 체험과 해석을 가능케 할 것이다.

미완이기에 더욱 특별한 작품으로 기억될 장 르누아르의 <시골에서의 하루>(1936)는 생의 활력과 아름다움이 어떻게 영화에 새겨지는지 느낄 수 있다. 함께 상영되는 크리스 마르케의 <방파제>(1962)가 제시하는 완벽하게 통제된 감독의 개인적 세계와 즉흥적인 삶의 흥취가 새겨진 르누아르의 방법론을 함께 감상하는 것은 독특한 영화적 체험으로 기억될 만하다. 자크 페데의 <플랑드르의 사육제>(1935)는 떠들썩한 사육제의 하루를 해학적으로 표현하는데, 브뤼헐의 그림과 정교한 정물화에서 차용한 미장센이 돋보인다. 미셸 푸코의 책 <내 어머니와 누이와 동생… 을 죽인 나, 피에르 리비에르>를 각색한 르네 알리오의 <나, 피에르 리비에르>(1976)는 지적인 담론을 독특한 형식으로 풀어내는 영화로 한 개인에 대한 존재증명과 사법체계의 틀을 함께 바라본다. 놓치면 후회할 또 하나의 영화는 루이스 브뉘엘이 만년에 만든 걸작인 <자유의 환영>(1974)이다. 온갖 자유라는 이름의 허깨비들이 도처에 출몰하면서 선형적인 서사 구조에 흠집을 내고 익숙한 시간감각을 흐트러트린다. 타고난 초현실주의자의 발칙한 선언이자 자유연상을 따르는 부조리극이라고 할 수 있다. 상영작 중에서 유일한 다큐멘터리인 <174번 버스>(2002)는 생중계된 자료화면과 인물들의 인터뷰, 길에서 살아가는 브라질 하층민의 삶을 교직하면서 사회구조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소서러>

이 밖에도 에이젠슈테인의 미완의 야심작 <이반 대제Ⅰ,Ⅱ>(1944, 1958)와 장 마리 스트라우브, 다니엘 위예가 영화를 대하는 태도를 감지할 수 있는 <모세와 아론>(1975), 빔 벤더스의 초기 걸작인 <도시의 앨리스>(1974), 린지 앤더슨이 자본주의의 허상을 꼬집은 <오 럭키 맨!>(1973)도 새로운 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올해의 월드시네마에서 집중 조명한 감독은 ‘닛카쓰 로망 포르노’를 새로움의 경지로 끌어올린 구마시로 다쓰미다. 초기의 걸작인 <젖은 입술>(1972)에서 <빨간 머리의 여자>(1979)에 이르기까지 그의 대표적인 로망 포르노뿐 아니라 다이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 <모도리강>(1983), 유작인 <몽둥이의 슬픔>(1994)까지 7편을 상영한다. 특히 초기의 ‘wet’ 시리즈인 <젖은 입술> <이치조 사유리: 젖은 욕정>(1972), <방황하는 연인들>(1973)은 단조로운 로망 포르노의 서사를 탈피한 실험이 돋보이는 영화다. 모더니즘에 기반을 둔 서사 구조는 이야기의 분절과 해체, 자막과 이미지를 사용하는 방법, 청년들의 실존적인 고민과 영화에 대한 반영적인 시선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또한 구마시로의 세계관이 응축된 이미지도 눈여겨봐야 한다. 모래밭이나 모래언덕으로 대표되는 야외 공간은 몸부림쳐도 헤어나오기 힘든 강박증과 슬픈 운명을 드러내고, 답답하게 갇힌 실내 공간은 광기와 탐닉이 집중되어서 더욱 서글픈 육체를 부각한다. 한곳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인물의 공허함과 욕망이 직조되는 강렬한 이미지와, 자신의 세계가 로망 포르노에 머물기 원치 않았던 감독의 야망이 은밀하게 제시되는 방식 또한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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