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이 19년간 한국영화 베스트 데뷔작을 결산하는 와중에 2014년의 후보가 도착했다. 오는 4월17일 개봉하는 이수진 감독의 첫 장편영화 <한공주>다. 지난해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비전부문에서 처음 소개돼 CGV 무비꼴라쥬상과 시민평론가상을 수상한 이래 마라케시, 로테르담, 프리부르 등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과 관객이 주는 상을 고루 품에 안은 <한공주>는 비로소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그녀를 낳은 한국 사회의 문을 노크한다.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똑. 똑.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청명한 목소리를 타고난 소녀 공주(천우희)는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 음악의 의미를 묻는 친구 은희(정인선)에게 소녀는, 노래를 부르면 눈앞의 모든 게 순간 음표로 바뀐다고 설명한다. 숨, 발자국 소리, 바람 소리, 심지어 철 긁는 소음까지도 “괜찮다. 괜찮다” 하는 위안으로 들려와 외로움도 슬픔도 두려움도 잠시 잊을 수 있다고. 노래가 종교 같은 거냐고 친구가 되묻자 공주는 정확하고자 애쓰며 대답한다. “힘은 되는데 현실에 나타나진 않아.” 그리하여, 현실에서 스스로를 구조할 힘을 얻기 위해 소녀는 수영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어이없게도 소녀의 두 취미는 생존과 직결돼 있다. 우리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공주가 헤엄치는 법을 습득하려고 결단한 동기는, 자신이 장차 물에 빠졌을 때 자맥질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예감을 품었기 때문이고 그럴 경우 누구도 구명 튜브를 던져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터득해서다. 그리고 10대 소녀가 자칫하면 생의 끈을 놓아버릴 정도로 탈진한 까닭은 그녀가 머지않은 과거에 집단 폭력에 의해 극심한 내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한공주>를 관람하는 경험은 기본적으로 2시간 동안의 조바심이다. 공주가 미처 충분히 강해지기 전에, 지구력과 근력과 수영의 기술이 늘기 전에 큰물이 다시 덮쳐온다면 소녀는 영영 떠오르지 못할 수도 있다. 온전히 홀로 짊어져야 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로도 모자라, 공주는 어른들과 사회로부터 합당한 조력과 위무를 얻지 못한다. 가장 참담한 대목은 소녀가 그걸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주’라고 붙여진 소녀의 이름은 마치 악의적인 농담과 같다.
10대 집단 폭력과 성범죄, 자살이라는 한국영화에서 드물지 않은 소재를 선택한 <한공주>의 차별성은 ‘그날 이후’의 이야기를 영화의 전경(前景)으로 배치했다는 점에 있다. <한공주>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난 다음 이미 거기 버티고 있는 사태에 당사자, 그리고 같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초점을 맞춘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리고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로 요약할 수 있는 이수진 감독의 반복된 연출의 변은, 뜨거운 이슈와 안전거리를 두려는 제스처로 오해받을 수도 있지만 옳고 그름의 판단을 회피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구성된 ‘이야기’로서 이 영화의 핵심이 다른 데에 있음을 봐달라는 ‘환기’로 이해하는 편이 적절하다. 영화에 언급되는 가해자의 인원수나 일부 에피소드는 2004년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불가피하게 연상시킨다. 그러나 <한공주>에 실화에 기초했거나 모티브를 얻었다고 알리는 자막은 없다. <한공주>가 태생적으로 짊어지고 있는 짐은, 극중에서 공주가 친구들에게 동영상 찍히는 일을 발작적으로 거부하는 장면에 함축돼 있다. 처음부터 이 점을 인식했던 이수진 감독은 허구로 만들어진 극 중 인물의 행동이나 상호관계가 유사한 사건을 경험한 실존 인물들의 것으로 비추는 일을 매우 경계했다고 말한다. 또한 A4 50장 분량의 단출한 시나리오가 퇴고를 거듭하는 기간 동안, 전학 뒤 공주가 새 환경에 적응해가는 이야기가 본론을 이루고 과거는 플래시백을 통해 파편적으로만 노출되는 기본 구성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공주>가 불행을 착취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 관객이 있다면, 러닝타임 절반이 넘어가도록 사건의 실체를 감춰두고 조금씩 나누어 그림을 드러내는 이 영화의 신중한 태도가 오히려 과거에 일어난 일의 존재감을 키워 서스펜스를 낳고, “알고 싶다”는 욕구를 관람의 지배적인 드라이브로 만드는 부작용 때문이다. ‘그날’의 재현이 감독의 의도에 부합하는 수준으로 알맞게 통제됐는지도 토론의 주제가 될 만하다(이어지는 인터뷰 참조). 그러나 이 아쉬움들은 연출의 부분적인 실패일지언정 부주의의 소산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자극적 사건을 영화 뒤쪽에 숨겨뒀다가 밝히는 구성을 선호하지 않는다. <한공주>도 혹여 의도와 달리 과거에 일어난 사건 자체가 영화의 핵심으로 비칠까 우려해서 초반부터 단서를 나누어 제공했고 (중반인) 60분 지점부터 사건을 보여주었다.” 이수진 감독의 설명이다.
분노와 부끄러움의 부메랑
천우희 배우가 연기하는 한공주는 곁을 내주지 않는 캐릭터다. 방 안에 관객과 그녀만 남겨지는 장면에서조차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주장과 호소의 힘을 믿지 않게 된 영리한 아이는 눈을 깜박이고 귀를 세워 정황을 판단하고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출구를 모색한다. 무리도 아니다. 영화 도입부에서 우리는 뭐가 정말 삶에 도움이 되는 일인지 공주에게 가르치는 교사의 조언을 듣는다. “사람 사는 세상이 잘못했다고 죄인이고 그렇지 않았다고 죄인이 아닌 게 아니야. 알려져서 좋을 게 뭐 있어. 교장 선생님이 특별히 (전학 갈) 좋은 학교를 알아봐준 거야. 이게 바로 고마운 거야.” 결과적으로 수영 교습이 시작되기 전부터, 극중의 공주는 물속에 잠겨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현실적으로도 비유적으로도 영화 속 공주는 투명한 막들에 둘러싸여 있다. 수면(水面)에, 슈퍼마켓 쇼윈도와 교실 유리창에, 테니스장의 그물 벽 뒤에. 그녀에게 던져지는 “가봤자. 벽이지 뭐”, “나와. 거긴 길 없어” 같은 일상적인 대사에 실린 의미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감춘 공주 대신 관객이 자신을 투사할 수 있는 인물은 소녀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교사의 어머니다. 이영란 배우가 능란하게 연기하는 중년 여인은, 공주를 먹이고 재우는 비용이 주어지고 소녀가 엽렵하게 일을 거들자 보호자 역할을 받아들인다. 공주가 가해자의 부모들로부터 위협을 받는 일이 터지고 소녀의 사연을 들은 그녀는 “천벌받을 것들. 무슨 낯짝으로 쳐들어와?”라고 욕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우리는 불행하고 불미스런 사태를 피해자 입장에서 체험한 사람과도 가까워지는 일을 불길하게 여기며 모른 척하고 싶어 한다. “뭐 자랑할 일이라고”라는 극중 대사가 권장하는 ‘침묵’이 두터워질수록, 피해자가 추문을 책임지는 위험한 도착(倒錯)은 깊어진다. 심지어 공주의 친부도 자기를 피해자의 자리에 놓고 억울해할 뿐, 진짜 피해자인 딸을 보호할 힘까지는 끌어 모으지 못한다. 처음 사회면 보도를 접하고 제3자로서 한동안 분노하던 이수진 감독은, 본인도 포함돼 있는 이 현상에 대한 생각이 <한공주>의 진짜 출발이었다고 생각한다. “멀리서 바라볼 때는 보듬어주고 싶고 가엾어하면서, 나와 그 사람의 거리가 좁혀지면 회피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다. 거기에 대한 고민이 시작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정의는 언제나 복수보다 까다롭고 복잡하다. 가해하고 피해를 입은 당사자끼리의 정산(精算)을 넘어 사회 전원을 호출해 연루시키고 판단을 요구해야 하는 문제여서다. 법을 위시한 ‘시스템’ 역시 다수의 동의로 지어지고 굴러간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책임을 나눠준다. 복수는 구경할 수 있지만 정의는 관찰자도 심문대로 데려간다. <한공주>의 아이러니는 공분의 야기가 목표가 아니라고 다짐하는 영화가 극장 안에서 큰 공분을 부른다는 데에 있다. 중요한 점은 그 집단적 노여움의 대상에 영화를 보는 ‘나’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기묘하게도 이 분노와 부끄러움의 부메랑이 <한공주>에게 호의를 품게 하는 근거인 동시에, 공주를 향한 사운드트랙의 응원 함성에 차마 내 목소리를 슬쩍 얹을 수 없는 주저의 근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