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가 끝난 뒤 생각이 시작되길 바랐다
2014-04-22
글 : 김혜리
사진 : 백종헌
<한공주> 이수진 감독 인터뷰

-<한공주>는 공주가 기차를 타고 전학 가는 광경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동 경로를 명시하지는 않았는데 인물의 궤적을 정리한다면.
=원래 공주가 살던 곳은 지방 소도시로 설정했다. 교장의 인맥을 따라 서울의 한 학교로 전학시키려고 했지만 한 차례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시 인천에 있는 학교로 옮겨간다. 엄마가 사는 동네는 충무로이고 결말 부분의 배경도 서울이다. 그러나 장소들이 아니라 이 소녀가 세상을 전전(輾轉)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고양이를 부탁해> 이래 인천은 10대들을 그린 한국영화의 공간으로 자주 쓰였다. 인천을 주요 배경으로 결정한 데에 촬영 편의 외에 다른 이유도 있는지.
=군복무를 한 도시인데 제대 이후 10년간 가지 않았다. 그런데 연애 시절 아내의 집이 인천이라 다시 오가게 됐다. 삼화고속을 자주 탔다. (그래서 영화에 차창 밖 풍경이 많은가 묻자) 그럴지도 모른다. (웃음) 신혼집도 인천에 얻게 되어 자연히 <한공주>의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인천에 살았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영화를 완성할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한 촬영지라는 이유가 크다.

-폭행 사건을 겪기 전의 공주는 원래 어떤 아이라고 상상했나.
=무조건 강한 아이였으면 했다. 선천적으로 강인하다기보다, 가정환경이 불우하지만 스스로를 잘 돌볼 수 있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며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친구로 보여주고 싶었다. 음악은 공주에게 돌파구인 동시에 위로가 되는 버팀목이다. 여러 영화에서 익숙한 장치이긴 하지만 감정 표현이 적은 인물인 만큼 음악으로 순간순간 마음을 표현할 수 있길 바랐다.

-설명대로 공주는 탄탄하고 당차지만 이따금 안타깝도록 소극적이다. 목적지를 캐묻지 않고 길을 따라나선다거나, 병원에서 끝까지 여자 의사를 요구하지 못한다거나, 내쳐지기도 전에 떠난다거나. 사건이 성격에 남긴 흔적일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모습에서 보듯 공주는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아이다. 슬프지만 그 경험을 통해 세상에서 현실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는 법을 터득한 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제 뜻을 내세워 싸우는 것보다 방어적인 수단을 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비슷하게 반복되는 장면이 있는데 처음에는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라고 반문했던 공주가 후반의 유사한 상황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 거다. 침묵하는 그 몇초간 공주의 머릿속에는 많은 생각이 오갔을 거다.

-<한공주>는 이야기를 푸는 순서가 가장 큰 특징인 영화다. 치명적 사태가 지나간 다음에서 시작해 플래시백으로 과거를 조금씩 드러낸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편집점은 어떻게 정했나.
=플래시백을 선호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시간 순서로 영화를 진행하면, 가해와 피해만 부각되고 공분을 일으키는 것이 최종 목적인 구조로 변질될 것 같았다. 과거의 장면들도 과거 안에서 순서가 정연하지 않은데 설명적으로 편집할지 아니면 공주의 감정선을 따를지 고민하다 후자를 택했다.

-연출의 조심스러움과 이야기의 초점에 관한 고민에 비추어, 과거 사건을 상당히 길게 보여준 듯한 인상이다. 반면 공주가 정상생활로 복귀해가는 과정은 몽타주 시퀀스로 상대적으로 짧게 처리되었다. 완성된 영화에서 과거 사건의 비중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나.
=성폭행이라는 소재에 주의가 몰릴 때면 관련 장면을 더 걷어내야 했을까 돌아보기도 했고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고는 과거 신을 줄여서 얻을 수 있는 것과 영화가 잃어버렸을 것들의 무게를 잠깐 가늠해보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적절했다고 본다. “너무 많이 보여준다. 의도가 불순하지 않은가”라는 평에는 심리적 요인도 있는 것 같다. 극도로 불편한 상황을 그린 장면이라 더 길게 느껴질 수 있다. 공주가 새 생활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몽타주는 3분이 안 되는 길이지만 대신 음악이 효과적으로 쓰여서 감정을 충분히 환기시켰다고 판단했다.

-주인공 이름이 제목이고 배우의 얼굴이 내내 중요한 영화다. 사진을 전공했는데 포트레이트 사진도 좋아했는지 궁금하다. 만약 그렇다면 어느 작가, 어떤 스타일의 인물사진을 좋아했는지도.
=전공은 보도사진이었다. 군 입대 전과 제대 이후 사진이 다르다. (웃음) 입대 전에는 사람을 찍는 작업도 좋아했는데 군대에 다녀온 다음에는 사람이 없는 사진으로 기울었다. 사진 찍히는 인물은 배우가 아니고 그저 내가 주제에 따라 선택한 공간에 있는 사람일 뿐인데 그들이 렌즈 앞에서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고민스러웠다. 그러면서 좋아하게 된 작가는 으젠느 앗제다. 새벽녘 파리 풍경을 많이 찍은 작가인데 사진을 찍어 화가들에게 팔았던 소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이렇게 포트레이트에 대한 억눌린 갈망 탓인지 영화를 하면서는 더욱 사람 얼굴을 찍게 됐다. (웃음) 영화 촬영은 사전에 약속된 작업이고 인물이 배우라 내가 다가가기 쉽다. 클로즈업 인물사진 보는 걸 좋아했지만 여전히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조심스럽다.

-클로즈업 이야기를 하다보니 <가장 따뜻한 색, 블루>를 보았는지 궁금해진다.
=영화는 기대만 못했지만 주연배우 아델 엑사르코풀로스가 정말 사랑스러웠다. 콧물을 아무렇지 않게 슥 훔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어떻게 찍힐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만 나는 연기자예요”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홍재식 촬영감독과 어떤 원칙을 공유했나.
=리듬감을 가장 크게 생각했다. 지루해질 여지가 많은 이야기라 촬영, 편집, 테이크 내에서 리듬을 살리려고 했고 사전 콘티도 있었지만 매일 글 콘티를 새로 썼다. 단편부터 주로 핸드헬드로 찍었다. 내 영화의 핸드헬드 촬영은 거친 ‘들고 찍기’가 아니라 들고 찍었는지 삼각대에 올리고 찍었는지 확연히 구분할 수 없는 선에 걸려 있다.

-<한공주>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은 전학 온 공주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선생님 어머니’ (이영란)다. 그녀는 공주와 딱히 관계없는 디테일이 많이 부여된 조역이다. 불륜의 연애를 하는가 하면 덕분에 린치를 당하지만 맞고 나서도 “돈도 없는 것들이 폭력을 휘둘러?”라고 비웃는다. 무뚝뚝한 공주도 그녀에게만큼은 사근사근하다. 공주와 이 인물의 관계에 극적으로 어떤 의미를 두었나.
=아마 편의점 일을 하면서 터득한 처세일 텐데 공주는 잘 보여야 할 상대한테는 눈치 빠르게 굴고 친구들에겐 쌀쌀맞다. 똑똑한 거다. 선생님 어머니는 가장 현실적인 대사를 말하는, 우리와 가장 닮아 있는 인물이다. 다수에게 압박받는 처지는 공주와 비슷하지만 그녀는 맞고 와서도 당당하다. 심지어 불륜을 저질렀으니 가해자인데도 주눅들지 않는다. 돈과 힘을 갖고 있으면 사소한 잘못은 죄가 아닐 수 있는 게 현실이다. 피해자이면서도 몰려 있는 공주는 그 광경을 보며 혼란을 느낄 것이다.

-새 학교에서 공주에게 다가오는 친구 은희(정인선)가 보이는 관심은 상식 이상이다. 이성애적 관계의 폭력성과 대비되는 소녀들끼리의 관계를 보여주려고 했나 싶을 정도다.
=동성애적 코드는 아니다. 내 대답은 은희는 착한 아이이며 스스로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며 공주의 재능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누군가를 보면 세상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나.

-문제의 집단 폭행 장면을 어떻게 찍을 것인가가 무거운 과제였을 것이다. 어디에 카메라를 세우고 무엇을 보여주고 보여주지 않을지.
=이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뒤 하지 말아야 할 것들, 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생각했다. 기존 영화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노출이나 폭력 묘사가 화제가 되지 않도록 최소화하고 싶었고 액션보다는 리액션으로 표현하려는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조금 의아한 숏들이 있다. 하나는 카메라가 여러 인물이 모여 있는 사건 현장을 천천히 둘러보다가 오른쪽 구석에 이르러 진행 중인 폭행을 보여주는 숏이다.
=문제의 광경을 보여주기 위해 팬을 했던 게 아니라 공간 전체를 보여주기 위한 방법이었다. 다가가기도 컷으로 나누기도 어려우면서 거리감이 필요한 장면이었고 오해의 소지도 많아서 고민 끝에 벽에 달린 선풍기의 시점으로 카메라를 움직인 것이다.

-두 번째는 가해자 중 한 인물의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나가는 고속 촬영 숏이다. 일어선 소년들 틈으로 아랑곳없이 진행되는 폭행 광경을 잠시 카메라가 쳐다보는 순간이 비현실적이면서 특정한 의도가 있어 보였다.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지속되는 행동을 통해, 이들이 가진 상식을 넘어서는 극단적인 면모를 드러내려고 했다. 또 벌어지고 있는 일을 내버려둔 채로 자기 아들만 데리고 나가는 어른의 행동도 보인다.

-가해자들은 인물로서 어떻게 그리려 했는가.
=무엇이 옳고 나쁜지는 알면서도 나약해서 군중심리에 휩쓸린, 그래서 가끔은 인간적이다가 가끔은 동물적인 모습을 생각했다. 그들이 쓰는 고릴라 탈에는, 반은 인간이고 반은 동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현실의 또 다른 ‘공주들’에게

-여러 인터뷰에서 <한공주>라는 제목이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 주인공 이름과 일치하는 건 우연이라고 밝혔지만 참 공교롭다. <오아시스>의 공주(문소리)도 극중에서 성폭행을 당한 인물이고, 이창동 감독의 다른 영화 <시>는 공주가 겪은 일과 유사한 사건에 눈길을 준 이야기가 수렴하는 윤리적 자문을 담은 이야기였다.
=성은 바꿔봤지만 다른 이름은 떠올릴 수 없었다. 정말 우연이지만 관객이 어떤 연관을 본다면 그것도 나름대로 맞다고 생각한다. 굳이 연결시키자면 내가 연출부를 한 허진호 감독님과 이창동 감독님이 모두 박광수 감독님 연출부 출신이니까 선이 닿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뵌 적은 없다. 그분이 인물을 보는 시선과 이야기하는 관점을 정말 좋아한다. <시>를 보면 양미자(윤정희)가 시상을 떠올리려고 손날로 눈에 차양을 치고 유심히 사물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 모습이 실제로 이창동 감독님이 뭔가를 응시할 때 취하는 자세가 아닐까 짐작한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영화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다.

-영화제를 통해 문화가 다르고 성범죄 인식, 피해자에 대한 태도가 다른 국가들의 관객을 만났는데 각각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목이 있었나.
=미국 팜 스프링스에서는 법 실태에 대한 관심과 문제제기가 많았다. 어느 미국 관객은 상영 뒤 내게 다가와 “다음 기회에 법에 집중해서 만들면 더 좋은 영화가 나올 것 같다”고 조언하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가해자 부모들이 공주의 교실에 난입하는 장면을 보고 경악하며 프랑스에서는 코미디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말을 하더라. 그러나 국적을 불문하고 많은 관객이 감정을 이입하고 눈물을 흘렸다.

-<한공주>의 마지막 이미지는 관객의 해석, 소망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지만, 연출된 방식만 보면 환상으로 보인다.
=CG 디테일이라든가 좀더 타이트하게 잡힌 숏을 쓸 수 없었던 제작환경의 영향이 있었다. 결국 재촬영을 할지 현재의 결과대로 갈지 고민을 하다가 이쪽을 택했다. 영화가 끝난 다음부터 사유가 시작되는 영화가 되길 바랐던 애초의 동기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내게 공주는 분명 살아 있다. 누군가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현실의 또 다른 ‘공주들’의 생사는 영화가 끝난 다음부터 나뉘는 거라고 생각했다. 마지막 응원의 목소리는 캐스트 전원이 다시 모여 후시녹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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