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규 감독의 <역린>이 월 일 개봉한다 드라마와 영화가 사랑했던 왕 정조를 다시 스크린에 되살린 이 작품은 퓨전 사극 열풍을 지나 당도한 오랜만의 정통 사극이다 본격적인 한국 사극 블록버스터 경쟁의 포문을 열어젖힌 이 작품의 면모와 영화를 보기 전 더불어 알아두면 좋을 정조 시대의 역사적 인물들을 함께 소개한다.
민초를 닮은 왕. 최근 몇년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주목할 만한 왕의 캐릭터는 그런 것이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한석규)은 “지랄”과 “우라질” 같은 서민의 말을 스스럼없이 쓰는 왕이었고,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의 하선(이병헌)은 매화틀에 용변을 보는 모습까지 공개했으며 <후궁: 제왕의 첩>의 성원대군(김동욱)은 신하들 앞에서 중전과 사랑을 나눠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씨돼지’에 비유하는 마음 약한 왕이었다.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곤룡포를 입고 나라의 명운을 결정하는 자도 한낱 백성과 다르지 않은 인간적인 면모를 가졌다는 점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캐릭터가 환영받기 시작했다”라는 박상연 작가의 말처럼, 더이상 한국 사극영화 속 왕들은 자신이 원하거나 원하지 않는 것을 대의명분 때문에 감추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나 4월30일 개봉을 앞둔 영화 <역린>의 정조(현빈)는 다르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적인 약점을 드러낸다는 건 정치적 자살행위에 가깝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노론파가 정조의 빈틈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적들을 위협할 만큼의 힘을 드러내는 것도 금물이다. “무리하면 역풍을 맞는”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런 정조가 할 수 있는 것은 무관도 버티기 힘들 만큼의 모래주머니를 몸에 달고 남몰래 수련하거나 밤새워 책을 읽으며 이후를 대비하는 것이다. <역린>이 정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지도자는 <용의 눈물>의 이방원(유동근) 같은 과거 사극의 카리스마 넘치는 왕도, <광해> 같은 최근 사극의 친근하고 정의로운 왕도 아니다. 즉위 1년, 언젠가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만성적으로 시달리며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내실을 다지는 고단한 젊은 왕이 바로 <역린>의 정조다.
스스로 자신을 구하는 왕
이 영화가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고 알려진 정조의 일대기 중 집권 초기를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역린>은 1777년 음력 7월28일(정조 즉위 1년), 노론파가 정조 암살을 시도했던 그날 왕을 살리려 하는 자와 죽이려는 자, 왕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겪는 24시간에 대한 영화다.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세손 시절부터 ‘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다’는 노론파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던 정조는 환영받지 못한 군주였다. 규모의 세력을 갖지 못한 그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혼사를 통해 세력을 확장하는 노론의 거대하고 유서 깊은 시스템이다. 그러나 영화 속 정조는 온 정성을 다해 사회의 부조리를 하나씩 베어나간다면 세상은 변할 것이라 믿는 낙관주의자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역린>에서 정조의 매력은 <변호인>의 송우석(송강호)과도 닮은 지점이 있다. 훗날 개혁의 아이콘으로 평가될 인물이 어떠한 우여곡절을 거쳐 성취를 이루고 세상을 바꾸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변호인>의 송우석과 달리 <역린>의 정조에게 당장 중요한 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누군가를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구하는 일이다. 결국 어두운 성장 배경을 가진 영웅이 다양한 난국을 하나씩 돌파해나가며 스스로 진정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는 그때가 <역린>이 겨냥하는 카타르시스의 순간이다.
정조가 마침내 자신의 ‘역린’(왕의 노여움)을 드러내기까지, 영화는 당대의 세도가들이 구축한 권력의 시스템이 얼마나 복합적으로 연결되었는지를 조명한다. 왕이 입는 곤룡포에조차 머리를 조아리면서, 정작 왕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궁의 수많은 인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조가 왕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반드시 끌어안아야 하는 자들이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노론 세력에 모욕을 당하면서도 “누구 하나 목 벤다고 쓰러질 나무가 아니다”라고 되뇌이는 정조의 말은 ‘정치가’로서 정조의 고뇌를 대변한다. 이 시스템의 중추에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한지민)가 자리하고 있다. 처소를 찾은 정조 앞에서 치마를 걷고 발톱 손질을 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왕실의 권력자인 그녀는 정조의 최대 정적이다. (어린 나이에 영조와 결혼했기에) 왕과 비슷한 나이 또래인 ‘할마마마’ 정순왕후가 정조의 손을 붙잡고 부드럽게 굴욕을 주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정조가 겪는 가장 치욕스러운 순간이자 <역린>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다.
병렬구조의 인물 이야기
흥미로운 점은 이 잔혹한 약육강식의 궁궐에서 정조가 탈출구를 찾는 방식이다. <뿌리 깊은 나무>의 소이(신세경), <광해>의 중전(한효주)처럼 그동안 왕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에서는 중요한 여성 조력자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역린>의 정조는 이성과의 관계가 완전히 거세된 왕처럼 보인다. 영화 내내 (상복을 의미하는) 하얀 곤룡포를 입고 등장하는 그는 침소를 보전하는 지밀나인 대신 서책을 관리하는 내관 상책(정재영)을 가까이 둔다. 즉위하던 날 신하들에게 던진 첫마디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던 것처럼, 정조의 영원한 트라우마이자 결핍은 ‘아버지’다. 때문에 아버지가 없는 궁궐에서 정조가 유일하게 의지했던 내관 상책은 어머니 혜경궁 홍씨(김성령)보다도 정조에게 애틋한 존재로 비친다. 배우 현빈과 정재영의 담백한 호흡은 유사 부자관계를 형성한 <역린>의 두 인물에 힘을 실어준다.
문제는 <역린>이 이들의 관계에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 영화의 개성이자 위험요소다. <역린>의 모든 등장인물은 다양한 관계로 이어져 있으며 그들은 대개 누군가를 지키거나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한다. 때문에 정조를 비롯한 인물들에겐 나름의 동기와 목적이 있으며 그러한 의도들이 맞부딪혀 발생하는 사건들이 이 영화를 이끄는 원동력이다. 이처럼 <역린>이 지닌 다양한 이야기와 인물의 결은 때때로 가장 핵심적인 장면과 정서에 대한 집중력을 놓치게 만든다. 이를테면 정조가 다양한 사건을 통해 적이었던 인물들을 하나씩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의 쾌감이 덜하다. “<역린>은 원톱영화가 아니다”라고 이재규 감독은 말한 바 있지만, 정조가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가장 관심가는 인물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조라는 인물에 다가가려고 할수록 다른 등장인물에 할애된 플래시백이나 영화적 설정이 완전한 몰입을 방해하는 점은 아쉽다. 말하자면 병렬구조로 인물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여부가 <역린>에 대한 평가를 좌우할 것 같다. 이러한 구조적 방식이 에피소드마다 등장인물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TV드라마에 더 어울릴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지나치게 단정하고 깔끔한
사극영화의 묘미인 의상과 미술, 전통 무기를 활용한 액션은 힘이 있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살수가 이끄는 암살단이 정조의 거처인 존현각으로 진격하는 액션 시퀀스는 최근의 사극영화에서 느끼지 못했던 독특한 인상을 안겨준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암살단과 정조 사이의 거리감이다. 편전(화살의 한 종류)을 꺼내든 정조는 누구도 보지 못하는 어둠 속에 숨어 지붕 위 자객들을 향해 활을 쏜다. 자신의 공간에 칩거하며 반드시 공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만 재빠르게 행동하는 정조의 특성을 반영한 이 액션 시퀀스는 큰 움직임 없이도 적절한 리듬과 긴장을 선사한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러한 거리감이 영화를 본 뒤 느낀 허전함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떤 순간에도 방심하지 않는 정조의 완벽함은 <역린>의 단정한 만듦새와 닮아 있다. 깔끔하고, 친절하다. 그런데 심정적으로 가까워지지는 못했다는 느낌이 든다. 정조라는 인물의 거리두기 때문일까. 혹은 수많은 재단 과정을 거친 영화가 지나치게 다듬어졌기 때문일까. 이건 좀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정조의 적과 동지
<역린>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허구 인물들
<역린>은 정조 시대의 실존 인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영화다. 정조를 스쳐지나간 인물이든 그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든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이덕일 사학자의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참조한, <역린> 주요 등장인물에 대한 소개다.
실존 인물
구선복 “지금 구선복을 건드리면 오군영이 다 일어선다.” 영화에서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노론파의 대표적인 무장이었던 구선복은 왕조차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으나, 정조는 구선복의 군사들이 일어설 것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관직을 주되 같은 직책에 오래 있게 하지 않았다. 결국 정조 시절 역모사건에 휘말려 아들, 조카와 함께 처형당했다. 영화 속 대사 “ 내가 오른손 하나만 들면… 이 나라 군사 팔할이 움직인다.”
홍국영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 정조의 정적인 정순왕후와 친척지간이었던 보기 드문 배경을 가진 남자. 노론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정조의 오른팔이 되길 선택했다. 사실상 정조 시대는 “정조와 홍국영의 공동정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활약을 펼쳤다. 야망이 지나치게 컸기에 결국 정조의 견제를 받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영화 속 대사 “ 저 인간들이 전하의 세손 시절 어떻게 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밀리면! 죽어요!”
정순왕후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의 계비로, 정조 가문 최대의 정적 중 한명.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를 뒤주에 가둬 죽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천주교 탄압의 중심에 있었다. 영화 속 대사 “ 내가 엎어라 하면… 엎어지는 것이냐?”
혜경궁 홍씨 정조의 어머니. 남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굶어죽는 비극적인 사건을 겪었다. 영조가 당시 세손이던 정조를 첫째아들 효장세자의 양자로 들이는 바람에 아들을 빼앗길 위험에 처하기도. 이후에 사도세자의 죽음과 자신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한중록>을 집필했다. 아들 정조보다 15년을 더 살았다. 영화 속 대사 “ 지아비를 제물로 바치고 살린 아들이다… 아느냐?”
월혜 영화에서 왕의 의복을 담당하는 세답방 나인으로 출연한다. 정조 시대에 존재했던 강월혜라는 궁중나인에게서 모티브를 얻은 인물. 그녀는 당시 정조 암살 사건에 가담했다고 알려진다. 영화에는 그녀의 짧은 로맨스도 포함되어 있다. 영화 속 대사 “우리 같은 것들은 그냥 불쏘시개로 쓰고 버리면 끝인가요? 저는요… 이 궐이… 당신들 모두… 너무 싫습니다.”
허구의 인물
상책 정조의 서책을 담당하는 내시. 사도세자의 죽음 뒤 정조가 노론 세력에 외롭게 맞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며 함께 자랐다. 정조에겐 친구이자 아버지 같은 존재. 영화 속 대사 (넌 왜 내시가 되었느냐?) “누군가를 살리고 싶었거든요.”
광백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살수를 무자비한 킬러로 키웠다. 살수에게 정조 암살을 명한다. 영화 속 대사 (누구 모가지요?)“왕모가지.”
살수 왕을 죽이려는 자. 광백에게 비인간적인 훈련을 받고 킬러로 자라났다. 그러나 선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영화 속 대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