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왜 그들은 ‘기레기’가 되었나
2014-05-22
글 : 변성찬 (영화평론가)
한국 언론에 대한 차가운 분노를 담은 태준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슬기로운 해법>

언론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의 언론은 탁하다 못해 아무것도 제대로 비추지 못하는, 쓸모를 잃은 거울이다. 아니, 깨진 거울이다. 역설적으로 아무것도 비추지 못한다는 사실만이 이 사회가 얼마나 정체되고 부패해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언론마저 권력에 줄서기하느라 바쁜 작태를 보며 상식이 있는 이라면 분노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조차 귀찮고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다 보니 점점 더 부끄러워져 결국엔 모두 입을 다물고 만다. 이제 귀를 열고 입을 뗄 때가 왔다. 뭐든 첫걸음이 힘들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작은 수고와 용기가 필요하다. 여기 기꺼이 그 수고와 용기를 내어줄 당신 앞으로 대한민국 언론 생태보고서가 한통 도착했다. 일단 보고 이야기하자.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착각해왔던 굳은 머리를 깰 때다.

한국의 언론, 그중에서도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이 더이상 ‘공기’(公器)라기보다는 특정한 이념집단의 ‘기관지’ 또는 ‘아니면 말고’ 식의 태도로 양산되는 ‘찌라시’에 불과하다는 것은, 더이상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언론의 힘이 필요했던 순간에 기자들에게 현장에서 나갈 것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그리하여 (기자와 쓰레기가 합성어인) ‘기레기’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는 것은, 한국 언론이 앓고 있는 질병의 심각성을 웅변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한 네티즌의 말처럼, 세월호 참사는 ‘언론 대참사’이기도 하다. 이것이 단지 우리의 주관적 체감만은 아닌 것 같다. ‘국경 없는 기자회’에서는 매년 각 나라의 언론자유지수를 매겨 순위를 부여하고 있는데, 2014년 한국 언론은 세계 57위를 기록했다. 2008년 이후 ‘조중동’이 마음껏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동안, 한국의 언론자유지수는 그들이 마치 언론 탄압의 주범처럼 몰아세웠던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의 31위에서 무려 26단계나 강등되었다. 문제는 우리 모두가 이 참담한 현실에 대해 절망과 분노를 느끼고는 있지만, 그 현실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하지만 불길한 예감(또는 체념)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데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라는 질문, 이것이 <슬기로운 해법>의 출발점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세 가지 오보

<슬기로운 해법>은 오프닝에서 한국 언론의 세 가지 ‘오보’ 사례를 제시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2012년 <조선일보>의 태풍 ‘카눈’ 관련 기사에서의 오보, 2009년 <중앙일보>의 철도노조 파업 기사에서의 오보, 그리고 <조선일보>의 2004년 당시 대통령이던 노무현의 측근 비리 수사 관련 기사에서의 오보가 그것이다. 세 가지 모두 명백한 오보였고, 이후 해당 언론은 사과문 또는 정정 보도를 했다. 좀더 생생한 이미지 전달을 위해서 2012년의 태풍 ‘카눈’ 보도에 2009년의 태풍 ‘모라코’ 때의 사진을 가져다 쓴 <조선일보>의 오보는, 차라리 애교에 가까워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측근 비리 수사에 불만을 품고 송년회 술자리에서 “(내가 마음만 먹었으면) 검찰 두번은 갈아마셨겠지만…”이라고 말했다는 <조선일보>의 선정적인 카피 뽑기는, 노무현 대통령 취임 첫날부터 그가 퇴임 뒤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보았던 수구보수언론의 ‘노무현 죽이기’ 행태의 한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 이 두 오보는 즉각 해당 언론이 사과문 또는 정정 보도를 내면서 해프닝이 되었고, 그렇게 지나갔다.

문제는 2009년 <중앙일보>의 철도노조 파업 관련 기사에서의 오보다. 철도파업이 마무리되어가던 2009년 12월4일, <중앙일보>는 1면 톱으로, “파업으로 열차 멈춘 그날, 어느 고교생 꿈도 멈췄다”라는 표제하에, 한 고등학생이 철도파업 때문에 서울대학교에 면접을 보지 못했고 그로 인해 진학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싣는다. 기사가 주장한 시간에 철도는 정상운행 중이었고, 철도파업과 문제의 학생이 면접을 보지 못한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철도노조는 언론중재위원회에 조정 신청을 한 지 2년이 지나고 나서야 <중앙일보>로 하여금 정정 보도를 내도록 할 수 있었다. 파업투쟁 패배 뒤 철도노조는 200명의 해고, 1만2천명의 징계, 100억원의 손해배상을 얻었고, 파업이 끝나던 날 철도공사 사장은 “언론 덕분에 승리했다”는 말을 남겼다. 2년 동안의 긴 싸움 끝에야 얻어낼 수 있었던 정정 보도로 인해 이 오보는 (기억할 만한) 해프닝조차 될 수가 없었다. 아마 그런 소설 쓰기에 가까운 날조 기사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당사자인 철도노조를 제외하면 알거나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슬기로운 해법>은 그 사실을 기억하고 있는 몇명 중 한 사람인 태준식 감독이 만든 영화다. 또는, 2년에 걸쳐 발생했던 낱낱의 사실을 한데 모아 편집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의 영화다.

태준식은 1995년부터 2003년까지 8년 동안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활동했다. 이후 개인 제작자로 활동해온 그의 작품은 크게 두 가지 계열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1999년 450일간의 현대중기 노동조합의 고용승계투쟁을 담은 <인간의 시간>(2000)에서부터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목숨을 건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담은 <당신과 나의 전쟁>(2010)에 이르는 ‘노동다큐멘터리’ 연작이다. 또 다른 하나는 2000년부터 시작된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의 상징인 방송사 비정규노동조합 주봉희 위원장의 삶을 담은 <필승 ver. 1.0 주봉희>(2003)에서부터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삶을 담은 <어머니>(2011)에 이르는 ‘인물다큐멘터리’ 연작이다. 태준식은 패배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담으면서도 늘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호소해왔고,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을 카메라에 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이유가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해왔다. <슬기로운 해법>은, 태준식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이라는 그 특유의 정신과 태도로 만들어낸, ‘본격 언론 해부 다큐멘터리’다. 감독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이 영화는 “대한민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삼각동맹(언론, 정치, 자본)에 대한 감독의 첫 번째 분노 폭발이다”.

공적 언론이 아니라 사적 기업이다

‘분노 폭발’이라고 말했지만, 영화는 전체적으로 분노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낮추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슬기로운 해법>은 뜨거운 만큼이나 휘발성이 강한 감정에 호소하기보다는, 차분한 논리로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하는 영화다. 달리 말하자면, 낱낱의 사실들이 갖고 있는 선정성보다는, 그 사실들의 연관성을 통해 문제의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데 주력하고 있는 영화다. 그 전체적인 그림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언론도 ‘기업’이라는 ‘간단하고 명료한 사실’이다. 한국의 언론은 그 자신이 자산의 70~80%를 부동산의 형태로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 재벌이자, 국내 최고의 재벌기업( ‘언론 앞의 절대자’ )으로부터의 광고 수익 및 지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기업이다. 보수언론의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대한 이념적 헌신성은, 사실 자신의 이해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거나 허울 좋은 포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해법>은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짐작하고 있을) 이 ‘간단하고 명료한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영화다. 또는, 문제의 ‘구조적 원인’에 대한 인식이 단지 “세상은 원래 다 그래”라는 체념의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절절하게 호소하고 있는 영화다. <슬기로운 해법>에 ‘간단하고 명료한 해법’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슬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담겨 있다. ‘슬기로운 해법’은 원래 2009년 노무현의 사법처리를 위해 <중앙일보>가 연재한 기획기사의 제목이었다. 그 기사는 점잖아 보이는 제목과는 달리, 온통 증오와 냉소의 감정만을 드러내고 있는 마녀사냥의 수사로 점철되어 있었다. <슬기로운 해법>은 이 말의 오염으로부터 ‘슬기’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 그것을 되돌려주기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것을 어떻게 되돌려받을 것인지는, 관객인 우리에게 달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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