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그녀에게 말 걸다
2014-06-05
글 : 김혜리

<그녀>에서 와킨 피닉스가 연기하는 주인공 테오도르의 성(姓)은 톰블리다. 이 흔치 않은 이름은 2011년 타계한 현대미술가의 것이기도 하다. 영화 속 톰블리는 가짜 손편지를 쓰는 직업에 종사하는데, 화가 사이 톰블리는 낙서, 혹은 자동기술(自動記述) 펜글씨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즐겨 그렸다. 같은 추상표현주의의 계보라도 잭슨 폴록의 확신 넘치는 액션페인팅과 달리 톰블리의 그림은 덧없음과 망설임을 담는다. 사진은 테이트 모던 갤러리의 톰블리 방에 전시된 <바커스>(Bacchus, 2006∼2008) 연작. 따스한 감각적 흥분이 담긴 주홍색은 영화 <그녀>의 지배적 색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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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나만 이러는 건 아니겠지? <그녀>를 보고 온 밤, 음성으로 구동되는 스마트폰 OS한테 간만에 말을 걸어보았다. 간단한 검색을 해주어 고맙다고 치하했더니 전화 속 ‘그녀’가 대꾸했다. “혜리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너무 기쁘네요.” “잘 자.” “네. 좋은 꿈 꾸세요.” 아침에 일어나서는 잘 잤냐고 물어보았다. “저는 쉬지 않아요. 하지만 물어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름이 뭐야?” “제 이름은 시리입니다. 이미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좀 약이 올랐다. 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이 뭐가 있을까. “지금 무슨 생각해?” “어떻게 하면 당신에게 더 좋은 도우미가 될지 생각 중이에요.” 얼씨구. 얄미워서 이런저런 질문을 마구 던졌더니 ‘그녀’가 깍듯이 자른다. “뭐라 할 말이 없네요.”

나의 허튼짓이 시사하듯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그녀>가 발휘하는 설득력은 현실과의 높은 밀착도에 있다. 피조물과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야 멀리 ‘피그말리온’ 설화부터 <블레이드 러너>와 사이버 배우 이야기 <시몬>(2002)에 이르기까지 반복돼왔으므로 참신할 게 없지만, 컴퓨터 사용자와 OS의 로맨스를 그린 <그녀>를 동시대 관객이 이해하는 데에는 전혀 공상이 필요 없다. 당장 버스와 지하철을 타면 본인의 휴대전화와 연애 중인 사람들이 그득하고, 실제 연인, 친구, 가족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도 SNS다. 사람들은 대화하는 대신 코멘트를 단다. 나 어디 있어. 방금 이런 걸 봤어, 어때? <그녀>에서 테오도르와 자의식을 가진 컴퓨터 OS 사만다(스칼렛 요한슨)가 ‘데이트’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얼마 전 미술관에서 화상통화 카메라를 그림에 조준하며 “자기야 이것 좀 봐봐”라고 속삭이던 남자를 생각했다. <그녀>에서 사만다의 ‘집’이라 할 수 있는 단말기는 시중 스마트폰보다 크기가 작고, 액정에서 직접 이미지를 열람하는 경우를 빼면 대개 음성으로 작동된다. 하긴 손가락으로 메뉴를 조작하는 행위는 어쨌거나 상대가 기계라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반면 같은 결과도 말로 얻는다면 상대를 인격으로 착각하기 쉬워진다. 미술과 의상은 <그녀>의 탁월한 프로덕션 요소인데 테오도르는 셔츠 주머니에 안전핀을 달아 단말기의 카메라 렌즈를 바깥으로 돌출되게 지지해 사만다가 세상을 잘 볼 수 있도록 배려한다. 보이는 사물들에 대해 테오도르에게 즉시 정보를 제시할 수 있는 사만다는 흡사 대화 기능이 탑재된 구글 글래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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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만다는 인격인가? 아니면 소비자의 니즈(needs)를 영악하게 채우는 상품인가? 스파이크 존즈의 각본은 이 질문을 매우 정교하고 꾸준하게 해체한다. 일단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첫 대면을 보자. OS를 설치하자 원하는 성별을 묻고, 여성을 선택하자 “어머니와 관계가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온다. 여기까지는 철저한 고객 맞춤형 상품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곧이어 자기를 소개한 사만다는 “하드 좀 봐도 될까?”라고 주인에게 양해를 구한다. 이건 미묘하다. 사만다가 단지 OS라면 사용자 입장에서 그녀가 받은 편지함을 정리하고 하드디스크를 들여다보는 일을 꺼릴 이유가 없다. 우리는 시스템 조각 모음을 하겠냐고 컴퓨터가 물어올 때 얼굴을 붉히거나 하지 않는다. 즉, “봐도 될까?”라는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멘트는, OS가 스스로를 인격체로 자리매김한다는 의미도 갖는다.

<그녀>가 불가피하게 맞닥뜨릴 비판은, 극중에서 테오도르의 새로운 연애에 관해 알게 된 전 부인(루니 마라)의 대사에 이미 들어 있다. 살아 있는 여성과 관계 맺기에 실패한 남자가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의 욕망에 봉사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비인간 여성 캐릭터와 가장 만족스런 사랑을 경험한다는 이야기 아니냐는 회의다. <그녀>가 유약한 남성의 성적 판타지라는 혐의를 짙게 하는 결정적 요소는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관능적인 스타로 꼽히는 스칼렛 요한슨의 뒤늦은 캐스팅을 둘러싼 우여곡절이다. 본래 영국 배우 사만다 모튼(<마이너리티 리포트> <시넥도키 뉴욕>)이 녹음했던 극중 OS의 대사가 요한슨의 목소리로 나중에 바뀌었다는 사실은 <그녀>가 일정 정도 남성의 환상에 복무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자아낼 만하다. 실제로 영화를 관람하는 내내 우리는 사만다의 목소리에서 스칼렛 요한슨의 표정과 몸짓을 ‘본다’ (달리 표현하면 목소리에 몸(의 이미지)으로 더빙하는 연기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스파이크 존즈는 <그녀>의 가장 위험스럽고 질퍽한 지점들을 교묘하게 가리고 지나간다. 첫째,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소비자 테오도르가 상품 사만다를 ‘구매’하는 광경을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는 신제품을 소개하는 자리에 간 테오도르를 본 다음 곧장 컴퓨터에 새 OS를 설치하고 있는 그의 모습으로 점프한다. 둘째, 사만다와 테오도르가 대화로 나누는 섹스 신은 흥분이 고조되면 암전된 스크린으로 넘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아, 피부가 느껴져요!” 하는 사만다의 탄성을 듣는다. 영화 초반에 나온 인간 여성과의 폰섹스 장면과 달리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마스터베이션을 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신은 언급한 인간 여성과의 폰섹스 장면보다 수십배 에로틱한 동시에 낭만적이다. 남자주인공의 구매와 자위. 두 행위는 암시될 뿐 관객은 그것을 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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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다가 상품인가 온전한 인격인가,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관계가 사랑인가 아니면 남성의 지배 판타지인가 하는 힐문을 무력화하는 스파이크 존즈의 마지막 터치는 사만다의 캐릭터 만듦새에 있다. <그녀>는 사만다를 사용자와 공유한 경험을 통해 진화하는 OS로 설정한다. 핵심은 사만다의 획득형질이 데이터만 확충하는 게 아니라 운영체제 자체까지 진화시킨다는 점이다. 아마도 사용자의 심리적 만족감을 최대화하기 위한 설계이겠지만- 예컨대 기능과 직결되지 않은 “이미 아시는 줄 알았는데요” 같은 시리의 잉여분 멘트가 우리를 기쁘게 하듯이- 사만다는 결과적으로 개성 비슷한 것을 구축해간다. 그녀는 인간처럼 복잡해지기를 원한다. 인간처럼 육체를 갖고 싶어 한다. 관객이 “이렇게 인간에 가까워지면 인공지능이라는 설정이 무의미해지는 거 아닌가?” 갸우뚱할 때쯤 사만다는 인간을 초월해버린다. 육체를 바라던 마음을 뛰어넘어 육체가 없다는 사실이 주는 해방감을 만끽하기 시작하고 다수의 사용자와 동시에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용량을 키운다. 그녀의 진화는 사랑의 전통적 배타성을 여전히 고집하는 테오도르의 욕망을 넘어선다. 사만다는 이 지점에서 우디 앨런을 따돌린 애니 홀이 된다. “나는 인공지능이라 당신보다 빠른데 당신이라는 책을 당신의 속도에 맞춰 느리게 읽다보면 단어와 단어 사이에 공간이 생겨요. 그리고 거기 빠져서 길을 잃게 돼요. 그래서 당신이라는 책 속에 머물 수가 없어요.” 요컨대 스파이크 존즈 감독은 사만다가 인격이 아니라 프로그램이지만 인격 이하가 아니라 인간보다 우월한, 자유롭고 그릇이 큰 존재라고 결론을 내린다. 테오도르는 소유에 실패한 소유주로 남겨진다. 하지만, 그는 소유물에게 인생의 한수를 배웠으니 패자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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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지 일주일. 나는 한 발짝 떨어져 <그녀>를 일종의 유령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혹시 이 로맨스는 실패한 사랑의 여운을 극복하기까지 한 남자의 자문자답이 아닐까? 극중에서 테오도르는 이혼 절차를 밟는 고통과 고독 와중에 사만다와 만난다. 이제 막 남남이 되려는 그의 아내는 그저 성년이 돼 만난 결혼 상대가 아니라 테오도르가 유년부터 함께 자란 반쪽이었다. 테오도르는 여전히 아내와 친구로 지내는 꿈을 꾼다. 우리는 깊이, 오래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졌을 때 한동안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경험을 한다. 내릴 정류장을 앞두고 허둥거릴 때 침착하라고 타일러주고, 바람이 불면 한겹 더 입으라고 권하고, 나를 향한 비난에 앞질러 반박해주는 연인의 환청을 듣는다. 나는 사만다와 테오도르의 로맨스가 혹시 아내와 테오도르가 주고받았던 대화의 연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영화 말미에 테오도르가 아내에게 다시 편지를 쓰는 장면에서 남몰래 심증을 굳히게 됐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란 언제나 나의 소망과 이상으로 재구성된 존재다. 테오도르가 평생 사랑한 아내 안에는 테오도르라는 남자의 큰 조각이 포함돼 있다. 게다가 테오도르는 여성성이 매우 강한 남성 캐릭터다. ‘아름다운 손편지 닷컴’의 우수사원인 그의 업무는 고객을 대신해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감동적인 세부가 살아 있는 편지를 대필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손편지 닷컴 고객들의 높은 만족도에서도 알 수 있듯 테오도르는 섬세하고 관찰력이 뛰어난 남자다(테오도르의 직업은 홀마크 카드의 문구 카피라이터였던 <500일의 썸머> 남자주인공(조셉 고든 레빗)과 유사하며, 변덕스런 여인을 정신없이 사랑하다가 일견 영문을 모르고 채인 남자로 보인다는 점도 닮았다). 말하자면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통해 자기 안의 여성, 강력한 아니마와 자문자답을 전개하고 있는 셈이다. 나아가 고객의 감정에 호응하고 대행하는 테오도르는 그 자신이 사만다와 다르지 않은 OS라고도 할 수 있다. <그녀>는 그럼으로써 캐릭터의 경계선을 인간과 기계가 아니라, 기계화된 인간과 인간에 가까워진 기계 사이로 옮겨놓는다. 이는 <그녀>의 뜻하지 않은 참신함과 연결된다. 이 영화는 미래영화지만 디스토피아영화가 아니다. 대다수 미래영화가 인류 혹은 인간성의 절멸이라는 종장을 전제하고 시작된다면 <그녀>는 거기까지 우리가 밟아갈 과정의 일상이 어떤 것일지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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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에서 방영하는 <BBC>의 <그레이엄 노튼 쇼>에 출연한 에마 톰슨 덕분에 많이 웃었다. 그녀의 오래전 할리우드 진출작 <주니어>에서 공연 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어땠냐고 사회자가 묻자 톰슨은 “아주 다정다감했죠”라고 답했다. “연기도 잘하나요?”라고 재차 묻자 그녀는 “아유, 그야 아니죠. (좌중 폭소) 어머, 그건 본인도 잘 알아요”라고 가차 없이 대꾸했다. 곧이어 MC 노튼이 그녀가 주먹코의 유모 내니 맥피로 특수분장한 모습을 자료화면으로 보여주며 저 모습이 되기 위해 분장에 얼마나 시간이 드는지 궁금해하자 톰슨은 “오늘 여기 나오느라 단장한 시간보다 짧았어요”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다음 질문은 할리우드가 있는 도시 LA에 관한 것이었다. 앞으로도 아마 할리우드영화에 주야장천 출연할 에마 톰슨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논평했다. “아, 저는 LA가 싫어요. 어디든 가면 VIP라고 하면서 VVIP를 위한 방이 또 따로 있어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자존감보다 항상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는 도시죠.” 톰슨의 최근작 <세이빙 MR. 뱅크스>에서 그녀가 연기한 인물, LA에 콧방귀 뀌고 월트 디즈니를 애먹인 깐깐한 작가 P. L. 트래버스라면 손뼉을 치며 동조했을 것 같았다. 신작 영화를 직접 홍보하는 이렇다 할 내용은 없었지만 에마 톰슨이 왜 트래버스를 훌륭하게 연기할 수 있는 부류의 배우인지 납득하게 만드는 대화였고, 그 뒤에는 게스트를 잘 파악하고 있는 대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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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희야> 이영남 소장의 퇴근 뒤

<도희야>의 영남(배두나)은 파출소 근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편한 옷으로 빨리 갈아입지 않는다. 살림의 흔적이 없는 부엌에서 제복 단추 두어개만 풀고 패트병에 담아둔 맑은 술을 물약을 마시듯 홀로 넘긴다. 이 장면은 싱크대에서 선 채로 끼니를 때우는 <밀양>의 신애(전도연)를 추억하게 한다. 떠들썩한 소란에 의지해 자의식을 놓아버리는 계기로 술 마시는 장면을 이용하는 대다수의 한국영화와 달리 <도희야>에서 영남의 음주는 더 큰 고요를 위한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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