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이미지 헌터 마이클 만을 다시 만나라
2014-07-10
글 : 장병원 (영화평론가)
‘포스트 누아르 혹은 패닉 시네마, 마이클 만&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들’ 상영전을 통해 보는 마이클 만의 과소평가된 걸작들
2004년 <콜래트럴> 촬영현장에서 마이클 만 감독이 주연배우 톰 크루즈, 제이미 폭스(왼쪽부터)와 대화하고 있다.

무더운 여름을 블록버스터로만 버틸 순 없지 않나. 블록버스터로는 도저히 얻기 어려운, 짜릿한 쾌감의 영화들이 여기 있다. 이름하여 ‘포스트 누아르 혹은 패닉 시네마, 마이클 만&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들’ 상영전이다. 부산 영화의 전당이 7월3일부터 23일까지 두 감독의 영화를 묶어 상영한다. 여름에 제격이다. <씨네21>은 그중에서도 마이클 만의 세계에 집중했다. 그의 영화들이 성취한 것에 비해 저평가된 인상이 짙기 때문이다. <비정의 거리> <맨헌터> 등 국내 미개봉했거나 개봉했어도 큰 관심을 얻지 못했던 그의 뛰어난 초기 걸작에서부터 개봉 당시 받았던 지지보다 더 뜨거운 지지를 받아 마땅한 <콜래트럴> <인사이더> <마이애미 바이스>에 이르기까지, 재평가되어야 할 마이클 만 영화세계의 진수에 대해 말한다.

<비정의 거리>

‘마이클 만의 과소평가된 걸작’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이 글의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해둘 것이 있다. 마이클 만은 미국영화의 전통 안에서 가장 저평가된 작가 중 한명이며, 따라서 그의 영화들 대다수가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시즈, 스티븐 스필버그 같은 동료 감독들이 얻은 명성에 비해 만의 영화가 지닌 미국 안에서의 지위만 보더라도 이와 같은 사정은 명확해진다. 대다수의 동년배 감독들이 1970년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발흥과 더불어 경력을 시작한 반면, 마이클 만은 정치다큐멘터리에 몰두하다 1981년이 되어서야 장편 데뷔작 <비정의 거리>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그가 영화계에 발을 들였던 1980년대 초는 1960년대 말부터 미국영화의 체질을 근원적으로 바꾸어놓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모험과 활기가 사라지고 테크놀로지와 스케일을 앞세운 가족 오락의 형식으로 영화의 위상이 변모하던 시기였다. 기이하게도 만의 영화는 1980년대 초입에 1960년대적인 테마를 재론(再論)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이유 때문에 만의 영화가 늦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만은 이전의 미국 작가들이 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그만의 우주를 만들었다. 따라서 이 글의 테마는 ‘어떻게 마이클 만이 고유한 스타일로 과거의 미국영화를 갱신하였는가?’가 될 것이다.

<인사이더>

목표를 향한 투쟁

마이클 만의 필모그래피에서 덜 조명된 영화들은 2000년대 이전 작들이다. 특별히 <비정의 거리>와 <맨헌터>(1986), <인사이더>(1999)를 언급하고 싶다. 이 영화들은 시대의 조류와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문명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이라는 마이클 만적인 주제의식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암시를 준다. ‘포스트 누아르’라는 레토릭을 입히기 전까지 만의 영화는 자본주의의 병폐와 소외, 타락상에 대한 급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의 초기작들에서는 1960년대 신좌파 자유주의 운동의 이상을 영화적으로 실천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비정의 거리>의 금고털이 전문가 프랭크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탐욕스런 자본가에게 항거하는 노동자처럼 묘사되고 있으며, <인사이더>의 TV다큐멘터리 <식스티 미니츠>의 프로듀서 로웰 버그만, 화학자 제프리 위건드는 악덕한 자본의 논리에 맞선 투사로 묘사된다.

정치학적인 관점에서 마이클 만의 영화는 대의를 저버리지 못하는 고립된 개인의 투쟁을 다룬다. 지난 30여년간 그는 꾸준히 남자 이야기를 해왔고, 마초 남성들의 유대라는 고전적 이상에 강박된 영화를 만들어왔다. 이러한 주제는 초기작뿐 아니라 <히트>(1996)와 <콜래트럴>(2004), <마이애미 바이스>(2006)를 관통한다. <비정의 거리>의 금고털이범 프랭크에서부터, <맨헌터>의 FBI요원 윌 그레이엄, <인사이더>의 프로듀서 로웰 버그만, 하룻밤에 다섯개의 미션을 처리하는 <콜래트럴>의 살인청부사 빈센트, <마이애미 바이스>의 언더커버 형사 소니에 이르기까지, 만의 주인공들은 사적 관계가 단절된 채 홀로 지내는 단독자이다. 만의 남성영화들은 범죄세계의 전문가들이 속한 공적인 삶과 그들이 꿈꾸는 사적인 이상의 충돌, 그로부터 말미암은 공익과 개인적 비전의 공존 불가능성을 꾸준히 탐구해왔다. 현실의 부조리와 폭력, 타락상은 개인의 평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뚜렷한 정치적인 함의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만은 2000년대 이후에야 목표를 향한 남자들의 행로를 통해 도시를 지배하는 실존적인 비극을 그리는 감독으로 재평가받았다. <비정의 거리>에서 프랭크는 마지막 한탕을 끝으로 범죄세계를 떠나 가족을 이룰 꿈을 꾼다. <맨헌터>의 윌은 무지갯빛 해안이 펼쳐진 해변가 집에서 조용히 살고 싶어 하고, <콜래트럴>의 택시 운전사 맥스는 장차 리무진 렌털 사업을 꾸릴 소망을 가지고 있다. 만의 남성주인공들이 직면하게 되는 갈등은 그들의 개인주의가 가족 또는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과 충돌할 때 빚어진다. 이것은 사사로운 이상을 수포로 돌려놓고, 냉혹한 현실에 직면하도록 하며, 끝내 비극적인 희생으로 귀결된다. 영웅적 남성의 일상은 그의 직업적 본성의 결과로 파괴된다. <맨헌터>의 프랭크는 잠재적인 살인에서 시민들을 구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극단적으로 감상적인 인물이고, <인사이더>의 전직 담배회사 중역 제프리는 미국 시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 개인의 안전과 행복을 희생한다.

이와 관련하여 만의 영화에는 항상 두 남자가 각자의 꿈과 철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사이더>에서 로웰과 제프리가 호텔과 일식 레스토랑에서 만나 나누는 대화를 예로 들어보자. 로웰과 제프리는 옥신각신하면서 서로를 시험한다. 그들은 전문가로서 상대와 협력할 수 있는지를 탐문하기 위해 감정이 섞인 대화를 한다. 이 장면에서 제프리로 분한 러셀 크로의 연기는 탁월하다. 그는 로웰의 본질주의적인 질문에 당황한 것처럼 아래를 내려다보고, 안경을 만지작거리고, 머리를 움직인다. 남자들간의 협상과 합의 또는 기만적 대화(<비정한 거리>의 경우)는 만의 영화를 끌고 가는 동력이 수렴되는 지점이다. 남자들은 만나고, 논쟁을 하고, 각자의 세계관을 교환하고, 마음을 읽은 뒤, 일처리를 한다. <비정한 거리>의 프랭크와 레오, <맨헌터>의 렉터와 윌, <콜래트럴>의 맥스와 빈센트, <마이애미 바이스>의 소니와 리코는 남자들 사이의 은밀한 관계의 진화를 보여주는 쌍들이다. 그들이 신분과 계급, 지위 등의 차이를 초월하는 것은 이상과 목표에 대한 합의 또는 그에 대한 배신(<비정한 거리>의 경우)에 의해서이다.

<맨헌터>
마이클 만의 영화에는 도시의 삭막함과 대조되는 이미지로 유리벽과 해변이 등장한다. 이 두 시각요소는 짝을 이루어 등장할 때가 많다. 사진은 <맨헌터>에서 몰리와 잭이 해변에서 아이와 놀고 있는 윌을 바라보는 장면.
<마이애미 바이스>

도시의 사막화를 그리다

마이클 만의 세계관과 관련하여 중요한 영화는 <비정의 거리>이다. <비정의 거리>에는 이후 영화들에서 빈발하는 캐릭터 유형, 주제, 스타일이 농축되어 있을 뿐 아니라 만이 다루는 주제의 순수하고 본질적인 측면이 확인된다. 프랭크의 존재 이유는 가족을 이루는 것이다. 금고를 뚫는 일에 도가 튼 이 남자는 불임(!)인 여자 제시와 가정을 꾸리기 위해 입양을 시도하기도 한다. 원하는 것을 성취하겠다는 일념이 그가 위험을 무릅쓰는 이유이며, 따라서 프랭크의 모든 행위에는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가 서려 있다. 만의 모든 주인공들처럼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때 프랭크는 진짜 ‘인간’이 된다. 그러나 그가 갱 조직의 교활한 우두머리 레오와 가까워질수록 꿈을 향한 궤도는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가족이라는 이상은 멀어지고, 교도소에 체화되었던 거칠고 황폐한 세계로 점점 복귀한다.

순진하고도 감상적인, 이상에 젖은 남자들의 소망을 훼방하는 것은 비정한 도시의 생리이다. 사막 같은 도시에서의 표랑은 만의 우주를 순환하는 인물들의 궤적이다. <비정의 거리>에서 교도소 복역 때부터 삶의 지침이 되어준 아버지와 같은 존재인 오클라가 죽은 직후 프랭크는 원했던 백인 사내아이를 얻는다. 죽음과 삶이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는 찰나에 그토록 꿈꾸던 프랭크의 가족은 궤멸된다. <비정의 거리>에서 프랭크가 실패하는 반면, <맨헌터>의 주인공 윌은 파괴적인 힘들에 대항해 가족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는 의미에서 상황이 나아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연쇄살인자를 잡기 위해 살인자의 마음속에 잠입하는 프로파일러의 으스스한 여정을 걸어가는 윌은 단순한 프로파일러 이상이다. 그는 연쇄살인자의 사고방식에 동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윌은 살인자의 핵심 동기는 그의 꿈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살인자를 잡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가족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여기서 “본성은 우리가 만든 게 아니라 폐나 췌장처럼 이미 주어진 거야”라고 하는 렉터의 말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렉터의 주문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만의 인물들이 다시 자신의 세계로 복귀하고야 말 것이라는 불안을 피어나게 한다.

범죄적 세계 안에 놓인 남자의 고독한 투쟁을 서사화한다는 점에서 마이클 만은 프랑스 영화감독 장 피에르 멜빌의 미국적 계승자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연출의 방식과 목적, 영화 전통에 있어서 두 감독의 차이는 현저하다. 가장 큰 차이는 멜빌의 영화가 캐릭터에 대한 탐구인 데 반해 만의 영화는 공간, 도시에 관한 영화라는 점이다. 도시의 시각화에 관한 만의 집착은 1920년대 성행하였던, 도회적 감각의 구상 회화 양식인 ‘정밀주의’에 견줄 수 있을 정도이다. 그가 비인간화된 도시의 황폐함을 보여주는 방식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인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이며 다른 하나는 고속도로나 교외의 버려진 창고, 공항 격납고와 같은 황무지들이다. 범죄수사 장르의 전형적인 플롯을 따라가면서도 <마이애미 바이스>는 보는 내내 장르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전혀 가질 수 없는 외양을 지니고 있다. 극단적인 HD 실험으로 뭉개진 화면, 선과 악의 미로를 헤매는 캐릭터, 스펙터클이 아닌 현실 체험으로 ‘액션’을 제시하는 대담한 스타일 등이 그렇다.

도시의 삭막함과 대조되는 것은 유리벽과 해변이다. 두 가지 시각적 요소는 짝을 이루어 등장할 때가 많다. <맨헌터>에서 몰리와 잭 크로포드가 해변에서 아이와 놀고 있는 윌을 바라보는 유리벽 안 공간, <인사이더>에서 아내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른 시점에서 조그만 유리창 프레임 안에 갇힌 제프리의 이미지,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아름다운 바다와 대조적으로 차가운 금속성 색조가 지배하는 유리벽 안 저택이 그러하다. 현대 도시 건축에서 빈발하는 통유리는 안과 바깥을 시원스레 이어주지만 근원적으로 둘 사이를 소통시킬 수 없는 단단한 벽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다는 동경의 대상이다. 만의 대다수 영화에는 바다를 향해 선 두 남자(드물게 여자)의 실루엣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다. 인물들은 잔물결이 일렁이는 바다를 응시하면서 생각에 잠기는데, 여기서 만은 평온과 만족을 실어오는 바다를 향한 그리움을 드러낸다. 만의 영화에서 도시는 인간이 거주하기 힘든 사막이다. 사막을 사는 이들에게 도시는 갈증을 유발하고, 갈급한 희망을 구현한 바다(물)는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유리벽 바깥을 소망하면서 그 벽을 뚫을 수 없는 존재는 목표를 향한 부단한 추구와 미수로 끝나고 마는 투쟁이라는 마이클 만적인 테마와 연결된다. 빛과 어둠으로 추상화된 도시의 밤을 드러내는 명상적 이미지들, 공적인 임무를 위해 개인의 감정을 희생하며 소멸해가는 유토피아적인 인간이 이 세계의 요체이다.

<콜래트럴>
<히트>

위대한 스타일리스트

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마이클 만의 영화가 정치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만의 영화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 중 하나는 내용 없는 스타일의 과잉에 대한 비난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피상적인 스타일로 눈을 홀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차가운 푸른빛, 금속성의 컬러 등 그의 전매특허가 된 색의 사용과 건축에 대한 집착은 단순하고 일관적인 주제와 캐릭터의 내면을 반영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몇 가지 요소만으로 이것은 명확해진다. 만의 영화는 대개 하나의 방식으로 열리는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대화도 없는 세계 안으로 관객을 깊숙이 밀어넣는다. <비정의 거리>는 굉음을 내며 금고를 갈아버리는 전기드릴의 클로즈업 이미지로 시작된다. <히트>의 오프닝에서 닐은 어떤 설명도 없이 기차에서 내리고, 병원으로 들어가 앰뷸런스를 훔친다. <인사이더>는 눈가리개를 한 로웰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아지트로 이동하면서 그의 시선에 동화된 추상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콜래트럴>은 공항에서 포커스 아웃된 인파 사이를 유유히 걷는 빈센트의 모습으로, <마이애미 바이스>는 나이트클럽 무희의 실루엣으로 열린다. 영화를 시작하자마자 인물들은 이미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이러한 모호성은 상황을 스스로 이해하도록 만든다.

마이클 만은 공간과 로케이션, 건축적 미장센, 도시경관의 시각화의 달인이다. 극사실주의와 형식미가 결합된 마이클 만의 영화에서는 과장된 컬러(<비정의 거리>), 거대한 물이나 하늘을 배경 삼아 서 있는 배우들(<인사이더> <마이애미 바이스>), 대화를 대신하는 음악을 배음으로 깔고 진행되는 긴 시퀀스<(비정의 거리> <맨헌터> <콜래트럴>)를 항상 볼 수 있다. 디테일에 대한 관심과 강박을 가지고 있는 만은 스타일 그 자체를 전시하는 스타일리스트는 아니다. 프레임은 비어 있는 집들, 외로운 호텔방, 끝없는 바다, 어둡고 젖은 도시의 밤거리, 공장부지들, 장엄하게 점멸하는 조명들로 채워진다. 이러한 공간들은 시적이고 은유적인 표현을 위해 주의 깊게 선택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이는 주제와 내용을 담지한 시각화에 대한 확고한 전략으로부터 나온다. 하나의 증거로 그의 인물들이 은유적인 공간 안에 자리를 잡는 방식을 들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장면이 떠오른다. <비정의 거리>에서 입양을 통해 아들을 얻은 뒤 프랭크는 형언할 수 없는 행복감에 휩싸인다. 바로 이어지는 신에서 그의 기쁨과 환희는, 금고를 뚫는 작업의 예행연습을 하면서 피어나는 절단기 화염의 불꽃놀이로 형상화된다. 표층의 의미는 금고털이 리허설이지만, 심층의 의미는 후계자를 얻은 프랭크의 감격이다. 시네마틱한 이미지에 대한 아름다운 묵상을 보여주는 <맨헌터>에는 만의 시각적 설계가 이미지의 표면이 아닌 심부에까지 도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실례가 있다. 주인공 윌이 희생자의 집에 도착하여 흰 벽의 방으로 들어갔을 때 상황이 시작된다. 극단적인 어둠에서 극단적인 밝음으로 이행하는 이 시퀀스에서 밝은 빛은 흰 벽에 튄 낭자한 피들을 보여주며 학살의 수위를 드러낸다. 이 이미지는 한폭의 추상회화처럼 보인다. 이어지는 숏은 흰 벽을 배경으로 삼고 서 있는 윌의 모습이다. 윌의 이미지는 고독을 강조하면서 그를 잔인한 공간 안에 고립시킨다. 이어서 윌은 법의학 리포트를 낭송하며 녹음하기 시작하는데, 이 신을 지배하는 서늘한 기운은 윌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이후 화장실로 이동했을 때 자동응답기 메시지가 나오면서 시간과 공간의 괴리가 드러난다. 윌은 현재의 이미지를 보는 동시에 과거의 소리를 듣고 있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사운드-이미지 관계는 역전된다. 윌은 텅 빈 호텔방에서 혼자이고, 모니터를 통해 살해당한 가족들이 찍은 홈 무비의 녹음을 계속한다. 이번에 그는 과거의 이미지를 보면서, 현재의 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홈 무비 화면은 어둠 속을 떠다니는데, 그것은 윌이 깊은 어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맨헌터>의 인상 깊은 성취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시적인 구성물로 조직되는 방식에 있다.

마이클 만의 영화는 이미지의 황홀경을 체험하게 하지만 스타일이 모든 걸 삼키지는 않는다. 스타일이 주제나 의미의 요구에 종속됨 없이 그 자신의 궤도를 수행하는 극단적인 매너리스트들과 다르다. 후기작으로 올수록 매너리스트의 면모가 강화되기는 하지만, 이미지들이 추상화되고 표현주의적이 되고 초현실주의적이 되는 동안에도 그들은 항상 캐릭터의 시점, 서사의 무드, 감정과 정서에 묶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위대한 스타일리스트 마이클 만의 세계를 지탱해준 물질적, 정신적 무대를 송두리째 드러내는 것은 그의 초기작들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조디악>

마이클 만은 데이비드 핀처의 어떤 영화를 사랑할까?

마이클 만과 데이비드 핀처는 할리우드 작가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에 가장 잘 부합하는 현대 미국 감독이다. ‘시스템 안에서의 창의성’이라는 예술적 이상을 구현한 두 감독은 세계관과 장르, 스타일의 차원에서 친연성을 가지고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시네마가 미학적으로 호소할 수 있는 방식을 입증하였고, 할리우드영화의 스타일에 대한 대안적인 방법론을 창안하였다. 오디오 비주얼 이미지의 강렬함, 사운드-이미지 혼합, 스타일의 요소들이 내러티브와 연결되는 방식에 있어 구성적이고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경향을 띤다는 점에서도 상통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만이 열광했을 법한 핀처의 영화로 추정되는 것은 <쎄븐>(1995)과 <파이트 클럽>(1999), <조디악>(2007)이 아닐까 한다. 직업적 명분과 대의를 위해 희대의 연쇄살인마를 추적하는 탐조자(형사와 저널리스트)를 앞세운 포스트 누아르 영화인 <쎄븐>, 세상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는 남자들의 교감과 갈등을 다룬 <파이트 클럽>, 뉴할리우드의 유산을 계승한 범죄 스릴러 <조디악>은 <맨헌터> <인사이더>에서 구현된 만의 세계관과 근거리에 있다. 저널리스트적인 사명감에 사로잡힌 <쎄븐>과 <조디악>의 주인공들이 내면화한 전문가주의는 <인사이더>의 로웰이 지닌 정신세계와 근거리에 있으며, 도시와 야만의 이분화된 대립을 형상화한 <파이트 클럽>의 주제, 자본주의 체제를 잠식한 악의 본성에 대한 명상이라는 점에서도 통하는 면이 있다. 대의를 위해 분투하던 개인의 희생과 파멸의 비전 또한 공유한다. 특히 <조디악>은 비주얼 이미지를 통한 정서와 주제의 환기, 시각적 스타일의 테크니컬한 세공이라는 점에서 <콜래트럴> <마이애미 바이스> <퍼블릭 에너미>로 이어지는 만의 혁신적 탐구와 한 맥락에 놓을 수 있다. <조디악>은 마이클 만의 후기 대표작들에 애용되었던 HD 톰슨 바이퍼 카메라로 촬영했다. 어둠의 장르인 필름누아르에 최적화된 기종으로 꼽혔던 바이퍼를 통해 나이트 신의 선예도와 명료함은 연쇄살인 장르의 시적인 미학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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