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우정의 파경(破鏡), 불신지옥
2014-07-15
글 : 김혜리
이도윤 감독의 주목할 만한 데뷔작 <좋은 친구들>

*기사와 인터뷰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국제영화제들이 먼저 발견한 독립영화 <한공주> <10분> <도희야>에 이어, 2014년 기억해둘 한국영화 데뷔작 목록에 충무로 상업영화 한편을 보태도 좋을 것 같다. 이도윤 감독의 <좋은 친구들>(제작 오퍼스 픽처스, 공동제작 초이스컷 픽처스)을 소개한다.

누구나 아는 영화사의 걸작에서 빌려온 제목, 훤칠한 세 남자배우가 폼나게 어우러진 검푸른 색조의 포스터. <좋은 친구들>은 1년이면 십수편 마주치는 충무로의 남성 주도 장르영화의 일원으로 보인다. 의리, 배신, 사기, 살인, 비리. <좋은 친구들>을 이루는 성분도 무엇 하나 새롭지 않다. 그러나 그 총합은 뜻밖이다. “아무도 손해 보지 않는 일”이라는 합리화에서 출발한 보험 사기가 엇나가며 빚어진 사태가 중심 사건인 범죄 드라마에 속하지만, <좋은 친구들>은 범인의 정체가 수수께끼인 스릴러도 아니고 이렇다 할 액션 세트 피스도 없다. 가라앉는 배에서 물을 퍼내는 인물들의 안간힘을 숨차게 지켜보다 보면 불현듯 난파의 원인이 된 진짜 암초의 정체가 드러난다. <좋은 친구들>에서 진짜 비극은 끔찍한 과실치사사건이 아니라 신뢰의 균열이고 인간관계의 애처로운 허약함이다.

1996년 2월 중학생 인철(전지환), 현태(백승환), 민수(한성민)는 졸업식을 빼먹고 금정산으로 자기들만의 기념여행을 떠난다. 이 트라이앵글에서 세 소년이 맡은 배역은 한눈에 분명하다. 인철은 과감하고 행동력 있는 리더고 현태는 온건하고 현실적인 2인자, 민수는 둘에게 구박과 보살핌을 받는 아이다. 갑작스런 폭설과 부상으로 셋은 산중에 고립되고 새벽에 깨어난 현태는 “형이 다 알아서 할게”라고 다짐했던 인철이 사라진 걸 발견한다. 절망한 현태는 의식 잃은 민수를 짊어지고 설산을 내려가다 구조대원을 이끌고 달려오는 인철을 본다. 하지만 너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돌아올 생각이었니? 현태는 차마 묻지 못한다. 17년 뒤. 셋은 여전히 단짝이다. 보통의 서른세살 남자들이 그러하듯 그들은 많은 희망을 잃었고 적당히 훼손됐다. 특수 소방구조대원이 된 현태(지성)는 딸 하나를 둔 가정을 이뤘지만, 불법 오락실을 경영하는 부모와 불화해왔으며 집에서 반대한 결혼을 계기로 아예 척을 진 상태다. 각각 이민과 사별로 부모와 떨어져 혼자 사는 인철(주지훈)과 민수(이광수)에게는 현태의 가족이, 그나마 가정과 가장 비슷한 장소다. 보험회사 영업팀장 인철은 겉보기는 화려하지만 허랑방탕하게 산다. 그래도 현태 대신 오락실을 출입하며 친구 부모의 아들 노릇을 충실히 한다. 무슨 사연인지 알코올에 의존해 사는 민수는 창고 뒷방에서 기거하며 음료수 배달로 생계를 잇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인철을 통해 거액의 화재보험에 가입한 현태 어머니(이휘향)가 다 정리하고 보험금 타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희망을 넌지시 피력한다.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인철에게도 출구가 될 수 있는 제안이다. 세 친구가 우연히 가족에 대해 대화를 나눈 날 밤, 얄궂게도 대화의 여운이 인물들을 움직인다. 망설이던 민수가 인철에게 마침내 동조하고 현태는 아버지에게 모처럼 안부 문자를 보낸다. 인철과 민수는 강도로 위장해 어머니가 기다리는 오락실로 가고, 아내에게 아들 소식을 전하려던 아버지가 아무것도 모른 채 초대받지 않은 무대에 끼어든다. 우발적인 사고는 현태 어머니의 의심으로 이어지고 지옥문이 열린다. 참극 앞에서 망연자실한 현태가 진실을 더듬어감에 따라 십수년 동안 잠복해 있던 불신의 유령이 세 남자가 지탱해온 우정의 덜미를 잡으러 온다.

<좋은 친구들>은 불가피하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스물네 번째 영화 <미스틱 리버>의 기억을 소환한다. 10대에서 중년으로 대담하게 건너뛰는 시간 구조가 그러하고, 3인 집단의 일반적 구성이긴 하지만 제 사람을 위해서라면 불법도 감수하는 마초, 상식을 지키려는 패밀리맨, 순박한 희생자로 이뤄진 인물 구도도 <미스틱 리버>의 삼인방과 비슷하다. <미스틱 리버>에서도 <좋은 친구들>에서도, 해저에 가라앉은 줄만 알았던 과거가 여전히 인물들을 사로잡고 있다. 범죄 이전에도 그런 기색은 역력하다. 설산에서 죽을 뻔했던 그날 이후 인철은 친구들을 챙겨줄 의무를 자청하고 민수는 친구들에게 짐이 될까 두려워한다. 현태는 우정을 성실히 관리하지만 근본적 회의를 떨치지 못한다. 두 영화의 결정적 차이는 관객의 심리적 여정에 있다. <미스틱 리버>의 관객은 인물과 더불어 친구를 의심하고, 사건의 전말을 아는 <좋은 친구들>의 관객은 친구의 진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 좀 이상하다. 의심하지 않다니? 인철과 민수는 죄를 범하지 않았나? 여기서 우리는 <좋은 친구들>이 이중의 서사를 갖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죄가 있다. 하나는 친구의 부모를 해친 패륜 행위고 다른 하나는 우정에 대한 불신이다. 외적 비극의 발단은 전자의 죄를 부른 인철의 오판과 욕심이지만, 내적인 비극의 씨앗은 현태- 그리고 운명의 밤 현태 어머니의 마음을 스쳐간-의 희미한 의심이다. 영화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관객은 오락실 화재의 진상이 발각되느냐가 아니라 주인공들이 쌓아온 관계가 참혹한 사태와 충돌해서도 부서지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에 연연하게 된다.

<좋은 친구들>의 암묵적 화자인 현태를 움직이는 질문은 한국의 남성 장르영화에서 반복되는 명제 “나한테 왜 그랬어?”보다 한 단계 섬세하다. 사건이 진척됨에 따라 현태는 누가 그랬는지 확신하게 되고 왜 그랬는지 정황도 대략 짐작한다. 궁극적으로 그를 괴롭히는 것은 어쩌면 인철의 행위 밑바닥에 친구를 이용하려는 이기심이 있었을 거라는 과거의 기억과 연관된 의심과 의심하는 자신이다. 이런 종류의 심문은 법과 제도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보험조사관에게 “당사자들끼리 해결하게 좀 놔둬라”라고 현태가 일갈하는 이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태는 이 말을 행동으로 책임질 만큼 강하지 않다.

대중영화로서 <좋은 친구들>의 장점은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대주제와 연관된 감정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데에 있다. 배우를 이해하고 활용하는 솜씨도 좋다. 관객은 주지훈의 모델스러움이나 이광수의 코믹함을 의식하지 않으며 영화에 몰입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의 신체적인 특성과 타고난 몸짓, 감수성은 인물에 잘 녹아들어 있다. 현태 역의 지성은 견고하고 안정적으로 관객이 동일시할 지점을 제공한다. 이 배우가 연기하는 약간 피곤해 보이는 침묵은 대사만큼이나 인물의 이해를 돕는다. 반면 영화의 단점도 뚜렷하다. 플롯의 세부를 전달하는 작은 단위의 편집은 군데군데 혼란스럽다. 예컨대 형사들이 인철의 아파트에 들어가는 과정이 그렇고,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현태 아버지가 인철의 모습에 격하게 반응하는 장면은 복선 없는 결과로 보여 아리송하다. 무엇보다 긴장이 고조된 종장에서 인물들의 동기와 동선을 모호하게 처리한 채 지나치게 큰 몫을 관객의 유추에 의존한 점은 영화의 일관성을 해치고 여운을 반감시킨다. 갑자기 수위가 높아진 감상성도 이 구멍들을 메우진 못한다.

첫 장편영화의 시행착오를 고스란히 담고 있지만 <좋은 친구들>은 참신한 남성 드라마다. 영화 속 폭력은 감정적으로 납득되고, 의리나 우정을 고정불변한 신념으로 예찬하지 않으며, 막판에 가족이기주의를 해결책으로 끌어들이지도 않는다. 극중 인물들은 본인의 행동이 야기할 현실적인 결과에 신경을 쓴다. 또한 이 영화는 ‘남자다움’의 부산물인 사소한 비겁함이 얼마나 쉽게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을 망가뜨리는지도 알아차리고 있다. <좋은 친구들>은 사나이의 의리를 넘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관계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지 발견한 자의 경악과 비애를 본다. 이 영화가 쓸쓸하다면 클라이맥스의 과장된 비장미 때문이 아니라 세 친구가 그 비애를 동시에 맛보지조차 못한다는 사실 탓이다. 셋에게는 서로를 까놓고 원망하고 치고받고 가짜 화해라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시간차를 두고 각자, 고독하게, 관계의 마침표를 찍는다. 민수가 먼저 포기하고 이어 인철이 내던지고 마지막으로 현태가 깨닫는다. <좋은 친구들>의 막바지에는 투명하게 설명되지 않는 숏이 있다. 차를 탄 현태가 소방구조대가 출동한 사고 현장을 무심히 지나쳐간다. 그는 더 이상 타인을 구하는 일에 자신을 연관시키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우정이 사라진 세계에 갇힌 살아남은 자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일뿐이다. 이도윤 감독의 단편 작업과 첫 장편을 관통하는 감정은 두려움이다. 이 세계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를 해칠 위험이 너무 큰 곳이라는 두려움. 삶은 취급주의, 화기엄금의 화물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감독이 궁금해 인터뷰를 청했다(52쪽에 계속).

<우리, 여행자들>
<이웃>

<좋은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이도윤 감독의 단편영화 <우리, 여행자들>(2006)과 <이웃>(2007)은 ‘자매’로 보인다. <우리, 여행자들>은 임신한 몸으로 남편과 사별한 아내(전수아)가 죽은 남자를 사랑한 옛 제자(홍지수)와 조우하는 이야기고, <이웃>에서는 폭행 살해당한 소녀의 엄마(백현주)가 사형을 언도받은 가해자의 엄마(엄옥란)를 찾아간다. 두편 모두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악연으로 얽힌 두 여자가 마주쳤다 헤어지는 일화인 셈이다. 이도윤 감독에 의하면 완성하지 못한 제목 미정의 단편이 하나 더 있다. 남녀 커플이 여행 중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남자가 과거에 사귀었던 여자랑 마주치는 줄거리라고 한다. 역시 불편한 만남이다. 옛 여자가 퇴장한 뒤 그녀의 출현이 현실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 모호한 판타지적 터치를 구상했다. 이도윤 감독은 혼자서 세편을 묶어 ‘용서 3부작’, 혹은 ‘여행 3부작’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같은 유형의 서사에 반복적으로 끌렸던 이유에 대한 이도윤 감독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살면서 용서받고 싶은 일, 애써도 도저히 용서하기 힘든 일들이 있었다. 언젠가 그 사람들과 여행을 가고 싶다는 소망이 있었다. 그래서 영화에서 불편한 관계의 인물들을 만나게 하나보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의 고통”이라는 주제는 <좋은 친구들>에도 이어진다. 인철, 현태, 민수는 친구를 혹은 자신을 용서하는 데에 실패한다. 반면 <좋은 친구들>은 남자 셋의 드라마이고 긴 세월 유지된 관계의 이야기라는 점이 대조된다. 어떤 이행이었을까. “<이웃>을 찍고 1년 뒤 마음에 폭풍이 오더라. 내가 그녀들에 대해 뭘 안다고 건방지게 용서의 결말을 내렸을까 괴로웠다. 그래서 내가 좀더 잘 알고 확실히 이야기할 자격이 있는 인물들, 나와 비슷한 연령대의 남자 이야기에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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