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지루한 세상, 재미를 구하라
2014-07-29
글 : 김혜리
윤종빈 감독의 15세 이상 관람가 여름 오락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

<군도: 민란의 시대>가 삿갓을 벗고 마침내 전모를 드러냈다. 예상한 것보다 더 쾌활하고 서비스 정신 투철한 오락물로 완성된 영화의 용모파기(容貌疤記)와 더불어 윤종빈 감독과 도치 역 하정우 배우의 인터뷰를 싣는다.

우리는 종종 들으면서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를 보고 내심 놀란 까닭도 비슷하다. 윤종빈 감독은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를 마친 직후부터 “다음에는 전작들과 완전히 다른 15세 관람가 오락영화를 만들 것이다”라고 누누이 예고해왔다. 그럼에도 <용서받지 못한 자> <비스티 보이즈> <범죄와의 전쟁>, 세편의 전작이 새긴 ‘윤종빈 영화’의 인상은 <군도>를 액션에 방점이 찍힌 조선 말기 사회 드라마로 고집스럽게 짐작하게 만들었나 보다. (물론 이 요약도 틀리진 않다.) 마침내 삿갓을 벗고 전모를 드러낸 <군도>는, 반란의 액션이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 못지않게 대사 위주의 능청스런 코미디가 대등한 비중을 점하는 쾌활한 오락영화다. 시대극이되 탈역사적 오락성을 추구한다는 점은 <캐리비안의 해적> 연작과 유사하고, 상상된 대안적 역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액션물이라는 대목은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과 통한다. 무엇보다 <군도>는 승리하고 결판 짓는 이야기다. 윤종빈 감독의 예전 영화에서 권력이 작동하는 시스템을 약삭빠르게 알아차리지 못한 자들은 씁쓸하게 사라져갔다. <군도>에서 선악은 선명하고 인물이라기보다 검증된 인물형에 가까운 선명한 캐릭터들은 오래 회의(懷疑)하지 않는다. <군도>는 이야기의 효율에 집중해 ‘망할 세상, 백성을 구하라’의 깃발 아래에서 ‘지루한 세상, 재미를 구하라’라는 목표에 매달린다.

단도직입적 오락영화 <군도>는 윤종빈 감독이 <범죄와의 전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봉착한 모종의 ‘우울증’에서 비롯됐다. <범죄와의 전쟁> 이후 윤 감독은 주제성 강한 상업영화를 프로덕션까지 성사시키는 과정의 힘겨움에 지쳐 있었고 나아가 “세상이 이렇습니다”라고 제시하는 영화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하는 자문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독립영화로 돌아가 스탭들에게 다시 민폐를 끼칠 엄두도 나지 않았다고 그는 회상한다. “이러다가 영화를 아주 오래 못 만들 수도 있다”는 적신호를 감지한 윤종빈은, 대학에서 감독 수업을 시작하고 마틴 스코시즈에 매료되기 훨씬 전 10대 관객으로서 신나게 보러 다녔던 영화들에서 출구를 찾았다. <브레이브 하트> <비트> <록키> 등으로 이뤄진 목록의 공통점은 주연배우가 영화 최대의 매력이라는 사실이었다. 강동원의 악당과 머리를 밀어버린 하정우가 스크린에 오른다면? <군도>의 시나리오(작가 전철홍)는 거기서 출발했다.

윤종빈의 ‘도둑들’은 일제 강점기 초반까지 지리산에서 활동했다는 군도 추설이다. 철종 10년 전라도 나주의 순진무구한 백정 돌무치(하정우)는 전 전라관찰사 조 대감의 서자 조윤(강동원)에게 이용당하고 큰 상처를 입은 뒤 추설에 합류해 도치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군도>에서 벼랑에 내몰린 민중 대(對) 수탈하는 지배계급의 전장은 나주로 한정된다. 조윤은 추설의 사적인 철천지 원수이자 탐욕스럽고 비인도적인 양반의 대표다. 악한 조윤의 동기는 역설적이게도 홍길동의 그것이다. 서자로 태어나 차별받으며 자란 그는 무예를 연마해 내면의 소외감을 폭발시키고 더 나이 들어서는 인정사정 보지 않는 치부(致富)의 기술로 아버지 조대감의 인정을 얻고자 한다. <범죄와의 전쟁>에 나쁜 아버지가 있다면 <군도>에는 나쁜 아들이 있다.

친절한 삽화가 가득한 옛날이야기책 같은

<군도>가 약속하는 첫 번째 관객 서비스는 물론 배우 구경이다. 항상 스스로 장대높이뛰기의 가로대를 새롭게 설정하고 가뿐히 뛰어넘는 하정우, 액션배우로서 독자적 영역을 확실히 굳힌 강동원이 스트라이커로 맞붙는다. 미드필드에서는 한국 남성장르 영화의 ‘유주얼 서스펙트’인 조진웅, 마동석, 이성민, 정만식, 이경영, 송영창 등이 총동원돼 본인들이 가장 잘하는 유형의 연기를 안정적으로 제공하고 윤지혜가 합당한 재발견의 기회를 누린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김해숙, 한예리, 김성균, 주진모. 김꽃비까지 명단은 이어진다. 멀티 스타 캐스팅은 <도둑들> <관상> <역린>을 거치며 한국 관객에게 익숙해진 유행이지만 <군도>의 그것은 한 층 ‘사치스럽게’ 느껴진다. 이만한 중량감의 배우가 나왔으니 최소한 이 정도 역할은 주어야 한다는 안배가 없어서다. 사실인즉 캐릭터에 관한 한 윤종빈 감독은 어느 때보다 홀가분해 보인다. 현실적 개연성의 지배를 받기에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전작의 캐릭터들에 비해서 유희적으로 연출할 여지가 많았다.

“배우가 멋져야 한다”가 <군도>의 첫 번째 강령이라면 각본과 편집에 관련된 둘째 강령은 “절대 지루하면 안 된다”이다. 총 5장으로 구성된 <군도>는 마지막 장을 뺀 모든 장에서 보기 드물게 긴 전지적 해설자 시점의 내레이션으로 시대상과 인물의 사연을 들려준다. 윤종빈 감독은 <비스티 보이즈> <범죄와의 전쟁>을 연출한 무렵에도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내레이션 형식에 대한 흥미를 표명한 적이 있다. 그러나 뜻밖에도 감독에 의하면 <군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순전히 스토리의 지체를 방지하려는 궁리에서 나온 실용적인 해결책이다. 영화 중반 돌무치가 군도에 입단한 지점부터 다시 조윤과 격돌하기까지의 이야기가 관객의 관심을 끌기 힘들 것 같아 고심하던 감독은 내레이션을 통해 정보전달의 속도를 높이기로 했다. 그런 연후에 아예 적극적 형식으로 영화 전체로 확장했다. 5장으로 영화를 분장하자는 결정이 뒤를 따랐고, 만화책 서두의 일러두기처럼 캐릭터를 소개하는 오프닝 크레딧이 나중에 더해졌다. 무척 귀납적이다. 추설 당원들이 습격의 절차를 브리핑하는 회의 광경과 작전 실행 장면을 교차편집한 시퀀스도 효율 제일주의 스타일의 다른 예다. 결과적으로 <군도>는 친절한 삽화로 가득한 옛날이야기책을 한장씩 넘겨가며 읽는 기분을 주는 영화다. 은숟갈로 떠먹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릭터에 기초한 대사 코미디와 나란히 <군도>의 오락성을 책임지고 있는 액션은, 당연한 말이지만 15세 이상 관람가에 최적화 돼 있다. 비단 사지절단 등 등급과 직결된 금기만 뜻하는 건 아니다. 다수 대 다수 액션 장면의 대부분은 프레임을 빼는 디지털 후반작업을 거쳐 경쾌하고 매끈한 싸움의 그림을 보여준다. 과거 개각도 촬영의 결과물처럼 이미지 하나하나는 명징하지만, 생생하다기보다 예쁘장한 쪽이다(강동원의 검술 액션 장면은 프레임을 빼면 지나치게 빨라 보여 효과를 적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액션에 관해서는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점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내가 처한 조건을 아쉬워하느니 더 살리자, 더 15세 이상 관람가답게 찍자고 결심했다. 거칠게 찍으려는 의도는 처음부터 없었다. 유쾌한, 흥분을 주는 액션을 원했다.” 다만 초능력 없는 보통 인간이 할 수 있을 법한 액션이길 원했던 윤종빈 감독은 정두홍 무술감독과 의논하는 과정에서 공중을 나는 액션은 남사당 출신 금산(김재영) 정도로 한정했다. 한편 정두홍 무술감독은 공간을 바꿔 클라이맥스 액션에 다른 색깔을 더하자는 제안을 했다. 적인 상대방뿐 아니라 환경과, 그리고 자기내면과 싸우는 감흥을 주는 대나무 숲 결투가 그렇게 나왔다.

인정받는 아버지, 아들이 되려는 남자들의 비극

<군도>는 윤종빈의 전작들과 딴판인 영화지만 곳곳에 유전자가 보인다. “순리대로 살면 못 산다”는 대사가 일단 그렇다. 체면과 실익을 저울질해 책임을 방기하는 신임 나주목사 송영길(주진모)은 <범죄와의 전쟁>에 나와도 어울릴 캐릭터다. 쓰러져가는 소작농들을 닦달해 가망 없는 황무지를 구태여 개간시키는 지주에게는, 한 톨의 이윤 가능성만 있어도 쥐어짜는 악덕 자본가의 면모가 보인다. “때로는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는 대사가 있는 이 장면에서 윤종빈은 분명히 현대 한국의 불도저들을 꼬집고 있다. 무엇보다 <군도>에서 비극의 뿌리는 전작과 무관하지 않다. 윤종빈 감독은 죽음의 아수라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조윤의 모습에서 <군도>의 주제를 본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적자로) 인정받으려다가 일으키는 혼란이 이 세상이 나빠지고 전쟁통이 되어가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여전히 윤종빈의 영화는 인정받는 아버지, 인정받는 아들이 되려는 남자들의 무리함이 비극을 부르는 이야기다.

“뭉치면 도적, 흩어지면 백성”이라는 지배층 시점의 프레임이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이라는 혁명의 프레임으로 뒤집히면서 <군도>는 웃음기를 거두고 비장한 종장으로 넘어간다. <아메리칸 허슬>식 표현을 빌려, 이 여름영화가 끝까지 “발끝 휘날리는” 오락물로 대담하게 달려가기를 바랐던 관객이라면 실망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간 예정된 바다. <군도>의 조윤은 <캐리비안의 해적>의 동인도 회사 악한들처럼 우스꽝스럽고 가볍게 퇴장시킬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리고 윤종빈 감독은 이번만큼은 제기한 문제에 대해 확실한 답안까지 보여주고 싶어한다. <군도>가 윤종빈 감독에게 제2기의 시작일지 오락 대작 나들이로 그칠지는 미지수다. “내가 만들어온 영화들에 지쳐서 아예 다른 것을 시도했는데, 찍다보니 또 조금씩 그리워지더라.” 윤종빈 감독의 영화사 월광의 첫 작품이기도 한 <군도>는 7월23일 개봉한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