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러닝메이트의 전성시대
2014-07-29
진행 : 김혜리
사진 : 오계옥
<군도: 민란의 시대> 감독 윤종빈과 배우 하정우의 동석 인터뷰

장편영화 4편을 함께 만들었다. 같이 영화를 만들고 있지 않을 때에는, 시시때때로 만나서 영화 이야기를 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영화들을 말로 무수히 지었다 부수고, 끝내주는 남의 영화들에 대해 침을 튀긴다. 짐작건대 영화가 주는 회의(懷疑)까지도 서로가 제일 먼저 알게 될 법하다. 윤종빈 감독과 배우 하정우. ‘대담’이라 이름 붙여진 자리가 이보다 불필요한 두 사람이 있을까? 시작은 <용서받지 못한 자>(2004)였다. 대학에서 만난 20대 중반의 하정우와 윤종빈은 2004년 내내 <용서받지 못한 자>에 매달렸다. 그렇게 영화를 영화로 배웠다. 주연배우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습득했고, 같이 베타 테이프를 들고 돌아다니며 배급을 고심했다. 윤종빈 감독이 문득 경험에서 얻은 통찰을 덧붙인다. “큰 배우가 되려면 신인감독과 시작해야 해요. 러닝메이트가 있어야 해요.” 10년이 흘렀다. <군도: 민란의 시대>(이하 <군도>) 시사회 이튿날. 추가 믹싱을 마친 윤종빈 감독과 두 번째 연출작 <허삼관 매혈기> 순천 촬영현장을 잠시 멈추고 서울로 올라온 하정우를 한자리에서 만났다. “그해 명절 연휴였어요. 강남의 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아무도 없는 썰렁한 거리에서 술을 마시면서 ‘우리 <용서받지 못한 자> 개봉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냐’ 걱정했던 기억이 나요. 웃긴 건 그 절박한 처지에서도 방금 본 남의 영화의 이모저모가 주요 안주였다는 거예요. 푸하하.” 두 사람의 두 번째 영화 <비스티 보이즈>가 주연배우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제작사를 옮겨다니며 고생한 회상을 듣다보니 아주 먼 이야기 같다. 그러나 기분 탓이었다. 하정우와 윤종빈의 대화는 곧, 포장마차에서 열을 올리며 그날의 ‘런 스루’(run through)를 자평하는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뒤풀이와 비슷해져갔다.

씨네21_하정우씨는 당최 머리를 가만두지 못하는 배우입니다. <러브픽션> <평행이론>도 그렇고요. <더 테러 라이브>는 단정한 아나운서 머리지만 조금씩 헝클어가며 상황 전개를 표현했죠. 장차 ‘앙드레 김 프로젝트’도 물론 헤어스타일이 중요할테고요. <군도>가 두분의 술자리에서 나온 민머리한 남자 이야기에서 아이디어가 발전한 거라는 소문을 들었는데요. 설마, 사실인가요?

윤종빈_<군도> 아이디어를 꺼냈더니 정우 형이 재미있을 것 같다며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가벼운 오락영화로 가면 어떨까 하다가 정우 형이 대학 연극 <오셀로>에서 했던 빡빡머리 비주얼로 가면 재미있겠다는 쪽으로 말이 흘렀죠.

하정우_거기다 화상(火傷)을 얹을 줄은 몰랐죠. (좌중 폭소) 빡빡머리의 멋스러움이 있어요. 공격적이랄까? 스포츠 스타들이 그래서 스킨헤드가 특히 많잖아요. 남성성의 어떤 상징 같기도 하고요.

윤종빈_머리칼이 없으면 화나 보여요. 그런데 빡빡머리가 된 이유가 있어야 했죠. 머리카락이 안 나는 분명한 원인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고, 두피가 화상을 입으면 털이 안 날 거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화상을 입게 되는 스토리를 짜고….

씨네21_(웃음) 감독님이야말로 ‘도치(倒置)법’의 발상을 갖고 계신 것 같아요. 민머리에 부분화상을 입은 도치를 보면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로버트 드니로)과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아론 에크하트)도 생각했는데요.

하정우_윤 감독님과 여러 영화, 인물을 이야기했죠. <레미제라블>의 휴 잭맨도 거론됐고, <잭>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한 정신연령이 낮은 남자를 도치의 행동양식과 제스처를 구상하는 데에 참조했어요. 그리고 <12 몽키즈>의 브래드 피트도요.(<12 몽키즈> 속 움찔거리는 피트의 제스처를 해 보인다.)

윤종빈_머리를 짧게 터는 동작은 제 습관인데 첫 촬영날 정우 형이 그걸 하고 있더라고요.

하정우_감독님을 의식한 건 아니고 이를 쑤신다거나 손으로 입가를 만진다거나 하는 몸짓을 시도해봤는데 그냥 목을 까딱하는 게 제일 경제적일 것 같았어요. 대사와 대사 사이에 굳이 손이 얼굴까지 올라오는 동작을 하면, 뒤가 더 길어지고 불필요하게 도드라질 위험이 있으니까. 감독님은 캐릭터 표현에서 과잉과 군더더기를 싫어하고 저도 그 점은 같아요.

씨네21_두분이 함께한 세 번째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 2011) 개봉 당시 들은 말씀이 기억납니다. 이제 평소 영화를 상상하고 구상하는 단계에선 브레인스토밍하듯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별다른 상의를 안 한다고요.

하정우_현장에서는 영화 전체 흐름에서 커팅 포인트나 강조해야 할 지점만 이야기 합니다. 여기선 더 세게 해주면 좋겠다, 기지개를 조금 느리게 켜면 어떨까, 하품을 넣어보면 어떨까 같은 대화만 하며 조율해요. 캐릭터의 숨은 동기가 어떻고 하는 얘기는 이미 다 공유한 상태니까, 감독만이 아는 편집점이나 머릿속 그림, 강약과 볼륨 조절만 이야기하는 거죠.

윤종빈_저는 현장에서 감독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고 봐요. 대사를 더 빠르게 느리게, 더 크게 작게. 그 이상의 말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씨네21_말씀을 듣다보면 윤종빈 감독님은 다른 요소보다 대사에 가장 민감한 연출자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윤종빈_대본 리딩을 최소 다섯번쯤 해요. 리딩하고 술 한잔하는 과정을 다섯번 하는 동안 특정 장면에서 어떻게 끝내면 좋겠다 하는 의사도 다 전달해요. 현장 디렉션할 게 딱히 없는 이유가, 저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연기가 명확해요. 즉, 어떤 배우를 캐스팅했다는 건 좋아하는 연기를 하는 배우와 작업에 들어간 거죠. 그러니까 현장에서 말할 내용은 대사의 볼륨과 빠르기 정도예요.

돌무치는 초딩, 도치는 중딩

씨네21_윤종빈 감독에게도 하정우 배우에게도 첫 번째 장편 사극입니다. 하지만 두 분의 작업 스타일로 볼 때 장르적 요소는 스탭에게 일임하고, 처음 시도하는 장르라는 점에는 그리 괘념치 않았을 것 같아요.

윤종빈_미술, 분장, 톤에 대해 기본적으로 원하는 바는 회의 과정에서 전달하고 스탭들이 안을 가져오면 고르고 수정을 제안하는 식으로 했어요. 사실 한번도 “사극을 찍는다”고 특별히 생각해본 적은 없어요.

하정우_예상 못한 어려움도 있었어요. 매일 머리를 밀고 특수분장을 하는 고역이라든가 맨발에 짚신을 신고 액션을 하다 보니 발이 미끄러져 중심이 흔들린다거나. 그런 소소한 요소가 연기 과정에 스트레스로 끼어들긴 했어요. 하지만 의상이나 분장 컨셉에 뭔가를 덧붙일지언정 저한테 맞게 고쳐달라고 요청하진 않아요. 단,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형배 얼굴에 흉터 설정이 있었는데, 상처가 없어도 그 남자를 충분히 거친 느낌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거부한 적은 있어요. <군도>의 화상 흉터야 삭발의 이유니까 꼭 필요했죠. 그 밖에는 도치의 돌무치 시절 가발 길이만 좀 조정했어요. 돌무치는 귀여워야 하는데 머리가 기니까 너무 야성적이더라고요.

윤종빈_<피아노맨>의 최민수 선배가 오신 줄 알았어. (좌중 웃음)

하정우_영화를 볼 때 가발의 이마 라인이 노출되면 보는 관객이 불편해져요. 물론 가발이라는 건 모든 관객이 알죠. 하지만 본인의 눈에 가발이라고 티가 나는 순간 관객의 신뢰는 무의식적으로 깨져요. 그래서 머리띠를 하자고 했고 도치의 수염을 꼬아서 일자로 만든 것도 돌무치에서 도치로 변화하는 과정에서도 일관성 있는 인물의 귀여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어요. 관객은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배우에겐 관객에게 보이건 말건 본인이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이 필요해요. <택시 드라이버>를 찍을 때 드니로가 택시 운전을 3개월간 했다더라고요. 그렇다고 3개월로 택시 운전을 마스터하는 건 불가능해요. 거기서 배우한테 의지가 되는 건 “내가 택시 운전을 3개월간 해봤다”라는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도치가 수염을 일자로 꼬는 설정이, 배우가 “그래, 나는 도치야”라고 디딜 수 있는 지점인 거죠.

윤종빈_첫 촬영날 레게 머리를 연상시키는 가발을 쓰고 나타난 형이 힙합 리듬을 타는 것처럼 움직이더라고요.

하정우_돌무치가 수레를 끌고 “엄니, 나 왔네” 하며 귀가하는 장면인데, 제가 생각한 캐릭터의 리듬이었어요. 러닝타임이 좀더 길었다면 애초에 인물을 위해 제가 디자인한 것들을 더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점은 아쉽죠.

씨네21_하정우 배우는 배역의 스펙트럼이 넓은 편입니다. 그나마 그간 연기한 주요 캐릭터들의 공통분모가 있다면 ‘용의주도한 남자’라는 점이었어요. 머릿속에 세워둔 계획이 많은 인물들이죠. <군도>의 도치가 그런 면에서 좀 새로워요.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무지하고 순박하고 동물적인 남자니까요.

하정우_동물에 빗대면 물개를 생각했어요. 추설 무리가 산길에서 조공 행렬을 터는 장면에서 모자를 벗고 슥 나타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야생적이길 바랐어요. 예전 작품에서 은연중에 호랑이, 사자, 곰, 늑대를 표현했다면 돌무치와 도치는 무엇을 해도 귀여워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어요. 물론 원수를 생각하며 짓는 눈빛이나 혈육을 잃는 장면은 감정이 깊지만, 여타 장면에서는 한발 빠져서 연기하는 쪽이 <군도>의 톤에 부합한다고 생각했어요.

씨네21_계속 돌무치와 도치를 구별해서 지칭하고 있는데, 본인이 그어놓은 선은 어떤 거였나요.

하정우_돌무치가 마냥 생각없고 수동적이라면 도치는 그 기초 위에 화가 얹힌 거죠.

윤종빈_돌무치가 초등학생이라면 도치는 질풍노도기의 중학생 같죠. 그러나 중학생 애가 화가 나봐야 거기서 거기죠. 여전히 귀엽잖아요.

하정우_조윤(강동원)은 구구절절한 드라마가 있어요. 끝까지 차곡차곡 잘 쌓아가는 인물이죠. 반면 돌무치/도치는 초반에는 캐릭터를 딱 보여주고 이후에는 군도 무리의 힘으로 나아가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할애된 신이 충분히 많진 않아요. 그렇다면? 배우는 직접적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명분은 충분하니까 연기에 1차적으로 화를 얹어서 표현하면 관객을 설득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파의 유혹

씨네21_문득 두분이 사석에서 연기 품평을 하면 아주 신랄하겠다는 상상이 듭니다.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유형의 연기가 있다면.

윤종빈_저는 배우의 연기가 나쁘면 다른 어떤 경우보다 영화 보기가 힘들어지는 쪽이에요. 감정을 강요하는 과잉된 연기를 꺼리고요.

하정우_배우가 진정성을 빌미로 프레임 안에서 뭔가를 시도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음악이나 앵글 사이즈, 미술과 상대배우 등 다른 요소들을 감안하면서 절제해야 한다고 봐요. 자기 기분에만 빠져 다른 기술적 요소를 보지 않는 연기는 제 취향이 아니에요.

윤종빈_뭘 표현하려는지는 알겠지만, 연기도 기술이고 해석인데 그렇게 하면 재미가 없어지죠.

하정우_연출도 비슷한 것 같아요. 감독이 자기를 일부러 드러내려는 숏에서도 비슷한 맥락에서 부담을 느껴요.

씨네21_조화를 고려하는 연기에 관해 듣다 보니 조윤과 대비해서 그리고 전체 그림에서 도치라는 인물의 특성은 뭐라고 생각했는지 궁금합니다.

하정우_엔진이 앞에 달린 것과 뒤에 달린 것의 차이죠. <군도>는 도치로 문을 열어서 조윤으로 닫는 이야기입니다. 관객은 후반부 감정을 안고 극장을 나서기 마련이므로 조윤의 드라마가 더 임팩트 있겠구나 예상했어요. 그럼 조윤의 절절한 드라마가 결을 쌓는 대로 흘러가는 전체 세팅 안에서 도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코믹하게 군도를 이끄는 축을 마련해 다른 부분을 채워나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윤종빈_감독으로서도 둘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을 어떻게 안배하고 레벨을 조정할지 많이 고민했어요. 예를 들어 마지막 단계의 믹싱으로도 차이가 생기거든요. 영화를 만드는 사람 아니면 절대 모르는 세계인데 음악으로도 연기를 돋우고 누르는 일이 가능해요.

하정우_배우가 연기를 ‘매트하게’ 해도 음악을 깔아주면 감정이 더 올라오죠.

윤종빈_도치의 목화수차 액션 신 음악을 예로 들면 처음에는 그냥 경쾌하게 가려다가 약간 울컥한 쪽으로 갔죠. 현장에서도 가이드 음악을 배우들에게 들려줍니다.

하정우_어제 시사회에서 보니 도치가 목화수차를 쓰기에 앞서 그 무기와 도치의 스킨십이 묘사됐다면 좀더 폭발적인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더라고요.

씨네21_윤종빈 감독님도 하정우 배우도 굉장히 코미디를 사랑하는 영화인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농담 본능이랄까. 건조한 드라마를 하다가도 주기적으로 코미디를 넣어서 해소시키죠.

윤종빈_제가 심심한 걸 못 견뎌요. <군도> 들어가면서 제일 처음 결심한 것도 말장난 좀 그만하자였는데…. (웃음) 대본은 심심하게 썼는데 막상 들어가니 말장난을 더 넣을걸 그랬나 싶더라고요. 대본에는 도치가 열여덟이라는 설정이 없었는데 찍다가 문득 “얘는 몇살쯤 됐을까” 하기에 “18살?” 했더니 “에이” 하는 반응이 나왔어요. 그런데 조선시대 남자 평균수명이 서른다섯이거든요. 35살이면 죽는단 말이죠. 옛날 사람들 사진 보면 늙어 보이잖아요. (좌중 웃음)

씨네21_그렇다면 의학적으로 열악했던 시대상을 전달하려는 깊은 뜻이…. (좌중 폭소) 사실 이야기 밖으로 너무 튀어나올 수도 있는 농담인데요.

윤종빈_그래서 처음부터 18살이라는 설정을 깔고 가야겠다 싶었죠. 관객이 놀라지 않게 내레이터도 반복해서 이야기해주고요. “왜 계속 놀라니, 얘기해줬는데?” 하면서. (웃음) 나이 들고 보니 제가 제일 좋아한 영화들은 코미디인 것 같아요. <덤 앤 더머2>, 너무 기대하고 있어요!

하정우_<덤 앤 더머>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 오토바이 달리는데 얼어가지고 그대로 굳어버린 (재연한다) 그 장면은 정말! 저는 <롤러코스터>를 통해 슬쩍 코미디의 운을 띄워봤는데 하도 드라마가 없다고 비난해서 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다시 읽어봤어요. 개정판으로. (일동 폭소) <허삼관 매혈기>도 들어가는데 드라마를 다시 공부하자! 영화과 나온 윤 감독님에게 기본서를 물었더니 그냥 감독들 인터뷰집 보라고 해서 마틴 스코시즈, 우디 앨런 인터뷰책도 읽었어요. <시학>은 비극론은 많은데 희극 부분은 유실돼 별로 없어요. 그나마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건 희극은 플롯 자체가 없다, 장면과 시추에이션으로 연결되니 구애받지 말라는 거예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얘기했는데…. (웃음)

씨네21_코미디를 좋아하면서도 서로 유머 취향이 다른 부분이 있다면요.

윤종빈_취향보다 정우 형이 여러 아이디어를 내요. <군도>에서는 도치가 대숲에서 수련하며 나무를 드는 장면이 있는데, 천보(마동석)가 트레이너처럼 옆에서 PT(개인 트레이닝 강습)를 해주면 어떨까 하더라고요. (웃음)

하정우_(진지하게) 군도의 일원이 되고 나서 도치가 산채 사람들과 한팀이 됐음을 보여주는 일상적 장면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랬죠. 케이퍼 무비 보면 항상 작당해서 모의하는 부분이 제일 재밌잖아요?

윤종빈_정말 웃긴 장면이 됐을 테지만, 후반에 비장한 대숲 장면을 이미 설계해놓았기 때문에 그 장소를 유머러스하게 그리기 망설여졌고, 대숲의 도치는 수련하는 동안 혼자여야 한다고 판단했어요.

씨네21_도치가 약관의 나이라거나, 반복되는 남성 성기에 관한 농담이나 언젠가부터 하정우 배우에게 기대되는 ‘먹는 연기’를 대파로 보여준다거나 하는 연출은, 친구들끼리 어울리다 나온 유머를 격의 없이 살린 느낌입니다.

윤종빈_정우 형이 오해하는 건데 저는 처음부터 대파를 먹일 생각이었어요. 정우 형이랑 등산객을 등에 업고 산 정상까지 실어다주는 노인에 관한 중국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는데, 할아버지가 주먹밥 반찬으로 대파를 한손에 쥐고 베어 먹더라고요. 느낌이 장난 아니어서 회식 장면 찍는 날 미술팀한테 채소들 다듬지 말고 쌓아 놓아달라고 했어요.

하정우_깐 양파도 있고 뭐가 상 위에 많더라고요. 돼지고기를 일단 먹었는데 대파가 자꾸 절 유혹하는 거예요. 딱 잡고 한입 먹었더니 감독이 “어, 형 그거예요 그거!” 하면서 엄청 좋아하대요.

씨네21_도치가 제압한 적들의 상투를 자른다는 <군도>의 설정에서 다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생각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영화 후반 도치와 조윤의 결전이 마무리되는 방식은, 도치의 감정선이나 성격으로 보면 좀 뜻밖이었어요. 조윤 캐릭터를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기도 했고요.

윤종빈_강동원씨는 고민하더라고요. 가발도 현장에 다 준비했지만 결국 사용하지 않았어요. 저는 영화 말미에 야만의 시대가 종결되어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도치라는 인물이 오프닝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의상도 암시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도치가 서서히 ‘스님’이 되어간다는 느낌을 주려고 했죠.

하정우_도치가 군도의 진정한 에이스로 성장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면, 연기하는 입장에서 충분히 설득력 있는 행동이었어요. 제가 <롤러코스터> 연출을 하지 않았다면 냉정하게 가자고 우겼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롤러코스터> 이후 현장성이 주효할 때가 있다고 믿게 됐어요. 결과가 맞다, 틀리다를 떠나 감독이 보고 싶은 영화, 원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허삼관 매혈기>에서 한번 더

씨네21_하정우 배우는 <베를린>에서 한 시기를 매듭짓고 <군도>까지 왔고, 윤종빈 감독님은 확실히 <범죄와의 전쟁>까지 세 작품을 한 그룹으로 묶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군도>의 윤종빈 감독은 옆에서 보기에 어떻게 달랐나요.

하정우_준비를 많이 했구나 싶었어요. 예전보다 사회성도 많아지고 남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유가 생겼어요.

윤종빈_<범죄와의 전쟁>까지는 배우들의 컨디션을 중요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당장 내 눈앞에 찍어야 할 게 있으니까 전전긍긍하기만 했죠. 그런데 <군도>에서는 제가 여유가 생기니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게 보였고, 그로 인해 다시 제가 힘들어졌어요. 과거엔 제가 뭘 찍는지 모르니 사람들의 어려움을 인지할 여력이 없었는데, 적어도 제가 뭘 찍어야 할지는 아는 정도가 되니까 사람들의 힘든 상태가 보인 거죠. 정신적으로는 어쩌면 네 영화 중 가장 편했어요. 액션영화라 사고날까봐 걱정하는 스트레스는 있었지만.

하정우_영화 찍기는 항상 힘들어요. 윤 감독님과 함께 작업한 4편도 매번 다른 식으로 힘들었죠. 다만, 첫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는 30테이크를 가도 마냥 신이 났어요. 무대만 서다가 주연으로 카메라 연기를 한다는 사실에 흥분했고 자신감도 얻었죠. 2004년 내내 그 영화를 만들었는데 즉흥연기도 하고 다이내믹하게 재밌었죠. 연기뿐만 아니라 영화의 처음부터 배급까지를 배웠고요. 그렇게 영화를 시작해서인지 아직도 제가 영화 작업을 대하는 느낌에는 뭔가 만들어내는 재미가 기본으로 깔려 있어요.

씨네21_아직도 감독님이 더 보여주고 싶은, 세상이 모르는 하정우의 면모가 남아 있나요.

윤종빈_<비스티 보이즈>가 끝났을 때도 정우 형과 내가 무슨 새로운 것을 더 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범죄와의 전쟁>이 끝났을 때도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군도>에서 도치의 헤어스타일이 그랬듯 사소한 실제의 요소와 마주칠 때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것이 나타나요.

씨네21_두분이 동시에 영화를 시작했지만 분야가 달라 체감하는 시간의 속도가 다를 것 같습니다. 배우가 훨씬 많은 영화를 할 수 있으니 시차가 생길 텐데요.

윤종빈_제 작품 속도가 빨라진 이유가 정우 형 때문이에요. (웃음)

하정우_내가 좋은 자극을 주네?

윤종빈_2004년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남성의 증명>으로 수상하고 10년이 흘렀는데 장편영화 네편을 만들었어요. 저와 같은 해 데뷔한 감독들에 비하면 빠른 편이죠. 그런데 정우 형은 또 <군도> 끝나면 <허삼관 매혈기>와 <암살>이 나올 거 아니에요.

씨네21_그러고 보니 <허삼관 매혈기>의 진도는 어떤가요.

하정우_순천에서 19회차까지 찍었어요. 1950, 60년대를 제대로 구현하는 영화라 예산이 70억원을 넘겼어요.

윤종빈_<범죄와의 전쟁> 당시에 로케이션을 찾아 전국을 돌았고 <군도>도 헌팅했다가 쓰지 않은 곳이 있는데, <허삼관 매혈기>가 거기서 촬영했더라고요. (웃음)

하정우_오디션을 봤는데 캐스팅하고 보니 <군도>에 출연했던 아역들이었어요. 시나리오 쓰면 제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윤 감독님이에요. 솔직하고, 형제처럼 제 입장에 서서 말해주니까요. <허삼관 매혈기>에서는 공동각색자이기도 해요. 이번에 시나리오를 윤 감독님과 같이 2박3일 동안 고쳤는데 정작 작업을 다 마치고는, 이 영화 마치고 나면 연출은 더 나이 들어서 하는 게 어떠냐고 말하더라고요. 형이 젊고 얼굴이 제일 좋을 때, 파이팅 있을 때 더 많은 연기를 보여주라고.

윤종빈_<군도>에서 근접숏을 잡는데 정말 얼굴에 물이 올랐더라고요. 뭘 해도 이제 다 말이 된다고나 할까.

하정우_윤 감독님은 평소 움직이길 좋아하지 않는 반면 저는 시간나면 뛰쳐나가 땀 흘리고 그림 그리고 뭐든 하는 편이거든요. 그렇게 영화를 제외한 나머지 생활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도 적당한 거리를 확보해줘서 더 관계를 오래가게 해주는 것 같아요.

씨네21_4편의 장편을 모두 하정우 배우와 함께했는데 “하정우 없는 영화 현장”은 어떨지 상상해본 적이 있나요.

윤종빈_말 그대로 정우 형이 없는 ‘현장’은 지금까지도 많았지만…. 그 때 가봐야 알 것 같아요. 여자친구의 고마움도 헤어져봐야 알잖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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