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뛰어들어 날렵하게 제압한다. 여느 액션영화의 여주인공에게 무리 없이 어울릴 법한 표현이다. 하지만 배우 손예진을 설명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하는 날이 오게 될 줄은, 솔직히 몰랐다. 갑옷과 무기, 검술과 스턴트 액션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손예진은 단숨에 외칠 수 있는 선택지는 아니다. 그건 그녀가 눈에 보이는 몸의 움직임보다 보이지 않는 감정을 담아내는 작품에 더 자주 몸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섬세한 얼굴에 수많은 감정을 떠올리고 지워나가는 데 능한 손예진은, 늘 클로즈업이 기대되는 배우였다. 하지만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의 여월로 분한 그녀는 다르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해적선에 올라 거친 사내들을 호령하는 여걸이 되려면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도 중요하지만 일단 잘 ‘싸워야’ 한다. 그래서 손예진은 <해적>의 남자배우들보다 더 높이, 더 빠르게 움직인다. 밧줄을 붙잡고 허공 위를 날아다니는 것은 기본이고 공중돌기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서 중국 무협 블록버스터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강인한 여성 영웅의 모습을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예진이라는 배우의 사용설명서가 있다면, <해적> 이후 이 매뉴얼엔 ‘유려한 액션 연기’라는 항목이 새롭게 추가되어야 마땅하다.
“<해적>을 놓친다면, 여월 같은 캐릭터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 같았다.” 사랑하는 남자와 가족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어>의 해우를 연기하며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그녀에게 찾아온 <해적>의 여월은 “놓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기존의 한국영화는 물론이고 조선의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여해적의 모습을 새롭게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장점이 컸다. 한해도 거르지 않고 착실하게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15년차 여배우가, 한국영화 속에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인물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드문 게 사실이니까. “<캐리비안의 해적>의 키라 나이틀리를 참고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양 스타일의 해적이라 <해적>의 여월과는 닮은 점이 많지 않더라. 참고할 수 있는 건 외형적인 모습뿐이었다.” 조선의 여해적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손예진이 특히 주목했던 건 캐릭터의 ‘무게감’이었다. 영화의 유머를 담당하는 산적과 달리 “절도 있고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맡고 있는 해적은 대사가 많지 않았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을 외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곧 캐릭터를 보여주는 길”이었다고 손예진은 말한다. “그래서 메이크업과 헤어에 정말 신경을 많이 썼다. 문신을 할까 생각도 해봤는데 그건 너무 센 것 같고…. 포스터에 등장하는 여월의 비녀는 미국의 지인을 통해 급하게 공수한 거다. 그렇게 여월의 외적인 모습을 하나하나 결정하는 데 많은 고민을 했다.”
“어떤 포즈를 취해야 더 멋진 액션 동작이 나오는지” 깨닫게 될 때쯤 영화 촬영이 마무리됐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지만, <해적>은 <타워>와 마찬가지로 손예진에게 “함께 영화를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 작품이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혹은 영화의 외적인 부분까지 주연배우가 챙겨야 할 요소가 많은 작품들이 그동안 쉬지 않고 달려온 그녀에겐 적잖은 부담이 되었나보다. 배우 각자의 개성이 모자이크처럼 맞물려 재미를 선사하는 <해적>이었기에 “예전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다”는 손예진은 올해 한층 자유로워 보인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예능 프로그램(<무한도전>)에 출연해 울고 웃었고, 도미니카공화국, 푸에르토리코, 크로아티아 등 이국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나라를 유랑하기도 했다. “연기도 연기지만, 올해는 나 자신을 찾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는 손예진의 최근 관심사는 자신의 마음이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많은 것들이 빠져나간” 배우의 마음이 어떤 것들을 새롭게 채우고 담을지는, 요즘 고민 중이라는 그녀의 차기작이 대신 말해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