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로 들어선 김남길은 좀처럼 자리에 앉지 않았다. “서 있는 게 편해요”라며 웃어 보이더니이내 스튜디오 한편에 있는 사진들을 훑는다. “어, (정)재영이 형이 이렇게 머리를 기른 적이 있었어요?” 신기해하며 아이 같은 표정을 짓는 그를 보고 있자니 드라마 <상어> <나쁜 남자>의 얼음장같이 차가운 남자가 이 남자인가 싶다. <후회하지 않아> 이후 8년 만의 스튜디오 방문이 낯설 법도 한데 넉살 좋고 스스럼없게 스탭들과 몸을 부딪혀가며 장난까지 친다. “실제의 나와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귀띔하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이하 <해적>)의 산적떼 두령 장사정도 이런 모습일까. 그렇다면 꽤나 살갑고 유쾌한 산적이지 않을까.
<해적>에서 김남길이 연기한 장사정은 한마디로 ‘골 때리는’ 사내다. 고려 무관 출신의 별장으로권력가들의 세 싸움을 등지고 산적떼 두령이 된다는 설정부터가 범상치 않다. 고래가 삼켜버렸다는 조선의 국새를 찾아 호기롭게 바다로 나가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미지의 세계인 바다가 호락호락할 리 만무하다. 그뿐인가. 두목의 카리스마는 온데간데없고 능글맞고 촐랑대며 허당기까지 다분하다. “코믹한 인물은 처음이냐고 많이들 묻는데 나는 왜 익숙하지? 아마도 평소의 내가 장사정처럼 능글맞은 구석이 있어서 그런가 보다. 사람 좋아하고 의리를 중요시하는 것도 비슷하고. 코미디 장르를 워낙 좋아하다 보니 그냥 재밌게 즐기면 되겠다 싶었다.” <미인도> <선덕여왕>을 거치며 스스로도 “사극에는 자신이 있었다”라고 말하지 않는가. 여기에 “변화가 많아 배우로서 만들어나가는 재미”까지 있는 캐릭터를 만났으니 4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으로 이만한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일까. “도망치고 싶었다”는 그의 고백은 더없이 의외였다. “‘평소의 너랑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듣다보니 (캐릭터를 잡는 데) 너무 발랄한 쪽으로 치우쳐 있었던 것 같다. 연기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고 내가 뭔가를 해 보여야 할 것 같았고. 연기를 그만둬야 하는 건가 고민했다.” 그때 그에게 방향키가 돼준 건 현장의 선배들이었다. “(유)해진이 형이 그러더라. ‘코미디도 하나의 전문적인 장르다. 가볍게만 생각하면 안 된다. 너무 웃기려고 하지 말고 자연스러움이 묻어나게끔 연기하자.’ 김원해, 박철민 선배랑도 얘기를 많이 하면서 톤을 잡아나갔다.” 데뷔 12년차 배우로서 자기만의 연기 세계를 말할 법도 한데 그는 “삶도 영화도 혼자서는 되는 게 아니”라며 선배들의 말에 귀를 세운다. “늘 무조건 선배들이 잘돼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후배들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해주시니까. 선배들로부터 연기를 다 배웠다.” 이것은 연극 무대에서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블록버스터영화의 주인공 자리에 앉은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는 그의 지론이다. “한번은 (박)중훈이 형이 그러더라. 투 아웃 만루 상황에 올라가서 왜 꼭 홈런을 치려고 하냐고. 번트든 파울이든 자꾸 쳐서 출루로 돌아올 수도 있다고.” 결정적 한방으로 영웅이 되려는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좀더 편안하게 홈베이스를 밟을 수 있다는 의미일 거다.
힘을 뺌으로써 되레 힘을 내는 싸움의 기술을 체득한 김남길은 주저없이 <해적>을 “연기 인생의터닝 포인트”로 꼽았다. “공익근무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아, 연기가 퇴보할 수도 있구나, 그게 나한테도 오는구나’ 싶어 두려웠는데 <해적>을 찍으면서 내 틀을 좀 깨고 나온 것 같다”고 덧붙인다. 영화로 첫 주연작이었던 “<후회하지 않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는 그의 말에서 어떤 기대감마저 느껴진다. 한결 가볍고 유연해진 몸으로, 그 탄성 그대로 김남길은 차기작 <무뢰한>을 촬영중이다. 여기서 그는 형사 재곤 역으로 등장해 전도연과의 치명적 멜로를 그려나갈 예정이다. “촬영 중간에 모니터를 보는데, ‘어? 여태껏 봐온 내 모습이 아니네?’ 싶더라. 낯설었다. 그런데 그게 좋다. 변화될 내 모습이 나조차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