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타짜-신의 손>(이하 <타짜2>)의 함대길이 되는 순간, 원작 만화와 전편 <타짜>와의 비교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타짜2>에 합류한다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큰 산”이라는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잘해야 본전, 얻는다 해도 많지 않은 득일 게 훤했다. 하지만 그 엄청난 리스크가 최승현을 <타짜2>의 세계로 끌어당겼다. 초짜에서 타짜를 거쳐 마침내 신의 손에까지 이르는 함대길의 험난한 여정에 최승현은 겁없이 올라탔다. 자신의 세 번째 영화 <타짜2>의 개봉(9월3일)을 딱 일주일 앞둔 시점에 그와 마주 앉았다. 함대길이라는 “도박 같은” 인물에 기꺼이 자신을 올인한 최승현의 한수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보자마자 최승현이 자세를 낮춰 인사를 건넨다. 낯을 가리는 수줍음 많은 소년 같다고 느껴질 만큼 정중했다. 사진 촬영 내내 별말이 없어 강형철 감독이 말한 “엉뚱하고 허술한” 최승현의 모습은 볼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그의 강렬한 눈빛에서 전작들(<포화속으로> <동창생>)에서의 묵직한 얼굴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무대 위의 탑(T.O.P)의 모습을 찾는 게 훨씬 빨라 보였으니까. 그런데 결국 최승현 덕분에 모두가 크게 웃고야 말았다. 아무 예고도 없이 엉덩이를 쭉 빼고 코믹 포즈를 취할 때 한번, 동네 호프집 친구인 강형철 감독에게 “업혀들어갔다”고 말할 때 또 한번, 스승 고광렬을 연기한 유해진과 술 한잔 걸치고 연기에 들어갔을 때를 회상하며 (취한 듯) 양손을 휘저을 때는 완전히 녹아웃이었다. <타짜2>의 함대길이 “허접한 아이이자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면 그 단서를 지금의 최승현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타짜2>의 함대길은 <타짜>의 고니와는 출발부터가 다른 인물이다. 고니가 처음부터 완벽한 타짜로 등장했다면 대길은 도박의 세계에 갓 입문한 생초짜다. 하지만 타짜인 삼촌의 기질을 물려받은 걸까. 꾼들 사이에서도 절대 주눅 들지 않을 만큼 패기와 허세기만큼은 충만하다. “전편을 이미 많은 분들이 보셨을 텐데 갑자기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 타짜인 척한다면 몰입이 안 될 것 같았다. 근데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대길은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본능에 충실한, 동물적인 감각을 지닌 아이더라. 그러니까 (대길이 고니와 다른 인물이라는 게) 설득이 되더라.”
사실 최승현에게 함대길이라는 인물은 하나부터 열까지 새로운 도전이었고 미지의 세계였다. 말수 적고, 책임감 강한 학도병(<포화속으로>)이나 남파 간첩(<동창생>)과는 확연히 다른 성향의 인물이었으니까. 게다가 영화는 대길을 좇아가며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덧붙여가는 일종의 “대길의 성장영화”에 가깝다. “부족한 인간이 그나마 조금씩 성숙해가는 이야기를 좋아해왔다” 해도 극의 구심점이 돼 기 센 캐릭터들을 잡아두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대길은 혼자 끊임없이 유랑하며 개성 강한 인물들을 계속 만난다. 그러다보니 내가 흔들릴 때가 있더라.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절대 흔들리면 안 되겠다, 그게 영화와 모두를 위한 길이겠다 싶었다.”
방향을 잡아 전진해가는 최승현에게 강형철 감독은 중요한 방향키가 돼주었다. 감독은 배우가 자연스럽고 편안해야 캐릭터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해 “재미없으면 내가 편집하면 돼”, “뻘짓 좀 하자”며 최승현이 놀 수 있는 멍석을 먼저 깔아줬다. 늘 아이디어가 넘치는 최승현(<씨네21> 927호 참조)이 이 판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감독님이 아침에 촬영장에서 나를 만나면 그러셨다. ‘오늘은 또 무슨 짓을 하고 가실 거예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장난을 치시더라. (웃음) 그만큼 서로 잘 맞았다.” 절대 빠질 수 없는 또 한명의 조력자는 배우 유해진이었다. “극에서 거의 유일하게 대길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인물이 고광렬이다. 그래서인지 유해진 선배랑 촬영할 때는 항상 마음이 따뜻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보이며) 언론시사가 끝난 날 밤에 선배가 ‘사랑해요’라며 문자까지 보내주셨다. 자신의 아픈 속내도 들려주시고. 후배의 마음까지 챙겨주시는 분이니 내가 선배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자기 안의 틀을 깨고, 사람들과 부딪히며 최승현은 <타짜2>의 대장정을 지나왔다. 위험 요소를 알고 뛰어든 게임을 끝낸 지금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대길을 통해 내 안에 없던 성향과 내가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을 돌아보게 됐다. 그러면서 스스로가 조금 더 단단해진 것 같다. 자신감도 많이 생겼고. (말을 신중히 고르며) 이제는 또 다른 캐릭터를 남들 의식하지 않고, 또 겁먹지 않고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이 끝나면 꽤 오랜 시간 칩거에 들어갔던 과거와 달리 이번만큼은 “자기만의 로망을 가진 긍정적인” 대길로부터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고 전했다. 한동안은 이 즐거운 기운의 여진을 느끼고 싶다는 뜻이다. 일이든, 연애든 “꽂혀야 한다”는 그가 다음에는 무엇에 빠질까. 기다려보고 싶은 흥미로운 미지수다.
-강형철 감독님과 동네 호프집 친구가 됐다고 들었어요.
=저희 집에 저 많이 업고 들어오셨어요. (웃음) (반대의 경우는 없었나요?) 없었어요. 늘 제가 먼저 쓰러졌죠. 감독님이 저 취하는 걸 좋아하셨어요. 영화 들어가기 3개월 전부터 같이 준비할 때였는데요. 기존의 제가 가지고 있는 걸 버려야 대길을 더 풍성하게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1987년 11월4일. 대길이 꼬장(이경영)에게 손금을 보여주며 자신의 생년월일을 말합니다. 근데 승현씨 본인의 그것과 같더라고요. 감독님께서는 “승현씨에게 주는 조그마한 선물”이라고 하셨어요.
=저한테는 굉장한 의미죠. 함대길이라는 인물과 제가 하나가 된 것 같았거든요. 꼬장이 손금 봐주면서 “도박 끊으면 오래 살겠네”라고 하는데 나도 도박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죠. 감독님께 굉장히 많이 의지했어요. “이 작품을 너의 20대 대표작으로 만들어주고 싶다”는 말씀까지 하셨으니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죠.
-전작들에서도, <타짜2>에서도 눈물 흘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때 보면 눈물이 정말 줄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너무 쉽게 잘 울어요. 항상 마음속에 뭔가를 담아두고 있나 봐요. 우는 걸 연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지하실에서 장동식(곽도원)과 마주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저 자신(대길)이 너무 수치스러워서 울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대길을 아끼니까 장동식 앞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근데 너무 수치스러우니까 막 눈물이 고이더라고요. (마치 그 장면을 떠올리는 듯 얼굴이 일그러지며) 고광렬이 죽을 때도 하도 울어서 콧물이 주렁주렁 매달릴 정도였어요. 저는 상관없다 했는데 감독님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보기 안 좋아서 편집할 거야. 영화를 위해서”라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첫 멜로 연기에 임하는 마음의 준비가 있었다고요.
=두 여성을 어떻게 다르게 바라볼 것인가 고민했어요. 허미나(신세경)는 어린 시절에 만났던 친구다보니 나이가 들어서 봐도 항상 순수했던 시절의 눈빛으로 보게 될 것 같았어요. 반면 우 사장(이하늬)에게는 정말 확 빠져버린달까. 헤어나올 수 없는 매력의 섹시한 누나를 보는 것 같은 거죠.
-배우 유해진과 명콤비를 이뤘어요. 부자처럼 보이기도 하더라고요.
=대길이 가장 힘들 때 만나는 인물이 고광렬이에요. 제가 굉장히 몰입해 있을 때라 더 기억이 나요. 서로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 행복하게 웃고 떠들면서 전국을 유랑하는 장면. 전작의 오마주처럼 선배랑 저랑 ‘하우스’에서 도박을 하는 장면이 있어요. 그때 실제로 술을 좀 마시고 촬영했는데요, 둘 다 너무 취해가지고. 전작에서 고광렬이 한손을 잃었는데 선배가 취해서 그걸 잊고는 오른손을 막 흔드시는데…. (좌중 웃음)
-인생 역정에 따른 대길의 의상 변화를 지켜보는 재미가 상당하던데요.
=감독님께서는 영화의 빠른 진행 속에서도 변화된 대길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또 고니와 다르게 보일 만한, 대길만의 것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대길이 멋부리기 좋아하는 애라는 데 착안했어요. 그의 기분에 따라 옷의 컬러 변화가 상당해요. 감독님은 대길이 성공했을 때 거의 팝아트에 가까운 옷차림을 해도 좋겠다고 하셨고요. 그래서 사비로 옷을 엄청 많이 사서 의상팀에 전달했어요. 어떻게 연기해 나갈지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전작과 달리 <타짜2>의 엔딩 크레딧에는 T.O.P를 뺀 최승현이라는 이름만 올라갔어요.
=특별한 의미는 없어요. 다만 같이 작업한 분들이 배우로서의 제 이름을 더 알려주고 싶어서 그렇게 넣어주신 것 같아요. 저는 불리기 쉬운 탑이라는 이름을 더 좋아합니다만, 앞으로 연출자께 맡기려고요.
-곡 작업도 하고 있나요. 빅뱅 앨범을 기다리는 팬들도 많을 거예요.
=요즘 공격적으로 곡 작업에 몰두하고 있어요. 연기하면 음악이 하고 싶고, 음악하면 연기가 하고 싶어요. 청개구리인가 봐요. 그런 게 또 제게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요. 이 얘긴 처음 하는 건데요. 앨범이 언제 나온다고 약속하고 싶지 않아요. 빅뱅은 마음에 드는 작업물이 나오지 않으면 앨범을 내지 않는 팀인데 앨범 언제 나옵니다라고 약속했다가 팬들이 배신감을 느끼실까 봐요. 이제는 그냥 나오고 싶을 때 나온다고 하려고요. 거짓말쟁이가 되기는 싫으니까요.
-<타짜2>의 개봉을 앞두고 바라는 게 있다면요.
=‘원만 한 투 없다’는 얘기를 많이들 하시잖아요. 어쩌면 그런 말이 속편을 충분히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관객이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즐겨주셨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