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
박영환 감독의 1960년작 <이별의 종착역>(출연 최무룡, 조미령, 김승호) 연출부 막내로 영화 일을 처음 시작했다. 일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촬영현장에서 감독이 왕인 줄 알았는데, 제작자가 ‘왕초’더라. 50년이 훨씬 지났는데 어찌나 인상이 강했던지 아직도 이름이 기억난다. 김해병이라는 젊은 제작자였다. 카메라 앞에서 걸레질만 넉달 하니 촬영이 다 끝났더라. 배운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이렇게 했다간 평생 영화감독은 못 되겠다 싶었다. 그래서 영화를 산업적으로 공부해 제작자부터 된 뒤 감독은 나중에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영화계 우상이 누구였나. 신필름을 운영하며 제작과 감독을 겸임했던 신상옥 감독 아닌가. 고향 충남 아산 어른이자 신필름과 가까웠던 연기자였던 강계식(신상옥의 <젊은 그들>(1955), 이강천의 <백치 아다다>(1956), 김기영의 <봉선화>(1956)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다.-편집자) 선생을 졸라 신필름을 찾아갔다. 나는 신상옥 감독 방 밖에 앉아 있었고, 강계식 선생만 들어가 얘기하고 나오더니 “가자” 그러더라. ‘빠꾸’ 맞은 거야. 그래서 “선생님, 잠깐만요” 하고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상옥 감독이 으리으리한 테이블 위에 다리를 걸치고 누운 채로 영화 잡지를 보고 있었다. 석달만 기획실에서 심부름하게 해주십시오, 월급은 필요 없습니다, 마음에 안 드시면 나가겠습니다. 신 감독을 쳐다보며 그렇게 말하니 어린 게 당돌해 보였나보다. “좋아, 내일부터 나와.” 신상옥 감독의 허락이 떨어졌다.
신필름 시절과 영화제작
경험이 없던 내가 처음부터 기획실 직원들과 경쟁이 될 리 없었다. 그래서 신필름에 들어가자마자 했던 게 혼자 앙케트를 다닌 일이었다. 당시 충무로 최고의 영화사가 신필름, 대한극장을 소유했던 세기상사, 한양영화사 정도였다. 각 회사의 기획실은 인기 라디오 드라마와 신문 연재소설의 영화화 판권을 확보하는 데 경쟁이 치열했다. 혼자서 인기 소설과 라디오 드라마 리스트를 앙케트 문서로 작성해 회사 인쇄소에서 다량 인쇄한 뒤 명동의 미장원과 빵집 같은 사람 많은 곳에 나가 설문을 받았다. 설문 조사 결과를 통계내 신상옥 감독에게 보여드렸더니 정식 발령이 떨어졌다. 출근 한달 만이었다.
신상옥 감독 밑에서 미치도록 배우며 일했다. 입사 7년째, 27살 되던 해에 기획실장이 됐다. 당시 회사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신 감독이 “하숙 때려치우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라”고 해서 신상옥 감독의 신당동 자택에 들어가 살게 됐다. 최고 스타감독 집에 들어가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았는데, 아니 웬걸, 잠도 못 자게 하는 게 아닌가. (일동 폭소) 수시로 메모장을 가져와 “야, 이 제목 어때?” “이 스토리 어때?”라고 물어보곤 했다. 회사와 집을 구분하지 않고 열정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일에 충돌이 생겨서 회사를 뛰쳐나왔다.
한해 영화 200편이 개봉되던 시절이라 극장 개봉날짜 잡는 게 가장 어려웠다. 명보극장은 당시 신필름과 전속 계약을 맺은 극장이었다. 어느 날 명보극장에서 나를 불렀다. 개봉날짜를 줄 테니 영화제작을 하라는 내용의 제안을 해온 것이다. 신필름 기획실장이었으니 아이디어가 꽤 있었다. 그날 저녁 여관방에 들어가 일주일 만에 써내려갔던 자작 시나리오가 <화촉신방>이다. 옛날 양반가에서 딸을 시집보낼 때 과거시험을 보러 오는 남자들을 잡아서 성교육이 전혀 안 된 상태인 딸 방에 넣어 하룻밤을 보내게 한 뒤 동이 트면 잡아죽이는 일이 있었다, 하는 에피소드을 재해석한 거다. 그걸 신필름 연출부였던 가까운 친구이자 나운규 선생의 아들이었던 나봉한을 불러 감독 데뷔시켰다. 개봉했을 때 사람이 많이 들었다. 덕분에 셋방살이를 면하고, 새로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화촉신방>이 끝난 뒤 만들려고 써둔 시나리오가 있었다. <남자 식모>(감독 심우섭•출연 구봉서, 남정임, 김희갑, 도금봉, 1968)였다. 당시 청계천 아시아극장에서 개봉했던 고 박구 감독의 <식모>가 전국적으로 흥행했다. 이 관객 그대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일주일 동안 극장 앞을 왔다 갔다 하며 고민하는데 갑자기 ‘남자 식모’라는 타이틀이 떠올랐다. 여성 상위 시대에 접어들 시절이었고, 식모와 눈이 맞는 남편이 하도 늘어나니까 아내가 식모를 남자로 갈아치운다는 설정. (웃음) 임하라는 코미디를 잘 쓰는 친구를 불러 어떤지 물어봤더니 좋다고 하는 거였다. 그런데 유쾌한 동반자(?)가 된 명보극장이 <남자 식모>라는 제목을 듣고 거부 반응을 보였다. 평론가들이 좋아할 만한 근사한 영화를 하자고 했다.
그 얘길 듣고 떠오른 작품이 폴란드 작가 마렉 플라스코의 소설 <제8요일>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난 폐허의 바르샤바에서 남녀주인공이 단 하룻밤이라도 사랑을 나눌 집을 찾아 헤매는 이야기다. 백결이라는 진지한 예술파 친구에게 각색을 하게 했다. 김수동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여주인공에 문희를 캐스팅했다. 영화를 신나게 만들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공산주의 영화라고 중앙정보부에 고발했다. 당시 폴란드는 공산주의 국가였으니까 그걸 꼬투리 잡아 자신의 이해 관계와 연결시킨 것이다. 이건 제작자에게 크고 불행한 사건이었다. 7, 8개월 지났을까. 검열이 끝났고, 영화 제목은 <마지막 요일>(1967)로 바뀌었다. 만신창이가 된 영화를 지방업자들에게 나눠주면서 가까스로 빚쟁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황기성사단 설립과 흥행작 <닥터 봉>
제작사 황기성사단을 설립한 건 1985년이었다. 황기성사단이 제작했던 흥행작 <닥터 봉>(1995) 얘길 안 할 수가 없다. 그 영화를 기획한 건 배우 이덕화 때문이었다. (이)덕화가 사극에서 성인 단종을 연기했는데, 어린 단종이 등장할 때는 시청률이 고공 행진하더니 덕화가 연기한 성인 단종이 나오면서 뚝 떨어졌다는 거다. 그 얘기가 머리를 때렸다. ‘대중이 아직도 영특한 아이 캐릭터를 사랑하는구나.’ 그래서 아이가 주인공인 스토리를 만들자 싶었다. 재혼을 앞둔 치과 의사가 아내 될 여자를 자신의 아이로부터 허락을 받는 코믹한 설정을 만들었다. 당시 대사를 기가 막히게 잘 쓰는 육정원 작가에게 시나리오를 맡겼고, 명기획 심재명 대표로부터 이광훈 감독을 추천받아 메가폰을 쥐게 했다. 미국영화연구소(AFI)를 졸업하고 한국에 돌아온 김형구를 촬영감독으로 고용했는데, 김형구 촬영감독이 도제 시스템을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촬영감독협회로부터 적잖은 집단적 방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는 어떠한 장애물도 뛰어넘어야 한다. 그런데 촬영 초반에 이광훈 감독이 한석규와 김혜수가 티격태격하는 장면 위주로 찍고, 아역배우를 제대로 담지 않았다는 사실을 러시 필름을 통해 확인했다. 촬영을 잠깐 멈춘 뒤 촬영장 근처 포장마차에 가서 감독과 술 한잔 마시면서 설득했다. ‘연인이 티격태격하는 장면은 수없이 봐왔다. 그건 관객수 30만명짜리밖에 안 된다. 꼬마가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면 300만명은 든다’라고 말이다. 의욕이 넘친 데뷔감독 이광훈의 동의를 받아냈다. 감독은 일주일이 지난 뒤 콘티를 바꿔 다시 찍었다. 충무로에서 이 영화가 될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기자 시사회에 첫 공개됐을 때 아주 난리가 났다. 재미있다고. <닥터 봉>은 그해 서울 관객 37만6443명을 불러모으며 청룡영화상 최고 흥행상을 수상했다.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영화제작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거다. 옛말에 ‘흥행’할 때 ‘흥’은 ‘흥할 흥’자거나 ‘갈 흥’자라고 하잖나. 흥하거나 망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소리다. 그런 점에서 영화제작자는 주판으로 예술해야 하는 골치 아픈 사람이다. 사람들이 유현목 감독은 잘 안다. 하지만 그의 뒤에 있었던 제작자 이종벽은 누군지 잘 모른다. 이종벽은 명동 스타양복점 사장으로 건달기가 있어 영화를 좋아했고, 평생 유현목 감독의 제작자로서 뒷바라지를 했던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한국 영화산업이 앞으로 발전하려면 제작자가 제대로 평가받아야 하고, 꿋꿋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제작자가 그런 건 아니지만 영화판 물을 흐리는 비겁한 젊은 제작자들을 종종 봤는데 건달은 그렇게 하는 거 아니다. 양아치나 하는 짓이지. (웃음)
데이비드 셀즈닉
황기성 사장이 가장 좋아하는 제작자는 데이비드 셀즈닉이다. 그는 MGM, 파라마운트픽처스, RKO를 거쳐 1937년 셀즈닉인터내셔널을 창립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수많은 영화를 제작한 바 있다. 생전 유현목 감독은 고집 세고 열정 있는 제작자라는 뜻으로 황기성 사장을 두고 “한국의 셀즈닉”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황기성 사장은 “영화로 훌륭한 예술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영화가 곧 예술은 아니다. 난 상업영화를 사랑한다. ‘예술성을 배제한 상업영화가 돈이 안 된다’는 것을 한국 최고 제작자 신상옥 선생으로부터 배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