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
영화제작자를 폄하해 실패한 감독이라고 부르질 않나. 감독이 되려다 좌절한 사람이 제작자를 한다, 내가 딱 그거다. 대학교 2학년이었던 1978년, 김수용 감독의 연출부로 충무로에 발을 들였다. 이후 피카디리극장과 명보극장의 선전실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1988년 영화기획사 신씨네를 차렸는데 황기성 사장님이 첫 영화 제작에 많은 도움을 주셨다. 그해 강우석 감독이 데뷔를 했다. <달콤한 신부들>(1988)이라는 작품이었는데 성적이 썩 좋질 않았다. 신씨네가 준비했던 창립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출연 이미연, 김보성, 1989)에 강우석 감독을 추천했다. 하지만 황 사장님이 강우석 감독의 데뷔작 성적이 좋지 않아 반대하셨다. 강헌 작가가 시나리오를 썼는데 진행이 잘되지 않았다. 다른 감독을 알아보던 중 지방 업자들 사이에서 이런 얘기가 들려나왔다. 고등학생 이야기는 장사가 안 된다.
어느 날 황 사장님이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시더라. 큰일났다 싶었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취재했던 중•고등학생 20여명이 있었는데, 황 사장님께 그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자고 요청드렸다. 오장동 냉면집 중 가격이 약간 저렴한 가게를 골라 함께 냉면을 먹으면서 황 사장님이 아이들의 학교생활에 대해 들었다. 식사를 마친 뒤 ‘돈이 안 되더라도 해보자’는 황 사장님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면서 강우석 감독을 연출로, 김성홍 감독을 시나리오작가로 불렀다. 하이틴 장르는 돈이 안 되는 영화라는 인식이 강했던 당시, 서울관객 16만8천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CG라는 새로운 도전 <구미호>와 <은행나무 침대>
내가 제협 이은 회장을 부러워하는 건 그가 회계사와 친숙하기 때문이다. (일동 폭소) 수에 밝다는 얘기다. 스스로 가장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게 돈을 챙기는 것이다. 중국에서 사업할 때 꼭 셋이 모여서 한다. 기획하는 사람, 진행하는 사람, 자금 관리하는 사람. 절대 혼자 하지 않는다. 충무로에서 이런저런 일들을 쭉 해왔지만 내 몫을 집요하게 챙기는 걸 잘 못했다. <은행나무 침대>(1996)의 지방 수익도 끝까지 지방 업자들에게 확인하며 직접 챙겼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결국 지방 업자들이 B카운트(A카운트가 실제 관객수라면, B카운트는 극장과 지방 업자가 추가발권 등을 통해 고의로 누락한 관객을 제한 관객수다. -편집자)까지 먹고 튀었다.
지금 관객에게 ‘A카운트’나 ‘B카운트’ 같은 말은 생소할 수 있겠다.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이라는 게 있어 매일 극장을 찾는 관객수가 한치의 오차 없이 기록되는 지금과 달리 과거에는 극장이 30명이 들었다고 배급사에 보고하면 관객수가 30명이 되는 거다. 그래서 극장과 지방 업자들이 함께 짜고 관객수를 속여 탈세하는 일이 빈번했다. 그걸 ‘표 돌리기’라고 한다. 매표창구에서 발매한 티켓을 그대로 뒀다가 중복 판매하는 수법이다. 18세 관람가임에도 <은행나무 침대>는 서울관객 68만여명을 불러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 당연히 돈을 벌었어야 했는데 표 돌리기에 당한 탓에 빚을 졌다. <편지>(1997, 서울관객 82만여명), <약속>(1998, 서울관객 66만여명), <거짓말>(2000)까지 제작하면서 겨우 빚을 갚았다. 빚졌다, 갚기를 반복하는 삶이었다.
여러 영화를 제작하면서 든 생각은 우리나라 시장이 작다는 거였다. 지금 한국 영화산업의 외형적인 성장이 거의 멈추지 않았나. 극장을 더 늘릴 수 없고, 그렇다고 인구가 가파르게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한국영화가 4500만명 시장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그 답은 <스타워즈>(1977)나 <블레이드 러너>(1982) 같은 할리우드영화가 사용했던 특수효과와 당시 할리우드에서 불기 시작한 디지털 기술에 있다고 봤다. 미래를 내다보고 ‘신씨네 컴퓨터그래픽스 아카데미’라는 이름의 CG 회사를 설립했다. 미국에서 최신식 장비를 들여왔고, 당시 영화진흥공사 현상소에서 기술 좋고 꼼꼼한 사람을 모셔왔다.
그렇게 만든 영화가 <구미호>(감독 박헌수•출연 고소영, 정우성, 독고영재, 1994)였다. <구미호>는 처음부터 시나리오가 마음에 안 들었다. “이 부분 좀 바꾸자” 그러면 박헌수 감독이 “형, 약속 꼭 지킬게. 찍으면서 고칠게” 그러고. (일동 폭소) 아휴, 욕심은 많고, 현실 적응은 안 되고, 여러 문제가 발생하다가 개봉 두달 전쯤 개봉일을 도저히 못 맞출 것 같더라. 개봉 날짜는 잡혀 있고, CG 작업 분량은 많이 남았고, 할 수 없이 일본까지 가서 겨우 마무리했다. 개봉 일주일 전에 감독, 스탭 모두 모여 기술시사회를 열었는데 한 20분 보니까 심장마비가 이렇게 오겠구나 싶더라. (웃음) CG 티가 나더라고. CG 작업 분량이 나올 때마다 심장이 덜컥덜컥하는데 도저히 못 보고 도망치듯 극장을 몰래 뛰쳐나왔다.
많은 공부가 된 이소룡 프로젝트
<구미호>를 만들면서 배운 CG 노하우를 <은행나무 침대> 만드는 데 잘 활용할 수 있었다. 컴퓨터그래픽만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 싶어 도전했던 프로젝트가 있다. 이소룡을 디지털로 되살리는 것. 할리우드에서 픽사가 디지털 기술을 막 활용할 때였다.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소룡을 디지털로 창조하려 한다는 얘길 듣고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려고 하냐며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소룡에 관한 영화제작 허락을 받기 위해 이소룡 초상권을 가지고 있던 유니버설 스튜디오(이소룡의 친딸 섀넌 리는 2009년 유니버설 스튜디오로부터 이소룡 초상권을 되찾았다.-편집자)와 이소룡의 아내를 여러 차례 만나 허락을 구했다. 그 권리를 얻기까지 5년이 걸렸다. 그때가 2001년이었다. 그해 7월 <엽기적인 그녀>가 개봉했고, 영화가 개봉한 뒤 미국에서 이소룡 영화제작 허락 계약서에 사인했고, 9월 우리 아이가 태어났다. 행운이 이렇게 겹쳐도 되는 건가. 세계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소룡 프로젝트 제작비를 1억달러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일본 게임회사 남코(Namco)가 6천만달러를 투자하겠다고 했다. 미국과 한국으로부터 나머지 4천만달러를 끌어들이면 1억달러를 조달하는 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미국에 작은 영화사 하나를 설립했다. 2년쯤 준비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두 가지가 관건이었다. 하나는 시나리오, 또 하나는 기술 개발. 액션영화라고 해서 시나리오 개발이 쉬울 줄 알았는데 정말 어렵더라. 제대로 된 액션영화 시나리오를 써본 적이 없는 데다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니까…. 기술적으로 얼굴은 최대한 이소룡과 똑같이 만들고, 몸은 비슷한 체구의 연기자를 찍은 뒤 합성하는 방식으로 제작하기로 했다. <아마겟돈> <미션 투 마스>의 비주얼 이펙트 슈퍼바이저 호이트 예트먼과 <매트릭스>의 시각효과를 맡았던 데이비드 제임스가 합류했다.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컴퓨터그래픽 스탭을 많이 만났고, 그들이 가진 기술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다 싶었다.
그런데 뭔가 불안하더라.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미국에 오신 적 있다. 한국에 돌아가시는 날, 나보고 그러시더라. 신 서방, 사무실이 몇동이지? 4동입니다. 몇호야? 404호네요. 4동 404호라니, 소름이 끼치더라. 한 무술감독은 다른 건 다 도울 수 있지만 브루스 리(이소룡)라면 돕기 힘들다고 했다.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나리오 단계마다 브루스 리의 딸로부터 컨펌을 받기로 계약했는데, 그런 상태로 스튜디오와 일을 하려니 ‘딜’이 안 되는 거다. 계약은 했지만 법적 권한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미국을 떠나기 마지막 2년 동안은 변호사를 고용해 계약서를 고치면서 보냈다. 결국 4동 404호에서 4년을 보낸 유학 생활이 끝났다. (웃음) 되돌아보니 몇 가지 실책이 있었다. 첫 번째 실책, 이소룡을 미국을 배경으로 되살리려고 했던 것. <용쟁호투>처럼 아시아를 배경으로 했어야 했는데…. 두 번째 실책, 메이저 스튜디오와 합작을 시도했어야 했다. 당시 판권 등 권리를 모두 뺏길 것 같아 메이저 스튜디오에 부정적이었다. 세 번째 실책, 언어. 영어를 잘하는 게 아니라서 정담(情談)이 안 된다. 능력도 부족했고, 용감하지도 못해 아쉽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콘텐츠를 제작하기 위해 도전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지금은 100% 중국 자본을 투자받아 <엽기적인 그녀2>(감독 조근식) 제작을 준비하고 있다. 시나리오만 7년 동안 준비했다. 새로운 출발이 될 것 같다.
저작권
영화를 제작하다보면 ‘업 앤드 다운’을 겪기 마련이다. 그때 “제작자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줄 수 있는 건 저작권”이라는 게 신철 대표의 설명이다. 신씨네의 흥행작 <엽기적인 그녀>(2001, 감독 곽재용•출연 전지현, 차태현)는 아직도 일본으로부터 2차 판권 저작권료가 들어온다고. 신철 대표는 “연간 약 3천만원씩, 13년째. 저작권이 보장되고, 이런 작품이 몇개씩 쌓이면 제작사가 안정적으로 작품을 개발할 수 있게 된다”라며 “하지만 지금 한국 영화산업은 그런 구조가 없다. 어떤 작품을 하더라도 지속 가능한 수익이 보장되는 구조가 지금 한국 영화산업에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