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임필성] 욕망에서 권태까지, 사랑이라 불리는 모든 감정에 대하여
2014-10-15
글 : 이주현
사진 : 최성열
<마담 뺑덕> 임필성 감독

<마담 뺑덕>은 <남극일기>(2005), <헨젤과 그레텔>(2007)을 만든 임필성 감독의 세번째 장편영화다. 그사이 옴니버스영화 <인류멸망보고서>(2012)가 개봉했다. 고전 <심청전>을 재해석한 <마담 뺑덕>은 연기 경력 20년 된 배우 정우성이 처음으로 전신 노출을 감행한 영화로 화제가 됐지만, 변신은 배우만 한 것이 아니다. “당대의 트렌드를 거스르는 작품”들을 만드는 바람에 흥행에서 썩 좋은 결과를 맛보지 못했던 임필성 감독이 이번엔 상업적 노선을 따르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임필성 감독의 비주류적 감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 둘 사이의 긴장이 <마담 뺑덕>을 흥미롭게 만든다. 삼청동의 한 카페로 임필성 감독이 덕이와 학규와 청이를 불러냈다.

-키 큰 배우들과 함께 무대인사 다니느라 고생 많겠다.
=배우들과 함께 찍힌 사진이 인터넷에 뜨면 악성댓글이 300개씩 달린다. 대왕오징어라고. <마담 뺑덕>의 주연이 고창석, 정우성이란 얘기도 있다. (웃음)

-장편영화로만 따지면 <헨젤과 그레텔> 이후 7년 만이다.
=배우 심은경이 <헨젤과 그레텔>로 데뷔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는데 지금 대학생이 됐으니 쇼킹하지. <설국열차> 시사회 뒤풀이 때 심은경을 만났는데 ‘감독님 맥주 한잔하시죠’ 하기에 식겁했다.

-전작들과 비교해 <마담 뺑덕>은 좀더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확실히 읽히는 작품이다.
=취향이나 스타일을 완전히 버릴 순 없지만 삽질을 하기엔 너무 타이트한 예산(순제작비 30억원)이었다. 투자사와 제작사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약속한 게 이번 영화는 제작 기한과 예산을 꼭 지키겠다는 거였다. 그런 굳은 결심을 했더니 정우성씨가 자신이 페이스메이커가 돼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더라. 타협의 순간이라든지 고통의 순간이 노골적으로 많지는 않았다.

-직접 각본을 쓰지 않고 각색•연출만 한 첫 작품이다. CJ엔터테인먼트와 동물의 왕국에서 기획한 이야기에 합류하기까지의 과정이 궁금하다.
=CJ엔터테인먼트에 투자사 관계자로는 흔치 않게 내 영화를 좋아하는 분이 계셨다. (웃음) <마담 뺑덕>이란 영화가 기획되고 있다는 얘길 들었고 연출 제의가 있었다. 완성된 영화, 특히 중•후반의 이야기는 장윤미 작가가 쓴 각본과 사뭇 다른데, 지금의 엔딩처럼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내 의견에 투자사, 제작사가 동의하면서 시작하게 됐다.

-순수성을 잃어버리는 순간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 있어 했다. <마담 뺑덕> 역시 덕이(이솜)가 사랑하는 사람(심학규)으로부터 버림받고 순수성을 잃어버리면서 전개되는 복수극이다.
=요즘은 아침 드라마와 주말 드라마에서 매일, 매주 악녀와 복수극을 본다. 악녀가 만연한 사회지만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유형의 악녀를 창조하고 싶었다. 악하지만 약하고, 사랑으로 상처받지만 사랑의 잔다르크가 되는 악녀 말이다.

-후반에는 심학규(정우성)의 딸인 청이(박소영)의 반격도 시작된다. 덕이, 학규, 청이 세 꼭짓점의 균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청이 캐릭터의 힘이 상대적으로 너무 약하지 않았나 싶다.
=나 역시 아쉽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덕이와 청이가 관계를 쌓아가는 과정, 일본에 팔려간 청이의 모습 등을 10분가량 편집했다. 테스트 시사를 해보니 관객은 학규와 덕이의 이야기를 더 보고 싶어 하더라. 청이가 주도하는 이야기를 불편해하고 힘들어하는 느낌이 있었다. 청이가 인당수-바다에 빠지는 장면도 공들여 찍었다. 영화 전체에서 비주얼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신 중 하나였는데 그 부분도 눈물을 머금고 편집했다. 덕이와 청이의 관계도 유사 모녀관계이면서 반쯤은 연인 사이처럼 그리려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단순화했다. 어찌 보면 상업적 선택의 결과다. 이 모든 이야기를 다 보여주면 영화가 2시간이 넘는다. 영화에서 정우성씨를 10∼15분이나 등장시키지 않는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남극일기> 때 1점과 10점, 평점의 극단을 경험한 터라 이번엔 그런 카오스를 겪고 싶지 않기도 했다. (웃음) 청이의 이야기가 성긴 느낌이 있지만 현재로선 최선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심학규는 근래 본 가장 나쁜 남자였다. 그런데 시나리오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초고에선 심학규가 더 심하게 망가진 인물이었다. 그나마 여성 관객이 학규를 용서하고 이해하려면 정우성씨 정도의 얼굴과 매력을 가진 배우가 연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각색의 중간 단계쯤에 우성씨에게 시나리오를 보냈는데, 시나리오는 재밌지만 학규 캐릭터는 자신이 절대 연기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라. 왜 자기를 시험에 빠뜨리냐면서. (웃음) 우성씨의 우려도 이해가 됐다. 애 있는 유부남 연기도 처음, 교수도 처음, 나쁜 남자도 처음, 19금의 센 표현도 처음이었다. 본인한테는 굉장히 큰 도전이었고, 캐릭터를 제 몸에 맞게 바꾸는 과정에서 좋은 아이디어도 본인이 많이 냈다.

-<마담 뺑덕>의 수확 중 하나는 배우 이솜의 발견이다. <헨젤과 그레텔>에 심은경과 진지희를 캐스팅한 것도 그렇고, 신인배우 발굴에 남다른 ‘촉’이 있는 것 같다.
=<남극일기>의 박희순, 윤제문 선배, <멋진 신세계>의 김무열, 정우, 고준희씨도 거의 첫 영화나 다름없는 작품을 나와 함께했다. 좋은 배우들과 작업을 많이 해서인지 좋은 배우들의 아우라나 에너지를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 <헨젤과 그레텔>을 서로 다른 유형의 아역배우들과 함께하면서 배운 것도 크다. 본의 아니게 <괴물>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에서 연기를 했는데, 배우의 경험도 연기 지도에 도움이 됐다. 이솜씨는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 촬영장에서 처음 봤다. 테크닉은 부족했지만 야생화같은 느낌이 있었다. 배우로서의 잠재력이 보였다. 영화에 대해 악평을 쓰는 기자들도 <마담 뺑덕>의 배우에 대해선 좋은 얘길 해줘서 보람이 있다.

-정사 신은 생각 이상으로 표현이 과감하다. 숏을 끊지 않고 롱테이크로 찍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배우들과 얘기를 많이 했다. 치사하게 찍지 말자, 정사 신을 위한 정사 신을 찍지 말자고. 덕이와 학규의 위험한 정사가 결국 나중에 일어나는 모든 일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수위는 높지만 섹스 신만 긴 영화로는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오히려 남자 관객은 실망할 수도 있다. 여배우를 소모시키는 식의 앵글이나 연출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성씨가 소모된다. (웃음) 이 영화는 내가 처음으로 소위 타깃층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찍은 영화다. 20~30대 여성부터, 일산과 분당의 권태기를 겪는 40대 이상 주부들까지, 각자 치명적인 첫사랑을 떠올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 우리 ‘우성 오빠’의 새로운 도전을 흥미롭게 바라봐줬으면 했다. 여성 관객이 학규와의 관계를 대리체험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서 촬영 때 여성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생각하며 찍었다. 그랬더니 우성씨가 ‘감독님, 날 너무 좋아하는 것 같다’며 당황해하더라. 그런데 우성씨도 제한상영가가 나와도 좋으니 정말 센 묘사를 해보고 싶다는 의욕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정사 신은 남성보다 여성 관객의 반응이 더 좋은 것 같다. 정사를 나누는 도중에 여자가 “절대 안 떨어질 거야” 이런 얘기하면 남자는 도망가고 싶어 한다. (웃음) 그런 대사를 집어넣은 것도 관객이 정사 신을 편하게 보는 게 싫어서였다. 위태로운 긴장, 위험한 정사라는 암시를 드러낸 표현이었다.

-초반부, 지방 소도시의 과거 장면은 임필성 감독의 영화답지 않게 어딘가 로맨틱한 데가 있다. 관람차 장면도 그렇고, 벚꽃 길 장면도 그렇고.
=그런 걸 내가 의외로 잘 찍더라. (웃음) 초반 장면은 즉흥적으로 찍은 것도 많다. 그런데 영화의 배경인 소도시가 어디인지 관객이 알아보는 게 싫어서, 그들만의 동네로 만들고 싶어서, 로케이션을 여러 군데로 나눠 찍었다. 합천, 전주, 남원을 돌며 찍었는데 그게 효과적이었던 것 같다.

-놀이공원은 어디였나.
=남원랜드. 실제로는 그렇게 쇠락한 곳이 아니다.

-후반부, 덕이가 김치찌개에 음식물쓰레기를 넣는 장면의 느낌도 좋았다.
=이솜씨와 미팅을 하는데 시나리오에서 제일 재밌는 장면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김치찌개 신이라고 하더라. 파릇파릇하고 해맑아 보이는 젊은 친구로만 생각했는데 그 안에 어둠이 있구나 싶으면서 신선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 음원 사용료에 개의치 않고 마음껏 음악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사랑의 찬가> 같은 노래를 깔아보고 싶었다. 그랬다면 블랙코미디가 됐겠지만. 이 영화는 사랑의 전 과정, 사랑으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감정을 보여준다. 순수했다가 열정적이었다가 집착하고 파괴하고 결국 파괴조차도 무료해져 권태에 빠지는 전 과정. 김치찌개 장면은 권태에 빠진 순간, 사랑의 끝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교수님’이 아닌가 싶다. 모두가 심학규를 ‘교수님~ 교수님~’ 하고 부른다. 그게 반복되니 그 단어, 그 호칭에 담긴 욕망이 부각되는 것 같아 재밌었다.
=혹시 짝사랑하던 교수님이 있었던 거 아닌가? (웃음) 영화 개봉에 맞춰 대림미술관 빈집갤러리에서 전시 <마담 뺑덕: 욕망의 서막 전>(9월20일~10월5일)이 열렸는데, 어느 여대생이 전시장 화장실 거울 앞에서 찍은 사진에 ‘교수님 저를 괴롭혀주세요’라는 내용의 글을 달아 SNS에 올렸더라. <마담 뺑덕> 태그 걸어서. (웃음) 이런 걸 봐도 그렇고, 교수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느낌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정우성이 연기하는 교수는, 예를 들어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교수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홍 감독님 영화의 팬으로서, <우리 선희>를 보면서 수컷의 어리석음을 이만큼 제대로 그려낸 영화가 또 있을까 생각하며 데굴데굴 굴렀다. 어쨌든 그에 비하면 학규는 좀더 양식적인 캐릭터다.

-차기작으로 <악의 꽃>을 준비 중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작품인데.
=7년 정도 됐다. 시나리오 버전만 10개쯤 있다. 여배우에 관한 이야기이고, 남자들의 환상을 파괴시켜줄 악녀 시리즈가 될 것 같다. 각본은 70% 정도 완성됐고 <마담 뺑덕>보다 훨씬 강하고 세다.

-<마담 뺑덕>을 찍기 전엔 <주말의 왕자>를 준비 중이었다. 결국 투자 문제로 중단됐는데, 언젠가는 임필성의 코미디를 보고 싶다.
=<인류멸망보고서>를 좋아하는 분들도 내게 이상한 코미디 감각, 미국식 코미디 감각이 있다고들 한다. 개인적으로는 극단적인 코미디가 현실을 얘기하는 코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정말 존경하는 감독 중 한명이 시트콤 <하이킥> 시리즈의 김병욱 감독이다. 그런데 블랙코미디건 뭐건 투자사에서 좋아해야 가능한 이야기 아닌가. 기발한 기획이라 생각하고 얘기해도 투자사에선 반응이 영…. (웃음)

<마담 뺑덕>의 후반부엔 ‘상업적 고려’로 편집된 장면들이 꽤 있다. 후반부만 따로 떼어내 작정하고 디렉터스컷을 만들어도 재밌겠다고 얘기했더니 임필성 감독은 이렇게 답했다. “영화가 잘돼야지 그런 것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영화를 좋게 본 분들을 위해 감독판을 만드는 건 좋은데, 보통의 관객에게 감독판은 불편한 버전일 수 있을 거다.” 여전히 자신의 취향은 대중적이지 않다는 얘기인 동시에 상업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서 고민이 깊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심하게 엣지 있는” 영화를 만드는 임필성 감독은 그렇기 때문에 늘 ‘다음’이 궁금한 감독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