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뺑덕>의 한적한 놀이공원, 덕이(이솜)는 하루에 10명이 올까 말까 한 놀이공원 매표소에서 일한다. 그저 멍하게 밖을 내다보거나 깨작깨작 낙서를 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 그 앞에 학규(정우성)가 나타난다. 영화 첫 장면의 흩날리는 벚꽃처럼 순식간에 쏟아지는 강렬한 호기심. ‘저런 비주얼의 남자가 도대체 이런 촌동네에 왜 있는 걸까.’ 덕이는 초현실적 정경 앞에 넋을 잃는다. 그리고 돈을 꿀꺽 삼켜버린 자판기 앞에 멍하게 서 있는 학규에게 다가가서는 익숙한 동작으로 자판기를 탁 친다. “이건 때려줘야 돼요.” 묘하게도 그 장면은 한참 뒤 학규에게 버림받고 변하게 되는 덕이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나쁜 놈(학규)은 때려줘야 돼요’쯤 될까. 학규가 먹을 찌개에 쓰레기를 넣어 끓이고, 욕조에서 몸싸움을 하기도 한다. 거침없이 순수하고 착했던 아이, 주변 사람들에게 잘하는 그저 밝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전혀 예상치 못한 삶의 행로로 들어선다.
놀이공원에서의 첫 만남 장면은 실제 첫 촬영이었다. 3막 구성의 <마담 뺑덕>에서 임필성 감독은 되도록 시간과 감정의 흐름에 맞게 촬영순서를 안배했다. 고전 <심청전>을 욕망의 텍스트로 변환시킨 <마담 뺑덕>은 서서히 예열되어가며 적나라한 감정의 전시로 나아간다. “화창한 봄날의 놀이공원, 첫 촬영의 긴장감과 설렘이 함께했다.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8년 전 덕이 모습을 보니까 진짜 촌스럽더라. (웃음)” 물론 이때까지는 좋았다.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솜 특유의 매력이라고 얘기하는 ‘승천하는 광대’의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 그로부터 시작된 사랑의 감정도 여느 연인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거닐고, 거리의 화가가 그려주는 초상화가 마냥 신기하다. 하지만 이솜이 말하는 대로다. “갑작스레 휘몰아친 첫사랑의 감정이 큰 것만큼 더 큰 상처를 받고 변한다”.
<마담 뺑덕>의 임필성 감독과 이솜은 이재용 감독의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2012)에 함께 출연하며 만났다. 웃기고 좋은 ‘동료배우’는 감독과 배우로 만나자 돌변해 겁부터 줬다. “영화를 촬영하면서 인당수에 빠지는 느낌도 들고, 무인도에 홀로 갇히는 느낌도 들겠지만 잘 이겨내면 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어쨌건 나더러 잘하라는 얘기였다. (웃음) 그래도 스트레스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연기라는 게 하다 보니까 계속 욕심이 생긴다. 아무리 작은 역할이라도 어떤 캐릭터를 딱 맡으면, 그 욕심이 계속 부풀어 오른다.” 관찰자 입장에서 볼 때 이솜이 지닌 개성은 임필성 감독 특유의 장르적 정서와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적잖다. <남극일기>(2005), <헨젤과 그레텔>(2007), <인류멸망 보고서>(2011), 그리고 영화 속 감독으로 출연한 <아티스트 봉만대>(2013)에 이르기까지 대체불가능한 자기만의 뚜렷한 색깔을 가진 감독 임필성과 이솜의 만남이 기대됐던 것도 그 때문이다. 게다가 이솜은 <마담 뺑덕>의 제안을 받기도 전에 어쩌다보니 임필성 감독의 단편, 장편영화를 모조리 보았다고 한다. 둘의 만남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다. 현재 배우로서 이솜을 사로잡고 있는 고민이, 제때에 제대로 된 ‘물’을 만난 것만 같은 긴장이랄까.
눈이 멀어가는 학규의 반대편에서, 독하고 잔인하게 변해가는 덕이의 모습은 터져버릴 듯 팽팽한 정서를 자아낸다. 긴장되면서도 즐거웠던 1막이 지나, 학규로부터 버림받고 난 다음 2막은 신경질적인 예민함으로 가득하고, 3막에 이르러 학규를 향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은 정신없이 뒤범벅된다. 영화의 감정적 흐름을 따라 거의 순서대로 촬영할 수 있었기에, 배우 이솜에게 <마담 뺑덕>은 매 순간 어떤 단계와 관문을 돌파하는 느낌을 줬다. 일찌감치 모델로 활동하던 와중에도 순간순간 배우를 꿈꿔왔던 그가 드디어 뛰어넘음으로써 ‘배우의 증명’을 확인할 수 있는 장애물을 만났다고나 할까. “거의 매일 뭔가 훈련받는 기분이 들었다. 임필성 감독님은 ‘배우는 힘들수록 더 좋은 연기가 나온다’는 마인드를 살짝 가지신 분이라(웃음) 매 회차 쉽게 넘어갈 수 없었다. 나 또한 무조건 시키는 대로만 하지는 않았다. 열띠게 토론도 하고 의견도 많이 냈다. 나만큼 감독님도 힘들었을 거다. (웃음)”
문득 연기의 레퍼런스가 궁금했다. <마담 뺑덕>이라는 작품으로 불쑥 뛰어들 때에는 모종의 가이드가 필요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때문이었다. 임필성 감독이 이솜에게 추천한 책은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 <그로테스크>였다. “<그로테스크>는 병든 사회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여자의 심리를 잘 그려낸 작품이었다. 덕이가 왜 그렇게까지 복수에 집착하는지, 8년 뒤 ‘세정’으로 이름을 바꿔 등장하게 될 때 많은 도움이 됐다.” 감독의 또 다른 추천작으로는 <졸업>(1967)과 <데미지>(1992)도 있었다. “<데미지>는 오래전에 봤을 때도 폭풍 같은 사랑 뒤의 쓸쓸함의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었다. 영화를 준비하며 다시 보니 전혀 다르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리고 케이트 윈슬럿이 이웃집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리틀 칠드런>(2006)도 좋았다. 뭔가 예기치 않게 몰아치는 그런 감정의 굴곡이랄까. 아, 물론 <미져리>(1990)도 다시 봤다. (웃음)”
그럼에도 이런 과정들을 거쳐 온전하게 서 있어야 했던 건, 역시 그 모든 것을 직접 헤치고 빠져들어야 하는 이솜 그 자신이었다. 카메라가 돌아가는 순간 오직 스스로 답을 얻어내야 한다는 다짐, 그것은 <맛있는 인생>(2010)으로 설레며 데뷔하던 그 순간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담 뺑덕>에서 답을 찾기가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역시 덕이의 8년 뒤 모습이었다. 한 단계, 두 단계 나아가면서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감정의 장면들이 있었던 것. “8년 뒤에 돌아온 덕이는 무척 차갑다. 연기도 연출도 차가워야 했다. 단지 학규에 대한 ‘애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부족한, 하여간 아무리 상상해도 그 변화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동시에 감독님과 가장 많이 토론했던 장면은 덕이가 눈이 먼 학규를 면도해주는 장면이었다. 도대체 학규의 면도까지 해주는 그 감정의 정체는 뭘까. 게다가 마치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베인 상처의 피를 핥기도 한다. 이미지와 정서 모두 혼란스런 장면이었다. 그처럼 사실상 덕이 혹은 세정은 감정이 왔다갔다한다. 아직 충분한 돈이 있다며 ‘그래, 끝까지 가보자’라고 할 때는 손발이 좀 오그라들기도 했는데(웃음) 거듭하다보니 애초에 턱없어 보이던 진지함이 이해되더라. 덕이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그러면서 새삼 깨달았다. 나는 안 해본 걸 해볼 때, 뭔가 뿌연 안개 속에 뛰어들 때 쾌감을 느끼는 배우라고.”
그런데 아직 명쾌한 답을 찾아 안개 속을 빠져나온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진정 답을 찾았는지는 관객의 평가로 남겨두고 싶다(웃음)”며, “이 복잡한 감정이 정리되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고 했다. “뭐랄까, 촬영이 끝났는데도 별로 실감이 나지 않는 그런 느낌? 전에는 영화 촬영이 끝나면 마냥 신나거나 아쉬워서 눈물도 흘리고 했는데, <마담 뺑덕>은 그런 게 없었다. 계속 텅 빈 느낌이 남았고 허전했다. 즐거웠던 장면은 즐거운 대로, 아픈 장면은 아픈 대로 잔상들이 오래 남았다. 특히 지워지지 않는 장면은 폐병원에서 촬영한 신이었다. 덕이는 학규에게 그것도 사랑이었냐고 묻는다. 나도 그렇고 그 장면을 촬영하며 운 스탭들이 꽤 있었다. 물론 감독님도. (웃음)” 그렇게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이솜은 이야기의 맥락과 무관하게 갑자기 ‘바보’라고 낮게 속삭였다. 덕이를 두고 마치 답답한 친구 얘기하듯 불쑥 내뱉었다. 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덕이는 내가 연기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제 그냥 오랜 친구 같다.”(웃음)
magic hour
다른 내가 되는 짜릿함
<마담 뺑덕>에서도 그랬지만 나는 배우로서 어떤 ‘변신’을 할 때 쾌감을 느낀다. 예상하지 못한 캐릭터가 되기 위해 의상과 분장을 할 때,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완전히 달라진다. 김지운 감독님의 <더 X>(2013)에서 그런 변신의 쾌감을 처음으로 느껴봤다. 물론 총을 들고 좀 요상하게 변했다. 그런데 나는 나의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흥미롭고 좋다. 배우를 꿈꿨을 때부터 그려온 그런 모습? 배우는 기본적으로 변신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모습과의 괴리가 크게 느껴질수록 오히려 더 좋다. 게다가 <더 X>에서 자동차 액션을 직접 다 했다. 그냥 나더러 하라고 하시더라. (웃음) 하지만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됐을 때, <더 X>는 영화제 운영과 관계된 다른 일로 더 화제가 됐다. 그래서 무대인사에 참석한 기자들로부터 영화나 연기에 대한 질문은 별로 받질 못해서, 김지운 감독님과 “우리 여기 왜 서 있지?” 그런 얘기를 나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