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16일부터 분노심과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온갖 통각이 날을 세워 편안한 날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샌가 더러 편안한 날이 찾아왔고 더러 친구들과 낄낄대며 가벼운 수다를 떠는 날이 찾아왔다. 더러 4월16일을 잊게 되었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느냐는 진심도, 반드시 기억하리란 각오도, 시간이 약이 된다는 진리에 무릎을 꿇어갔고 이에 대해 굴욕감이 찾아왔다. 그런 때에 <다이빙벨>을 보았다. 통각이 다시 날을 세워, 분노와 수치와 죄책을 회복할 수 있기를 다만 기대했다. 영화가 끝나자 박수조차 시원하게 칠 수 없었다. 통각이 일제히 다시 솟구쳐올랐고 더 세차게 어금니를 깨물었다. 눈물이 쏟아졌다. 박수는 뜨겁지 않았지만 눈물은 뜨거웠다. 통각이 서서히 사라지고 망각이 서서히 찾아오기 시작하는 이 시점에 이런 영화가 우리 앞에 나타나주어서, 고마웠다.
영화의 의도일 리는 없겠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이 규명되는 길이 얼마나 험난할지를 다시 한번 깨달아야 했다. 해경과 정부와 언론은 짐작보다 더 무능하고 짐작보다 더 교활했다. 해경은 아이들을 구하려는 의지보다 자신들의 무능이 들켜서는 안 된다는 의지에 더 필사적이었다. 들켜서는 안 되는 무능을 감추는 일에 가장 유능했다. 무능과 유능이 국민의 안전과 완전히 정반대로 발휘되고 있었다. 죽어가는 아이들을 한명이라도 더 살리겠다는 의지는 볼품없이 무너져야 했고 무너졌다.
‘다이빙벨’이라는 장비는 이 거대한 참사 앞에서 볼품없이 무너진 많은 것들 중 하나였다. 영화 <다이빙벨>은 ‘다이빙벨’이라는 장비를 바로 그러한 상징으로 활용했다. 이종인 알파잠수기술공사 대표는 ‘다이빙벨이 과연 구조에 도움을 줄 만한 획기적인 장비였는가’를 입증할 기회조차 얻질 못했고,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해경은 치밀했다. 방해와 은폐에만 집중했기 때문에 치밀함이 가능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려는 게 목적이었던 이종인•이상호팀은 증거 포착에 안배를 할 겨를도 없었다. 영화가 실질적으로 제공하는 액면 그대로의 이 진실만으로도 실은 충분했다. 구조와 관련된 모든 방법을 동원하고 싶었던 실종자 가족들 편에 누가 서 있었는지를 더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경과 언딘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신랄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언론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이빙벨은 실패를 하여 철수했다고 보도했다. 철수하기 이전에 발빠르게 그랬다. 실패를 기다린 듯이 그랬다.
구조에 무능하고 은폐에 유능한 해경, 책임에 무능하고 감시에 유능한 정부, 진실에 무능하고 날조에 유능한 언론. 이 셋은 공통점이 있었다. 국민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한다는 것. <다이빙벨>은 우리가 진실을 위해 싸워야 할 장벽이 얼마나 단단하고 높고 교활한지를 보여주지만, 승묵 아버지의 후회에 찬 울먹임을 마지막 장면으로 제시했다. 관객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우리 안에 도사린 커다란 후회가 승묵 아버지의 후회와 해후하여 흘리는 눈물이었다. 사진작가 노순택의 표현을 빌리자면, ‘무능한 풍경’의 가장 사악한 ‘뱀’. 이 역할을 국가와 언론이 도맡고 있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목격하고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일은 결코 무능이 아니다. <다이빙벨>을 보고 난 뒤 더 막막한 현실과 더 신랄하게 마주해야 하는 일도 그럴 것이다. 시인 허수경이 오래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