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염정아] 소박함의 힘을 믿는다
2014-11-10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오계옥
<카트> 염정아

길쭉하고 가냘픈 몸의 곡선을 그대로 살려 도도하고 까칠하며 새침한 캐릭터를 두루 걸쳐온 여배우. 염정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다. 그런 염정아에게 <카트>의 한선희는 지금까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던 분위기의 캐릭터다. 이번만큼은 염정아의 큰 키가 더없이 껑충해 보이고, 호리호리한 몸은 있던 특징도 없애버린다는 유니폼 속에 흔적도 없이 파묻혀버린다. 그녀가 구부정한 어깨로 주변의 눈치를 보며 이리 뛰고 저리 뛸 때면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 같아 위태롭다. “모니터 보면서 알았다. 내 큰 키, 그게 되게 안쓰러워 보이더라.” 그렇게 염정아와 마주앉아 염정아와 한선희를 견줘보다가 문득 염정아는 한선희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더 마트’의 비정규직 사원 한선희는 정규직 전환을 눈앞에 두고 있다. 5년 동안 단 1점의 벌점도 받지 않았고 갖은 연장 근무도 군소리 없이 해왔으니 이번만큼은 희망을 걸어본다. “선희는 우리 엄마처럼 희생적이고 책임감 강한 보통의 아줌마다. 회사 덕에 아들 태영(도경수)과 딸 민영(김수안)을 먹여살릴 수 있으니 돈 좀 안 받고 일 좀 더 하면 어떤가. 선희는 이렇게라도 회사에 다닐 수 있다면 그걸로 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바보처럼 보일 만큼 버티고 사는 선희가 뭘 해도 똑소리 날 것 같은 염정아와 곧바로 겹쳐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염정아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역할 잘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있었다. 뭐든 씩씩하게 해나가는 편이다”라고 말하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이런 염정아를 부지영 감독도 알아본 것 같다. “<범죄의 재구성> <오래된 정원>의 정아씨 이미지를 좋아한다. 화려한 게 아니라 생존 능력이 강한 인물들이 아닌가. 그런 점이 생활 밀착형 인물인 선희와 맞을 것 같았다.”

실제로도 염정아는 여섯살, 일곱살 아이를 둔 “생활력 있는” 엄마이다. 그렇기에 염정아는 생계의 최전선에서 아이들만 바라보며 우직하게 달려가는 선희를 조금은 더 이해할 것 같았다. 그러니 선희가 문자 한통으로 근로계약 해지를 통보받았을 때나 부당한 처우에 대항하며 어떻게든 자신의 목소리를 내보려고 애쓸 때 염정아의 마음도 크게 동요했다. “나도 <카트>를 통해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처지를)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한 게 아닌가. 그런데 (선희의 상황) 이건 좀 부당하지 않나. 상당히 충격적이었고 화도 많이 났다. 영화라서 더 극화된 것일 수도 있으나 실제는 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차분히 말을 잇던 염정아가 잠시 침묵했고 이내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촬영을 마친 지 6개월이 지났는데도 ‘사람대접’ 하나만을 요구하며 칼바람 부는 거리에 섰던 선희와 선희의 동료들을 떨칠 수 없었나 보다. “원래 내가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닌데 이번 촬영하면서는 눈물이…. (황)정민 언니도 (문)정희도 참 많이 울었다. 조합원들(역을 맡은 배우들)은 모니터 보면서 또 펑펑 울고.”

어째서 자신이 해고돼야 하는지 이유조차 모른 채 쫓기듯 회사를 떠나야 했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실화에 바탕한 <카트>를 작업하면서 여배우들끼리도 “끈끈한 동지애”가 생겼다. 염정아는 선배 김영애와 후배 배우들 사이를 오가며 분위기를 살폈고 몸소 화장실 청소까지 해가며 일하는 공간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 “우리가 써야 하는 공간인데 금방 더러워지더라. 겨울에 촬영해서 창문도 못 여는데 그러면 안 되잖나. 그런데 또 동생들이 전부 나서서 당번까지 정해가며 만날 반짝반짝 닦더라. (웃음)” “여탕 같았던” 편안하고 뜨끈한 현장 분위기에 염정아도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배우라는 생각을 안 하고 평범한 아줌마처럼, 쉴 때도 누워 있고 계속 먹고…. 그러다 보니 살이 많이 쪘더라. 극중에서 선희가 뛰는 걸 보고 문정희가 ‘언니, 대박이야’라며 웃을 정도였다. (웃음) 근데 ‘아, 나 살쪄서 어떻게’가 아니라 ‘저때 살이 찌길 잘했구나’ 싶더라.” 그렇게 염정아는 한선희가 되었다.

염정아는 엄마, 아내, 주부로서의 삶을 누구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배우다. 그런 평범한 일상이 그녀가 배우로 활동할 때 되레 에너지가 되어준다. 일상의 소중함, 소박함의 힘을 믿는 염정아이기에 그녀는 끝까지 선희를 응원하고 싶어 했다. 선희의 평범한 일상, 선희의 삶의 에너지가 깨지지 않기를. “잘 몰랐던 그녀들의 삶을 이렇게라도 알아준다면, 현실이 조금은 바뀌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해본다.”

스타일리스트 이보람 실장•헤어 김승원 실장 메이크업 오현미 원장•의상협찬 Time, 지미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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