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를 다루는 사람들은 장르에서 가장 진부한 영역을 아무런 잔재주 없이 심각하게 다루는 것에 유혹을 느낀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신작 <인터스텔라>도 그런 작품일 수밖에 없다. 가장 근원적인 SF영화를 만들려고 할 때 지구를 떠나 장대한 우주로 진출하는 용감한 우주비행사의 이야기만큼 여기에 적합한 소재가 있을까?
<인터스텔라>는 이런 우주비행사 이야기의 클리셰와 원형을 총동원한 영화다. 하나씩 짚어보자. 1. 갑자기 나타난, 다른 은하계와 우리 태양계를 연결하는 웜홀, 2. 그 너머에 존재하는 거주 가능한 행성, 3.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른 시간왜곡현상, 4. 인간과 인공지능과의 관계, 5. 고도로 발달해 신의 영역에 도달한 지적 존재…. 영화는 이들이 낡아빠진 소재라는 것을 전혀 모른 척, 심각하기 그지없다. 얼마나 심각하냐면 이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 중 유머감각이 있는 존재는 오로지 로봇뿐이다. 그렇다고 이 소재가 낡았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이들은 끊임없이 상상됐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현실화된 적 없는 가상의 미래다. 여전히 이야기되어야 할 소재인 것이다.
수많은 선배들의 영향이 보인다. 모두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발견할 것이다. <인터스텔라>는 원시시대의 도입부를 제외하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갔던 거의 모든 길을 간다. <콘택트>의 테마와 과학이 겹치고, 제임스 블리시의 <우주도시> 시리즈나 조 홀드먼의 <영원한 전쟁> 그리고 로버트 A. 하인라인의 거의 모든 소설들의 메아리가 들린다. 이 정도면 우주여행을 다룬 주류 SF영화와 소설의 총집합처럼 보일 정도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차별점은 무엇인가. 영화는 선배들이 제시한 목적지를 따르기는 하는데, 가는 길에서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타스’와 ‘케이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우주선 로봇들일 것이다. 이들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2010 우주여행>에 나오는 HAL 9000에 대응하는 캐릭터이고 선상 반란을 제외하면 스토리와 역할이 거의 일치한다. 하지만 정작 다루어지는 방식은 다르다. 이들은 말투에서부터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기존 SF 로봇들과는 전혀 다른 특이한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아직까지 이런 틈새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지경이다.
그러나 <인터스텔라>와 다른 영화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영화의 하드SF적인 속성이다. 하드SF는 영화 매체에서 쉽게 다루기 어려운 소장르다. 2시간 안의 영상 매체에서 다룰 수 있는 과학 개념에는 한계가 있다. 저예산이라면 작정하고 대사 위주의 하드 SF를 시도할 수도 있지만, 특수효과를 잔뜩 사용한 대자본의 할리우드영화일 경우는 한계가 더욱 분명하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대표적인 하드SF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이 영화에서도 과학의 비중은 의외로 크지 않다.
<인터스텔라>는 하드SF영화로서 역사의 최전방에 서 있다. <그래비티>와 같은 선례가 있지만, 그 영화는 SF로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고 설정의 일부는 과장되어 있다. 하지만 <인터스텔라>는 적어도 외계에 나간 뒤부터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때까지 교과서에 나온 것 이외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는 우직함을 보인다. 단지 영화는 이를 위해 가장 최근의 교과서를 선택하고 이를 적극 이용한다. <그래비티>보다 더 적극적으로 SF이면서 더 과학에 충실한 영화이다. 그 결과 영화 속 인듀어런스호 승무원들의 모험은 지금까지 어떤 SF영화도 가본 적이 없는 현실성과 경이의 극한에 도달한다. 얼핏 보면 어울리지 않는 이 두 단어가 한 문장 안에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 영화가 얼마나 독한 SF인지 보여준다.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면 영화의 단점 역시 장르의 관습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영화는 독한 SF인 만큼 독한 멜로드라마이긴 하지만 그에 동원된 인간 드라마는 장르의 설정에 갇혀 뻣뻣하고 어색해 보인다. 무엇보다 그럭저럭 인종과 성별을 배려한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모든 재미있는 일은 ‘백인 남성’ 주인공에게 돌리는 낡은 습관이 자꾸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