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인생의 공허를 들여다보며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는 일
2014-12-25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사진 : 씨네21 사진팀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 인터뷰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간명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감독의 속마음이 듣고 싶은 영화에 속한다. 그에게 줄리엣 비노쉬와의 관계에서부터, 이 영화에 등장한 인물과 삽입된 영화 클립, 그리고 캐릭터의 구상 등에 대해 물었고, 그는 지극히 개인적인 단상을 더해가며 시적인 답을 보내주었다.

-앙드레 테시네의 <랑데부>(1985)에서 당신은 시나리오작가로, 줄리엣 비노쉬는 주연배우로 함께 작업했다. 이후 근 20년 만에 당신의 영화 <여름의 조각들>에서 감독과 여배우로 다시 작업했다. 이런 경험이 이 영화를 떠올리게 된 계기가 됐다고 당신은 말한 적이 있다. 당신과 줄리엣 비노쉬 사이의 실제 인연이 어떻게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부추겼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나와 줄리엣은 우리의 영화 인생 초반에 처음 만났다. 그게 바로 내가 앙드레 테시네와 함께 시골에서 온 배우 지망생 니나의 이야기를 담은 <랑데부>라는 영화의 각본을 썼을 때다. 당시 스무살이었던 줄리엣은 그 영화를 통해 유명해졌다. 물론 그 영화는 내 경력의 시작이기도 했다. 그해 말에 나는 첫 장편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적어도 나는 내가 그녀에 관하여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나 허우샤오시엔보다는 좀더 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줄리엣 비노쉬는 키아로스타미와 <사랑을 카피하다>를, 허우샤오시엔과 <빨간풍선>을 작업했다). 그들은 그녀와 함께 일하기 전까지는 대화해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의 배경도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난 그들과는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그녀와 내가 가진 그녀에 대한 환상을 뒤섞어 인간으로서의 줄리엣을 바탕으로 한, 그녀를 위한 이야기를 쓰게 될 것을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이 프로젝트를 제안했을 때 줄리엣 비노쉬의 반응은 어땠나.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그녀가 제안한 내용들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

=사실은 줄리엣이 내게 먼저 “왜 우리는 그동안 함께 괜찮은 영화를 만들려고 시도하지 않은 걸까?” 하고 물어왔다. 그 말은 우리가 함께했던 <여름의 조각들>에서처럼 수많은 캐릭터 중 한명이 되고 싶다는 말이 분명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줄리엣과 내가 공유했던 시간들에 대한 나의 단상을 노트에 적어나갔다. 우리는 서로 등장인물들에 생명을 불어넣으면서 마침내 오랫동안 존재해오길 바라던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당신은 어떤 점 때문에 이 영화가 중년의 스타 여배우와 그의 여비서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나.

=줄리엣이 연기한 마리아는 단지 과거를 돌아보기 위해 나온 인물이 아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기 위해 과거를 들여다보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영화 속에서 마리아는 인생의 공허를 들여다보는 동시에 20년 전 자신의 모습을 갖춘 어린 여인 발렌틴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마리아의 마음은 아직 변하지 않았지만 주변 세상은 변했고 세상을 발견해가는 과정에서 함께했던 그녀의 처녀성과 젊음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한편으로는 원래 자신과 가상의 공인으로서 자신, 그 둘 사이에 있던 경계를 서서히 지워나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말로야의 구름현상>이라는 영상을 삽입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말로야의 구름현상>은 영화의 초창기였던 1924년, 산악 사진의 개척자 중 한명이었던 아르놀트 팡크가 촬영한 것이다. 중국의 고전 그림들처럼 산봉우리와 구름과 바람이 추상적으로 섞여 있는 괴이한 작품이다. 그는 이 작품을 흑백으로 촬영했는데, 이제는 해지고 긁힌 필름으로만 남아 있다. 거의 한 세기의 시간차를 지니고 있는데도 그 공간은 자신만의 주관성을 통해 저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다. 예컨대 나는 그 영상 속의 풍경이 가리키는 바처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차별 없이 드러내 세상을 재창조하는 문제 혹은 무언가를 제거하는 것만큼 또 반드시 드러내는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 이런 것이 바로 예술의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이 작품을 만들었다. 혹은 어떤 흐름의 시점으로 말한다 치면 아찔할 정도의 높은 정점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이 내게 산의 풍경과 가파른 오솔길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안에는 봄의 빛, 공기의 투명함, 그리고 안개 등이 존재해야만 했다. 아르놀트 팡크의 영상은 내가 실스마리아라는 지역에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마리아와 발렌틴이 리허설을 하는 과정은 현실과 경계를 신묘하게 넘나든다. 당신이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현실과 환상’ 혹은 ‘현실과 연극’에 관한 생각들을 듣고 싶다. 이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인생의 실체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마리아와 발렌틴은 일상에서 서로에게 뼈 있는 농담을 던지는 관계다. 두 사람 사이에 연극 연습이 시작되면서 대본과 현실 사이의 경계는 점차 흐릿해진다. 이러한 스토리라인은 이번 영화의 흥미를 강력하게 돋우는 요소로 작용한다. 연극은 삶과 같다. 하지만 내 생각에 연극이 삶보다 더 나은 점이 있다면, 우리가 꿈꾸는 최고와 최악의 상황들에 대한 장막을 연극이 종종 벗겨준다는 것이다.

-당신은 줄리엣 비노쉬의 짝으로 크리스틴 스튜어트를 택했다.

=지금 세상에서 여배우들의 삶은 인터넷에 흔히 공개되어 있어서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있어 암암리에 어떤 일관성을 강요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일을 선택하곤 하는 크리스틴에게 감탄해왔다. 그녀는 꾸준하게 미국 독립영화에 출연해왔으며 이번에는 어느 독특한 프랑스 제작자와 함께 유럽에서 두달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 아닌가. 그 기간 동안 적어도 그녀의 기존 세계는 완전히 차단되는 것인데도 말이다. 하지만 크리스틴은 줄리엣과 함께 연기하는 것을 선택했고 자신이 무언가를 배워갈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 같다. 나는 그녀가 스스로에 대해 매우 뛰어난 직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는 당신이 그토록 존경하는 잉마르 베리만의 어떤 긍정적인 지점을 일부 성취한 것으로 느껴진다. 혹시라도 당신 스스로 이번 영화에서 ‘베리만적인 것’을 느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영화에 등장하는 빌헬름 멜키오르 캐릭터가 베리만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동의한다. 그리고 같은 영화라도 다른 문화에서 다른 언어로 다른 배우와 다른 감독에 의해 수십번은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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