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속 여성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연희를 만나기 전 ‘팜므파탈’이라는 단어를 준비해두었다. <이중배상>의 보험회사 직원 월터가 도와준 가엾고 아름다우며 섹시하고 치명적인 여인은 결국 부자 남편을 살해하기 위해 철저한 계산하에 움직인 여성 ‘필리스’였다.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미모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 남장과 게이샤를 오가며 김민(김명민)의 수사에 혼선을 가하는 히사코에게서 필리스의 이중성이 떠올랐다. 그녀의 정체를 아는 것은 곧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의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열쇠를 얻은 것, 코믹과 어드벤처로 점철된 탐정물에 묵직한 드라마의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핵심 키워드를 읽은 것이다.
팜므파탈 이연희
“팜므파탈?” 그 소리가 멋쩍은지 이연희가 한번 더 팜.므.파.탈 하고 되묻는다. “히사코는 자신이 의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남자(김민)를 유혹하는 여자다. 대본만 볼 때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는데, 막상 실전에 들어가니 잘 안 되더라. (웃음)” 이연희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김민의 손을 터치하며 빼돌리는 게이샤 히사코의 동작에서 이내 막혀버렸다고 한다. “아! 물건을 뺏는 게 아니라 혼을 빼놓아야 하는구나. 더 강하게 밀어붙어야겠다는 기준점을 잡았다.” 1편의 한지민에 이어 속편 사건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이연희는 그 미스터리함을 섹시하고 성숙한 분위기로 표현한다. 지금까지 이연희에게서는 좀체 보기 힘들었던 연기다. “(한)지민 언니가 1편에서 기존의 청순한 이미지를 벗고 섹슈얼리티를 부각할 때 오는 강렬함이 있었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배우로서 보여줄 이미지가 많고, 관객도 인상 깊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역할이 히사코였다.” 게이샤의 손짓, 몸짓, 걸음걸이, 외양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연기. “<게이샤의 추억> <사쿠란>같이 게이샤를 다룬 영화는 다 봤다.” 한달간의 연습으로 대역 없이 춤 장면도 소화했다. “작품 하면서 늘 이런 기술들을 익히게 된다. 예전에는 그게 참 힘들고 하기 싫을 때도 많았는데 지금은 바뀌었다.” 이연희는 그 다름을 이렇게 설명한다. “즐겁고 좋다. 이렇게 역할에 주어진 과제를 통해 다양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 연습하는 게 힘들어도 재밌다.”
사극에 녹아들다
사극은 이연희에게 낯선 영역이었다. “데뷔작(KBS 드라마 <해신>(2004~2005)에서 이연희는 수애의 아역으로 출연했다)이 사극이었는데 말투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낯설고 어려웠다. 서른살 넘어서 하겠다고 했었다.” 그런 그녀에게 MBC 판타지 사극 <구가의 서>의 짧은 출연이 전환점이 됐다. 금지된 사랑을 통해 최강치(이승기)를 낳은 생모 윤서화의 절절한 감정을 표현한 이연희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절치부심’이라는 확고한 의지를 새겼다. 이 변화가 관객에게는 이내 이연희의 연기를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명확한 이유로 작용했다. “작가님 말 한마디가 자신 없어하던 나를 일으켜 세워줬다. 여태껏 기대 이하의 연기를 보여준다는 말을 들었는데,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걸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며 충분히 할 수 있고, 그 역할을 내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
자신감 품고 전진
“책임감이 커졌다. 10대 때 데뷔해서 어린 마음에 큰 부담감 없이 일을 했었다.” 1988년생, 20대 후반의 나이, 연기자로 지내온 지난 시간들이 이제 부담이자 책임감으로 작용했다. “주연이든 아니든, 연기자인 내가 안고 가야 할 것들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내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하다 보니 거기서 오는 자신감이 있더라.” 그 마음의 변화를 통해, 지금 이연희는 로맨틱 코미디도, 진중한 멜로도, 좋아하는 장르인 스릴러도 다 해보고 싶어졌다. “배우를 하다 보니 좋은 작품이라 욕심낸다고 다 할 수도 없고, 시나리오가 좋아도 맡은 역할이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고, 예산이 안 따라올 수도 있고…. 매번 선택의 기준은 어렵지만,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싶다.” 연기뿐만 아니라 연출, 편집, 의상까지 다 해내는 멀티한 자비에르 돌란의 영화를 많이 좋아하고, 멜라니 로랑의 영화를 챙겨보며, 여성감독이 전하는 섬세한 연출에도 관심이 많다는 그녀. 50부작 긴 호흡의 드라마 <화정>을 앞두고 있지만, 한편으로 자신의 새로운 면을 보여줄 수 있는 단편영화에도 욕심이 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