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집착과 결핍 그리고 죽음
2015-02-12
글 : 송형국 (영화평론가)
존 듀폰, 마크 슐츠, 데이브 슐츠 등 세 캐릭터로 보는 베넷 밀러 감독의 <폭스캐처>

레슬링 선수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는 금메달리스트이자 국민적 영웅인 친형 데이브 슐츠(마크 러팔로)의 후광에 가려 변변치 않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런 그에게 미국 굴지 재벌가의 상속인인 존 듀폰(스티브 카렐)이 88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자신의 레슬링팀 ‘폭스캐처’에 합류해달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존의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둘 사이에는 점차 균열이 생기고, 존이 마크의 형인 데이브를 폭스캐처의 코치로 새롭게 초청하면서 세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비극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세 캐릭터를 통해 본 <폭스캐처>’에 대해 영화평론가 송형국이 쓰고, <카포티>(2005)와 <머니볼>(2011) 이후 또 한편의 인상적인 작품을 들고 나타난 베넷 밀러 감독의 인터뷰를 더한다.

<폭스캐처>는 ‘역사상 가장 돈 많은 살인범’의 실제 사건을 영화화했다. 1996년 1월26일, 세계 최대의 화학기업 듀폰의 직계 상속인 존 E. 듀폰은 LA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데이브 슐츠를 자신의 38구경 권총으로 살해한다. 300만㎡가 넘는 펜실베이니아의 듀폰 사유지에는 ‘폭스캐처’ 농장을 중심으로 승마장, 사격장을 비롯해 레슬링 전용 체육관과 선수들을 위한 사택이 있었다. 슐츠는 애틀랜타올림픽 준비를 위해 가족과 함께 이곳 사택에 머물고 있다가 변을 당했다. 출동한 경찰은 다양한 총기와 장갑차까지 보유하고 있는 듀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이틀 동안이나 대치를 벌여야 했다. 듀폰은 싱겁게도 보일러를 고치려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가 체포돼 별다른 저항 없이 수갑을 찼다. 듀폰쪽 변호인은 그가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미약 상태임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3급 살인죄를 적용했고, 듀폰은 2010년 감옥에서 숨졌다.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은 재벌이 살인을 저지른 데 대해 미국 사회는 들끓었고 살해 동기에 대해 갖은 추측이 난무했다. 한국에서도 <9시 뉴스>를 포함해 뭇 언론에서 비중 있게 보도됐다. <카포티> <머니볼>의 베넷 밀러 감독이 이를 영화화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사건의 경악성이 다시 상기됐고, 지난해 칸영화제는 이 영화에 감독상을 수여한다. <폭스캐처>는 존 듀폰이 데이브 슐츠, 마크 슐츠 형제를 후원하며 팀을 꾸리고 올림픽에 출전한 뒤 데이브 슐츠를 쏘기까지 약 9년에 걸쳐 벌어지는 이야기다.

존 듀폰, 멘토가 되고 싶은 욕망

베넷 밀러 감독은 실제 존 듀폰에 비해 극중 존 듀폰의 키를 다소 작아 보이도록 연출했다. 존 역을 맡아 오스카 남우주연상 유력 후보에 오른 스티브 카렐은 작은 키에 상대방을 내려다보는 권위를 보이기 위해 턱을 살짝 들어올리며 말하는 연기를 보여준다. 스스로 획득한 권력이 아니라 물려받은 금수저에서 나오는 힘을 내보이기에 적절한 방식이다. 윗니가 보일 듯 말 듯 벌어진 입은 종종 다물어졌다가 이따금 크게 벌어지는데, 그가 언제 끔찍한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정보와 맞물리면서 공포감 섞인 서스펜스를 쌓는다. 한때 운전기사의 아들과 돈으로 맺은 친구 관계를 유지했음을 고백할 때 짧게 흘리는 자조는, 어떤 위악 연기보다 더 위악적이어서 관객의 간담은 순간 차가워진다. 데이브 슐츠를 향해 총을 쏠 때의 창백한 광기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존 듀폰은 맹렬한 수집가이자 무기광이다. 대개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수집가 취미가 더 많이 발견되는 이유에 대해 진화심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백만년 전부터 수렵과 전쟁을 맡아온 남성이 목적을 달성했을 때 부족장이 되거나 원하는 여성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등 권력에 접근하게 됐고, 이렇게 오랜 세월을 거치며 남성은 소유와 통제, 지배의 본성을 유전자에 새기게 했다. 이것이 문명사회의 물신주의와 만나면서 많은 남성은 자신만의 소우주를 거느리고 통제하는 것을 즐기게 됐다. 존 듀폰의 경우 우표에서부터 장난감, 동물 박제, 중화기, 장갑차에 이르기까지 다분야에 걸쳐 편집적인 수집가 기질을 보인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후 편모 슬하에서 자란 그는 세습된 부의 용처를 찾지 못한 채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데 열중하고, 그 과정에서 ‘돈 많은 유아’의 취향이 영화 곳곳에 등장한다. 스티브 카렐은 권력자의 표정과 어린아이의 몸짓을 병행시키면서, 존 듀폰이 가진 돈의 힘과 욕망의 유아성을 이란성 쌍둥이처럼 대조시킨다.

군 장갑차를 사들이는 데 기관총이 장착돼 있지 않다고 떼를 쓰는 장면에서는 그의 남근 집착이 노골화한다. 프로이트의 눈으로 보자면 존 듀폰은 철저하게 남근기에 해당하는, 변형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수인(囚人)이다. 어머니 앞에서 어른으로 보이고자 기를 쓰는 체육관 장면에서 관객은 그에게 측은한 감정마저 갖게 된다. 멘토-아버지가 되고 싶은 그의 욕망은 마크나 데이브가 자신을 말할 때 아예 자신을 멘토라 부르라고 대본을 써주는 대목에서 정점을 찍어 보이고, 이를 무너뜨렸을 때 그가 당기는 방아쇠의 인과관계가 어렵지 않게 설명된다. 이런 광기는 법정에서 형량을 낮추는 심신이 미약한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몸과 마음이 강하다고 믿는 무의식이 어떤 임계점을 만나 분출하는 왜곡된 강대함이다. 그래서 스티브 카렐이 연기한 존 듀폰의 평소 얼굴은 얼핏 평온하고 신사적이며, 권력자의 위엄마저 있다. <롤링스톤> <버라이어티> 등 다수의 현지 매체들은 이것이 미국 사회의 취약한 일면을 그린 것이라고 쓰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많은 미국인이 극중 존 듀폰의 얼굴에서 미국 중심주의 혹은 미국 예외주의의 허상을 본다.

마크 슐츠, 약장수의 사탕발림에 속는 할머니처럼

마크는 형 데이브와 함께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지만 싸구려 셋방에서 생라면을 부숴 먹는 처지다. 그러던 중 존 듀폰의 스폰서 제의를 받고 형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미국은 도덕과 가치를 상실했고 아이들은 롤모델도 없어. 나도 동감이야. 전부터 생각해왔던 거야.” 다이너마이트, 화약 등 전쟁물자 보급을 통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기업의 상속자 존 듀폰이 순국선열들을 기리며 말한, 알고 보면 아이러니한 이야기를 듣고는 갑자기 신념이 생긴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거창한 대의명분에 쉽게 동조한다. 하찮아 보이는 자신의 욕망이 명분 뒤에 가려지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토 달기도 어렵고 누구에게나 그럴듯해 보이는 명분이 바로 조국이고 애국이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지만 배고픈 삶을 벗어나지 못하던 마크에게 돈과 명분을 가진 존 듀폰은 외면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아픈 청춘에게 명분은 누가 제공하는가. 멘토가 한다. 존 듀폰은 얼마나 멘토가 하고 싶었던지 자선행사에서 마크가 자신을 소개할 때 “멘토이자 아버지”라고 말하도록 원고를 써주기까지 한다. 아픈 이가 많은 시대일수록 멘토를 자처하는 사람들도 넘쳐난다. 하지만 진정한 멘토는 찾아보기 어렵고 약장수만 판을 친다는 게 문제다. 아픈 이들을 모아놓고는 이것만 먹으면 다 낫는다며 약을 팔지만 치유되는 사람은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실제로 엉터리 약장수에게 약을 사먹고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한 할머니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약장수를 그다지 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스로 돈을 지불하기로 정한 자신을 더 탓한다. 그러고는 다음에 또 비슷한 결정을 한다. 약장수의 사탕발림을 들을 때 결핍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마크의 결핍은, 세계에서 레슬링을 제일 잘하지만 끝내 채워지지 않는 지점에서 돈과 명분을 만나 지속되는 결핍이다. 따라서 <폭스캐처>는 몸에서 시작해 돈으로 끝나는 이 시대의 비극을 그린 영화로 요약할 수 있다.

<폭스캐처>를 보면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가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럽다. 베넷 밀러 감독이 두편의 전작에서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을 기용했다는 연상 작용 때문만은 아니다. 수상한 시대를 가로지르는 허황된 멘토와 여기에 빠져든 멘티는 양쪽 모두, 안타깝게도 자신의 허상을 보지 못한다. <마스터>에서 프레디(와킨 피닉스)의 결핍과 <폭스캐처>에서 마크의 궁핍은 각각 전쟁 직후와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미국 사회가 겪는 정신적 빈곤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아픈 청춘인 마크는 곁에 있는 형이 진짜 멘토인 걸 깨닫지 못한 채 존 듀폰에게 동화된다. 마크 역을 맡은 채닝 테이텀은, 턱을 들고 상대를 내려다보는 존 듀폰과 반대로, 시종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상대방을 올려다보며 연기의 대구(對句)를 이룬다. 카메라는 종종 존 듀폰보다 마크를 멀리에서 잡음으로써 둘 사이의 권력관계를 해설해준다.

데이브 슐츠,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시민

영화는 얼핏 마크와 존 듀폰 두 사람의 만남과 충돌을 통해 주로 진행되는 듯 보이지만- 데이브가 피살자인 점을 차치하고도- 인물들의 3각 구도에서 빚어지는 긴장이 서사적•구조적 핵심이다. 존 듀폰과 마크가 데이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러니까 마크에게 형을 데려오라고 하거나 형의 그늘에서 벗어나라고 말할 때, 그 자리에 없는 데이브는 그 자리에 있는 마크의 위쪽 어딘가에서 강력한 자기장을 발하며 인물들과 길항한다. 그러니까 데이브는 프레임 안에 없을 때조차 화면에서 활약하는 셈이다. <폭스캐처>의 플롯은 이처럼 세 인물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며 트라이포드를 형성하는 데서 탄탄함을 보여준다.

마크 러팔로는 형이자 아버지이자 후견인으로서 취해야 하는 인자한 가족의 면모를, 투박한 레슬러의 몸짓에 담아내는 쉽지 않은 연기를 선보인다. 동생의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대한 뒤 그래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표현하는 마크 러팔로의 눈꼬리는 경이롭다. 동생이 어렵게 체중 감량에 성공해 기뻐할 때 후방 원경으로 잡힌 그의 팔과 다리에는, 자신의 움직임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설득력이 있다. 실제로 레슬링 선수 경험이 있는 그의 경기나 훈련 장면이 눈길을 끄는 건 당연하다.

극중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이후 사실상 아버지가 되어 마크를 키운 데이브는 늘 동생이 걱정이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에게 싫은 소리를 하고 나가버린 동생을 붙들어 세우고는, 달래거나 책하는 일 없이 그저 내일 있을 경기에서 상대 선수를 공략할 방법을 알려준다. 그 덕에 동생은 이튿날 경기에 이기지만 자신이 아닌 존 듀폰에게 달려가 포옹을 해도 데이브는 원망하는 기색 없이 물끄러미 바라만 본다. 존 듀폰이 미국의 일그러진 한쪽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는 데 동의한다면, 데이브는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시민으로서 한 사회의 수많은 구성원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게 좋겠다. 그런 차원에서 세 인물 가운데 가장 제정신인 데이브 슐츠가 가장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결말은 그 뜻이 깊다. 베넷 밀러 감독이 20년이 다 된 살인사건을 다시 끄집어내고 칸영화제가 이에 호응한 이유도 이같은 맥락 속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누가 데이브 슐츠를 쏘았나’를 질문하고 그 정체를 파헤쳐보는 일은 <폭스캐처>를 보는 시의성 있는 감상법이 될 것이다.

‘국민 체육 진흥’의 역사

영화 속 1980년대와 레슬링 경기

<폭스캐처>에 등장하는 1980년대 세 차례의 국제레슬링대회는 한국인에게도 친숙하다. 당시 정통성 없는 전두환 정권이 3S 정책을 추진하는 데 스포츠만큼 손쉽게 국민의 시선을 돌릴 수 있는 분야도 없었다. 정부는 5•18 광주민주항쟁 1년 뒤인 1981년 5월, 올림픽 서울 유치에 성공한다. 당시 정주영 현대 회장 등 재벌들이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오가며 동분서주했다. 본격적으로 ‘국민 체육 진흥’에 나선 정부는 이듬해부터 프로야구 등 프로 스포츠를 잇따라 출범시키고 정부와 공생 관계인 재벌 기업들은 저마다 구단을 세우고 거액을 투자한다. 이런 가운데 열린 84년 LA올림픽은 정부에 더없는 호재였다.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이 일제히 불참한 반쪽짜리 올림픽이긴 했지만 한국은 금메달 6개로 종합 10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는데, 이중 2개의 금메달이 레슬링에서 나온다. 이 대회 레슬링 자유형 웰터급과 미들급에서 나란히 금메달을 딴 이들이 데이브 슐츠와 마크 슐츠 형제다.

6•29 선언 직후인 87년 8월 프랑스 클레르몽페랑에서 개최된 세계레슬링선수권대회는 88서울올림픽 출전을 앞둔 각국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면서 예비 올림픽 성격의 대회로 주목받았다. 이 대회에서 마크 슐츠는 다시 한번 금메달을 목에 걸며 올림픽 금메달을 노리게 된다. 서울올림픽에서 마크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한 채 탈락하고, 한국 레슬링은 역시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한다. 당시 영웅으로 칭송받던 금메달리스트들에 대한 관심은 영화에서처럼 빨리 달아오르고 쉽게 식었다. 다만 재벌이 스포츠를 적극 후원하기로는 우리나라가 단연 금메달감으로, 영화 속 존 듀폰을 능가한다. 80년대 대한체육회장에 정주영 회장(현대그룹), 대한양궁협회장 정몽구 회장(현대정공), 세계아마복싱연맹 부회장 김승연 회장(한화그룹), 이런 식이었다. 대한레슬링협회 회장은 1982년부터 15년간 삼성 이건희 회장이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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