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14일, 베를린국제영화제 시상식이 열린 베를리날레 팔라스트에서는 드라마틱한 장면이 펼쳐졌다. 집행위원장 디터 코슬릭이 금곰상을 관객석에 앉아 있던 10살짜리 소녀에게 건네주고, 손을 잡아 무대로 이끌었다. 소녀는 무대에 올라 트로피를 번쩍 들어올렸다. “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트로피를 손에 든 소녀가 기쁨의 눈물에 북받쳐 말을 잇지 못하는 가운데 갈채가 쏟아졌다. 이 꼬마 숙녀는 올해 <택시>로 금곰상을 수상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조카이자, 실제로 이 영화에 출연해 똑부러진 연기를 보여준 아역배우이기도 하다.
금곰상 향해 달린 <택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자국의 개혁파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지난 2010년 이란 정부로부터 영화제작 금지와 가택연금형을 받았다. <택시>는 그 이후 그가 만든 세 번째 영화다. 올해 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은 불굴의 의지를 지닌 이 자유로운 예술가의 손을 들어줬다. 심사위원장 대런 애로노프스키는 <택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며 선정의 변을 밝혔다. “저항정신을 다층적으로 이뤄진 풍부한 아이디어와 연결짓는다. 창조적이고, 유머가 있고, 영리하다. 영화를 향한 사랑 고백이다.” 언론들도 <택시>에 이구동성으 로 환호했다.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은“이번 영화제에서 가장 뛰어난 출품작”이라고 극찬했고, 미국 영화산업지 <스크린>은 “자파르 파나히의 최근작 두편보다 더 성숙하고 진보했으며 재밌어졌다”고 평했다. 독일의 좌파 일간지 <타게스차이퉁>은 “금곰상 선정이 정치적이라고 보는 이들은 이 영화의 특별한 퀄리티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이 영화는 자신과 영화와 영화 만들기를 동시에 반성함으로써 제한된 조건을 오히려 장점으로 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극찬했다.
택시 안에 장착된 카메라로 촬영한 파나히 감독의 <택시>는 감독이 직접 택시를 몰며 겪는 에피소드를 엮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테헤란의 활기찬 일상과 더불어 영화는 가볍고 유머가 넘치지만, 손님들의 대화를 통해 이란 사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또한 감독과 조카도 영화에 직접 출연하고 있어 어디까지가 설정이고, 어디까지가 실제상황인지가 모호하다. 사형제도에 대한 찬반논쟁을 하는 승객, 초등학생 조카, 불법 DVD 유통업자,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는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는 인권변호사를 통해 관객은 이란 사회의 이모저모를 엿볼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
이번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선 ‘과거가 현재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들이 특히 눈에 띄었다.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파블로 라라인 감독의 칠레영화 <클럽>도 그중 하나다. 영화는 가톨릭계의 아동성추행 문제를 전면에 놓고 다룬다. 고즈넉한 바닷가 마을 주택에 전직 신부들과 수녀 한명이 산다. 이들은 소일 삼아 경주견을 함께 훈련시키고 경기에 내보내며 산다. 어릴 적 성폭행을 당했던 부랑자가 이들 중 한명을 지목해 폭로하고, 신부가 부끄러움 때문에 그 자리에서 권총자살을 하면서부터 이들의 일상은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일간 <타게스슈피겔>은 “파블로 라라인 감독은 죄와 벌이라는 그물을 매우 섬세하고 강력하게 직조했다. 그는 공포, 침묵, 은폐와 같은 억압적인 무늬에 정통하다”고 평했다.
다큐멘터리영화로는 유일하게 경쟁부문에 진출한 <진주단추>도 과거와 현재를 잇는 작품이다. 특히 예측 불허의 스토리 전개와 숨막히는 절경, 차분한 해설이 돋보인다. 파트리시오 구스만 감독의 이 영화 에세이는 단순한 다큐멘터리 도식에서 벗어나 있다. 바다와 그곳의 지형, 웅장한 경치를 보여주며 지질학적 고찰을 담고 있지만, 곧 이주민에 의해 원주민이 추방되고 학살당한 역사, 피노체트 독재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 납치고문을 당한 사람들이 수장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진주단추’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 연결짓는다. 미국 <할리우드 리포터>는 “원인과 작용에서 겉으로는 연관 없어 보이는 역사, 지리, 우주에 관해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는데, 이는 영화에 부인할 수 없는 힘을 부여한다”고 평했다. 구스만 감독은 각본상을 받았다.
다음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라두 주드 감독의 <아페림!>은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되었나’라는 문제의 답을 위해 과거를 거울 삼는다. 흑백화면 속 1830년 루마니아는 아직 중세 유럽 분위기다. 카메라는 말을 타고서 장광설을 펼치며 길을 가는 아버지와 아들을 먼발치에서 잡아낸다. 둘은 도망간 노예를 체포하라는 명을 받고 여행 중이다. 영화는 당시 루마니아 사람들의 클리셰를 보여주며 집시에 대한 귀족 보야르의 야만적 행태를 해학적이지만 사실적으로 고발한다. 감독은 “지난 과거를 솔직하고 명확하게 대면하지 않는 한 루마니아 사회는 실제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샬롯 램플링과 톰 커트니가 여우주연상과 남우주연상을 나란히 수상한 앤드루 하이 감독의 <45년>은 “우아하고 절제된 영화”(<스크린>)라는 호평과 함께 외신 매체의 별점도 가장 높았다. 케이트와 제프는 결혼 45주년 파티를 앞두고 있는 사이 좋은 부부다. 이들 사이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은 50년 전 사고로 죽은 제프의 옛 여자친구 시신이 알프스 빙하 속에서 발견됐다는 편지가 오면서부터다. 섬세한 감정과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가 놀랍다.
강한 여자들과 젊고 개성 있는 작품들
한편 올해 베를린국제영화제의 중요한 테마는 ‘강인한 여성’이었다. 경쟁부문 상영작 중 여성 감독의 작품이 3편이나 초청돼 예년에 비해 그 비중이 높았다. 이와 관련해 독일의 다른 분야에는 이미 적용되고 있는 ‘여성할당제’(여성들의 참여도를 높이자는 취지로 직무 선발과정에서 의무적으로 일정 비율의 여성을 선발하는 것)를 영화계에도 적용시키자는 논의가 핫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 어쨌든 이번 영화제에는 줄리엣 비노쉬가 19세기 북극탐험에 도전한 조세핀 피어리 역을 맡은 <노바디 원츠 더 나이트>, 니콜 키드먼이 19세기 여성 모험가이자 인류학자인 거트루드 벨 역을 맡은 <사막의 여왕>, 19세기 프랑스를 배경으로 비밀스러운 하녀를 연기한 레아 세이두 주연 <다이어리 오브 쳄버메이드>, 자유를 위해 자발적으로 남성의 길을 택한 알바니아 여성을 열연한 알바 로르와처의 <스원 버진> 등, 주체적인 삶을 살았던 여성을 그린 영화들이 고르게 포진되었다.
또한 예년에 비해 수준 높은 작품들이 고루 분포해 있어 공동수상 작품이 많았다는 것도 올해 경향 중 하나였다. 경쟁부문에서 총 9편의 영화가 트로피와 함께 고국으로 귀환하게 됐다는 것이 그 증거다. 동유럽과 중남미 영화들이 호평받았으며, 오히려 경쟁부문에서 화려한 명성으로 기대를 모았던 테렌스 맬릭과 피터 그리너웨이, 베르너 헤어초크 등의 노장 감독들은 빈손으로 영화제를 떠났다. 정치의식과 예술성을 갖춘 젊고 개성 있는 감독들을 발굴하는 데 의의를 두는 베를린국제영화제의 성격과 어울리는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독일 공영방송 <RBB>는 올해의 영화제가 “진주로 가득한 축제였다”라고 평했다. 흔치 않게 평론가와 기자 모두를 만족시킬 만한 수상 결과를 내놓으며 베를린국제영화제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