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은 찰리 채플린의 방랑자 캐릭터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된 해였다. 전세계에서 그를 기리는 크고 작은 행사가 이어졌고 조금 늦었지만 우리에게도 생생한 찰리 채플린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4월 초부터 상반기까지 찰리 채플린의 걸작 10편이 극장에서 관객을 기다리고 있다. <모던 타임즈>를 시작으로 KU시네마테크,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5편의 영화가 Part1으로 개봉하고 상반기 중으로 5편의 영화를 추가 개봉할 예정이다. Part1 5편은 4월2일부터 12일까지 아트나인에서도 상영된다. 풍문으로 들어본 사람은 많아도 제대로 본 사람은 드물다는 걸작들. 조각조각 기억하던 명장면을 한 호흡으로 감상하다 보면 전에 몰랐던 감정들이 말을 걸어올 것이다. 언제나 유효하고 지금도 필요한 이야기들. 왜, 지금, 다시, 찰리 채플린을 만나야 하는지에 대한 단상과 함께 각 작품의 리뷰와 채플린에 대한 짧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곁들였다. 지금 봐도 생생하다. 다시 봐도 재미있다.
‘안다’는 단어에는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다. 우리는 지구가 둥근 것을 안다. 사바나에서 사자가 어떻게 사냥하는지, 2차 세계대전이 얼마나 많은 이의 피를 필요로 했는지를 ‘안다’. 그것은 둥근 지구를 직접 보지 못해도, 아프리카에 가보지 않아도, 2차 세계대전을 겪지 못했어도 알 수 있는 정보다. 하지만 지식은 종종 우리를 게으르게 만든다. 아는 것과 경험한 것 사이에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거리가 있음에도 많은 이들이 둘을 동의어로 착각한다. 장담컨대 찰리 채플린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온전히 경험한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채플린의 중절모, 폭이 넓은 바지와 커다란 구두, 다듬어진 콧수염을 알지만 90분 가까운 시간 동안 채플린의 슬랩스틱을 바라보며 느낄 수 있는 시간의 무게는 모른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채플린의 격언은 쉽게 인용하지만 어떤 촘촘한 영화적 경험들이 쌓여 그 말이 완성되었는지에는 무관심하다. 채플린의 영화를 직접 보며 비극의 그림자와 희극의 호흡을 체험할 기회가 드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 다시, 새삼스럽지만 채플린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간 우리는 채플린 영화를 제대로, 온전히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여기서 제대로라는 건 극장에서 끊지 않고 통째로 감상하는 걸 말한다. 오늘날 영화를 본다는 건 다양한 의미와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작은 모바일 기기로 감상할 수 도 있고, 집에서 지루한 장면을 끊어보고 재미난 장면을 돌려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런 방식으로 소비되도록 만들어진 영화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고전영화만큼은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고전영화는 어두운 극장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보는 경험을 상정하고 제작되었다. 극장 의자에 앉아 적어도 상영시간 동안은 옴짝달싹할 틈 없이 영화에 파묻혀야 채플린 영화를 봤다고 할 수 있다. 고리타분한 사고방식이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신성시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는 것과 제대로 체험하는 것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최소한 그 정도의 노력은 해줘야 하지 싶다.
채플린 영화의 재개봉이 새삼스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DVD로 출시되고 이미 여러 차례 상영되었지만 그럼에도 채플린의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한다. 우리는 극장에서 채플린 영화를 감상하며 일시적으로나마 그 시절 관객이 되어 채플린과 호흡할 수 있다. 고전영화는 시간으로부터 박제되어 세월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을 건너뛰어 오늘, 지금, 여기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사실 채플린만큼 이율배반적인 영화인도 드물다. 당대 유행에 민감한 흥행의 귀재이면서 시대를 역행하며 무성영화를 고집한 예술가이기도 했다. ‘영화산업에서 나온 유일한 천재’라는 조지 버나드 쇼의 평가는 매우 대중적인, 동시에 이와 무관하게 작가로서의 고뇌가 묻어나는 그의 양면성을 함께 짚고 있다. 1927년부터 토키영화가 나왔지만 무성영화의 힘을 믿고 <시티 라이트>(1931), <모던 타임즈>(1936) 같은 걸작을 연이어 만들어냈다. 시류에 편승하는 대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그의 예술혼은 영화의 탄생부터 몇 십년간 쌓아올린 무성영화의 언어를 하나의 율동으로 완성시켰다.
채플린의 영화는 대개 풍자와 해학, 웃음과 눈물의 페이소스, 슬랩스틱, 인류애, 희생정신, 순수와 비련의 드라마 등으로 요약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 엉성한 말의 그물이 놓치는 것은 무수히 많다. <시티 라이트>를 보지 않고 모던발레 같은 그의 슬랩스틱 율동을 이해할 수 없고, <위대한 독재자>의 위대한 연설을 듣지 않고 그의 반파시스트 정신과 인류애를 깨달을 수 없다. 채플린을 설명하고자 하는 말은 넘쳐난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성긴 그물 같은 말로 설명하든, 방대한 자서전처럼 촘촘한 언어로 훑든 큰 차이는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자전적 이야기나 마찬가지인 <키드>(1921)를, 유럽여행에서 얻은 깨달음이 녹아든 <모던 타임즈>를, 미국에서 추방된 후 심경을 담은 <뉴욕의 왕>(1957)을 한번 보는 편이 훨씬 이해가 빠를 것이다. “연기는 본질적으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이라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슴으로 찍은 영화는 가슴으로 느끼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채플린은 영화관에서 끝도 없이 되살아난다. 불멸의 스타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