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 x cross]
[trans × cross] 이야기의 원천은 바로 나
2015-04-20
글 : 김현수
사진 : 최성열
영상과 출판 모두 사로잡은 정유미 감독

정유미 감독, 아니 이제는 작가라는 호칭이 더 어울릴 그녀는 자신의 단편애니메이션을 그림책으로 다시 엮어 출간하는 등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는 이례적인 행보를 걷고 있다. 심지어 지난 4월2일 폐막한 2015 볼로냐아동도서전에 <나의 작은 인형상자>를 출품해 무려 2회 연속으로 수상도 했다. 매체에 최적화된 방법을 누구보다 빨리 체득하고 기어이 만들어내는 신통방통한 예술가의 다음 행보는 또 어디일까 궁금해져 그녀의 작업실을 직접 찾았다.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진실된 자신만의 이야기라면, 그것이 매체의 특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녀가 미처 그림으로 옮겨 그리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애니메이션 감독이자 작가로 활동 중이다. 출판과 애니메이션 제작을 동시에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애니메이션을 어렵게 완성했는데 영화제에서만 상영되고 마는 현실이 아쉬웠다. 영화를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책의 형태로 보여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물론 책을 위한 이야기를 새로 만들 수도 있지만 먼저 만들어놨던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이후에 또 얼마든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 수 있겠다 싶어 시작했다.

-책의 형태에 상당히 공을 들인다. 양장본에 종이 재질도 독특하고 DVD도 동봉해준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대단한 결심을 해야 했을 거다.

=앞으로는 지금처럼 제작은 못할 것 같다. (웃음) 올해 새로 출간한 <나의 작은 인형상자>(이하 <인형상자>)는 1천부 이상 찍었는데 사실 다 팔아도 남는 게 없을 거다. 원하는 분들을 위해 소량만 제작하는 형태도 고민 중이다. 양장이나 DVD 등 포기해야 할 부분이 발생할 거다. 거의 실험에 가까운 도전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노력한 보상을 받았다. 볼로냐아동도서전에서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2년 연속 수상했으니 말이다. 정확히 어떤 부문에서 수상한 것인가.

=볼로냐아동도서전 라가치상에는 픽션, 논픽션, 뉴호라이즌, 오페라로 나누어 총 4가지 수상 부문이 있다. 뉴호라이즌 부문은 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국적의 작가들에게, 오페라 부문은 데뷔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지난해 수상한 <먼지아이>는 당시 해외 번역 출판사에서 뉴호라이즌 부문에 출품해 대상을 받았고, 올해 <인형상자>는 국내 출판사인 컬쳐플랫폼에서 픽션 부문에 지원해 우수상을 수상했다.

-혹시 상금도 있나.

=있으면 좋을 텐데. (웃음) 우리 입장에서는 수상 소식만으로 어떻게든 부수적인 광고 효과를 기대해보는 정도가 혜택이라면 혜택이다.

-신간 <인형상자>는 <먼지아이> 때와는 책의 판형이나 구성 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좀더 책을 위한 구성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먼지아이>로 도서전에서 상을 받고 마켓에서 책을 판매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만화책도 동화책도 아트북도 아닌 이 책을 어디에 분류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그 뒤로 시장성을 갖춘 형태와 판매를 고민하게 됐다. <인형상자>는 난해한 책이 아니라 그림책으로 바꾸는 데 주력했다. 이야기 역시 마침 그림책으로 접근하기에 적절했다.

-반면에 <먼지아이>는 분할화면 방식 구성 등 책장을 넘길 때마다 보는 재미가 있었다.

=제작지원에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먼지아이>는 만화책 부문 제작지원을 받아서 펼치는 만화책의 형식을 갖춰야 했는데 <인형상자>는 그림책 지원을 받았기에 다르게 접근했다. <먼지아이>가 그림책으로서는 약간 애매한 입장이어서 보완한 것이다.

-<인형상자>는 그림체도 애니메이션과 비교해 차이가 있다. 출간을 위해 수정한 것인가.

=애니메이션 <인형상자>는 2006년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이었다. 당시 작업 기한이 빠듯해서 결과가 많이 아쉬웠는데 그림책에서는 보완하고 싶었다. 영상은 아무래도 많이 그려야 하니까 간단하게 진행할 수밖에 없는 부분을 그림책에서는 좀더 밀도 있게 작업할 수 있었다.

-홈페이지에 공개한 졸업전시 ‘ill liquid’는 본인의 기존 애니메이션 그림체와는 전혀 다른, 마치 이토 준지풍의 그로테스크한 그림이다.

=이토 준지나 후루야 미노루 만화를 굉장히 좋아해서 그 영향이 있었을 거다. 사실적이지만 주로 선이 강조된 그림들, 이를테면 동양화에서의 인물 표현법처럼 덩어리가 아니라 선으로 표현하는 이미지를 좋아하고 오랫동안 봐왔다.

-<먼지아이>와 <인형상자>도 캐릭터 형태나 분위기가 겹치지 않는다. 고정된 캐릭터를 갖기를 원하지 않는 것인가.

=캐릭터에 대한 고민이 정말 많았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의 시그니처를 만들어야 빨리 인지도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은 욕망에 매달린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 스스로 그 생각에 발목이 잡혀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과연 캐릭터가 아니면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걸까라는 고민 끝에 결국 재미있는 작업 혹은 이야기의 일관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자고 결론내렸다.

-<먼지아이>의 ‘먼지’, <인형상자>의 ‘인형’ 등은 어떤 존재일까를 고민하다 보니 결국 마주하기 싫은 내 모습 혹은 떨쳐버리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누군가의 모습을 다양하게 투사할 수 있는 매개일 거라 생각했다.

=나는 글을 잘 못 쓴다. (웃음) 제작지원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작품 의도를 쓰는 게 너무 어렵더라. 영화를 다 끝내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쓰려다 보니 받아들이기 힘든 나, 부인하고 싶은 나에 대해 스스로 너무 싫어하는 내 모습이 마치 리듬처럼 반복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패턴을 느끼면서 어쩔 수 없이 이건 평생 안고 가야 하는 문제구나, 그렇다면 마냥 부인하고 미워할 게 아니라 좀더 수용하는 게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탄생했다. 물론 과정은 힘들고 지리멸렬하겠지만 그 끝에는 작은 발견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 과정을 거쳤을 때 더 빛을 발하는 것을 그리고 싶었다.

-여전히 연필로 하는 작업을 고집한다던데.

=연필이 작업하기 가장 편하다. 처음 그림을 배울 때부터 연필로 배웠으니까 굳이 다른 방식으로 바꿔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 물론 다른 도구를 써서 더 화려하고 멋있는 비주얼 작업을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테크닉이 좋은 편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이야기에 좀더 집중하고 싶다. 뿐만 아니라 연필로 배경이나 소품을 사실적으로 묘사할 때는 묘하게도 사실적으로 그리면 그릴수록 어떤 정서가 생기게 된다. 그런 효과를 좋아해서 계속 연필로 작업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품의 아이디어는 일상생활 속에서 찾는 편인가.

=특정 나이를 지나치면서 부딪치는 이슈들이 있다. 그럴 땐 꼭 답을 못 찾고 막혀 있던 고민이 분기별로 생긴다. 애니메이션은 <인형상자>를 시작으로 <먼지아이>와 <연애놀이> 순서로 만들었는데, 책과 만화와 그림에 갇혀 지내던 나의 폐쇄적이었던 10대 시절의 고민은 <인형상자>에, 대학에 입학해 혼자 살기 시작하면서 받았던 피해의식과 세상을 왜곡해서 받아들이곤 했던 20대 때의 고민은 <먼지아이>에 투영됐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는 연애에 대한 갈등을 겪었고 그로 인해 <연애놀이>가 만들어졌다. 지난해 결혼을 했더니 이제는 결혼생활에 대한 이슈가 생기는 중이다. 그것들이 나에게는 큰 질문임과 동시에 나 스스로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즉 성장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은 생각은 없나.

=원래 장편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었는데 가끔 생각하곤 한다. 긴 호흡의 이야기를 경험해보고 싶기도 하다. 이야기만 준비된다면 한번 해봐야겠다. 물론 지금처럼 나 혼자 작업하는 스타일대로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다양한 규칙 속으로 들어가야 할 것 같다.

-그럼 애니메이션 이외에 만화나 웹툰쪽으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건가.

=만화는 정말 잘 모르겠다. (웃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물론 즐겨보는 건 좋다. 하지만 만화처럼 내가 직접 서사를 만들어내는 건 어려울 것 같다.

-개인전시 계획은 없나.

=지난해 <연애놀이>가 자그레브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그 영화제는 수상 감독이 이듬해 심사를 봐야 해서 올해 영화제에 가게 되면 그곳에서 애니메이션 원화 전시를 할 것 같다. 국내에서는 <인형상자> 전시를 할 수도 있는데 확실하게 정해진 건 없다.

-올해 출간 스케줄이나 구상 중인 작품이 있다면.

=일단 지난해 완성을 했으나 제대로 마무리가 끝나지 않은, 목욕하는 여자 이야기를 후반기부터 작업할 것 같다. 애니메이션 <연애놀이>도 아마 그림책으로 올해 안에 출간할 테고 지금은 절판된 <파라노이드 키드>도 다시 찍어야 한다. 수정을 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괴물들이 사는 나라>와 같은 동화책을 한편 구상 중이고 그 책으로 시나리오도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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