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다운 스물다섯 시절, 얼굴이 깡패(그리고 하는 짓도 깡패)인 선배가 지령을 내렸다. “반드시 현장에 잠입해서 내밀한 사정을 담은 기사를 써와라.” 내밀이 아니라 은밀이겠지, 그렇게 궁금하면 지가 가든가, 투덜투덜. 선배가 알고 싶었던 그 현장이라는 것은 어느 저예산영화의 베드신 촬영현장이었다.
사진기자도 없이 왠지 부끄러워 혼자 볼을 붉히며 현장에 갔더니 장소가 좁아서 밖에 나와 놀고 있던 스탭 아저씨들이 나를 반겼다. “마침 잘 왔어요, 사람이 부족했는데.”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 나는 다시 한번 볼을 붉혔다. “전 취재하러 온 사람인데요?” “뭐가 궁금해, 남자배우 사이즈가 궁금해? 걔가 얼마나 작은가 하면 말이야…. 아무튼 우리가 다 알려줄 테니까 한판만 타자, 응?” 그래서 나는 자리를 잡고 앉아… 카드를 잡았다. 부하들이 일하는 사이 심심했던 대장들은 ‘말(馬) 타기’라고 부르던 자체 개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회사나 남의 회사나 대장들이란….
몇 시간이 흘렀다. 초반에 가진 돈을 몽땅 털리고 지갑까지 보여준 다음 불쌍한 얼굴로 조명감독에게 급전을 빌리며 아저씨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던 나는 이내 끗발을 세우면서 판을 휩쓸기 시작, 본전을 찾고도 3만5천원을 더 따고서야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벌써 가려고? 이렇게 가는 게 어딨어?” “자기, 타짜 아니야?” “퇴근 시간이에요. 그리고 타짜가 뭐예요?” 돌이켜보니 사기당했다는 억울함을 가득 담아 나를 보던 저예산(따라서 저임금) 스탭들의 눈망울이 아득하다.
타짜가 뭔지는 그 후로도 몇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타짜, 노름판에서 남을 잘 속이는 재주를 가진 사람(표준국어대사전). 영화 <타짜>를 보니 타짜란 노름판의 전문 기술자로서, 초반에 가진 돈을 몽땅 털리는 척하다가 순식간에 끗발을 세우며 판을 휩쓸기 시작, 본전을 찾고도 돈 가방 한두개쯤 채워서 일어나는 직업이던데…. 그날 내가 타짜였구나. 미안했어요, 하지만 전 기술자가 아니랍니다, 다만 운이 좋았을 뿐. 게다가 나는 <타짜> 속편인 <타짜-신의 손>에 따르면 어떤 타짜도 이르기 어렵다는 경지의 고수, 도박을 끊고 떠나는 ‘신의 손’이었으니, 다시 찾은 현장에서 한판을 원하는 스탭들의 간절한 눈길을 외면했던 것이다(그날은 사진기자랑 함께 갔으니까).
나는 순전히 운만으로 스탭들의 가벼운 지갑을 털었지만 대부분 도박사는 운을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얼 믿어야 할까. <쉐이드>의 전설적인 도박사 딘 스티븐스(실베스터 스탤론)는 대놓고 속임수만 믿지만, 그리고 <타짜> 시리즈의 타짜들도 난 뭐가 뭔지 모르겠으나 하여튼 속임수를 쓴다지만, 수학을 믿는 사람도 있다. 한벌에 52장에 달하는 카드 몇벌이 섞이는 걸 눈으로 읽어 카드의 순서와 그 카드가 누구에게 갔는지를 기억하고 승률을 계산해 베팅 금액을 조절하여 돈 걸 때와 빠질 때를 몇초 만에 판단한다! 누가 이럴 수 있을까, 바로 ‘레인맨’이다.
레인맨, 본명 레이먼, 특징 200개가 넘는 이쑤시개 개수를 한눈에 세는 빠른 눈과 일단 본 건 뭐든 외우는 기억력. 영화 <레인맨>의 자폐증이 있는 레이먼(더스틴 호프먼)은 종일 TV만 봐도 머리가 나빠지지 않는다는 바람직한 사실을 보여주는 산증인으로서 카지노에서 쫓겨날 때까지 오직 눈과 머리만으로 돈을 따는 천재다. <타짜>의 평 경장(백윤식)은 손은 눈보다 빠르다 했던가. 아니, 레인맨의 눈은 딜러의 손보다 빠르다.
허황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런 일은 실제로도 있었다. 영화 <21>의 원작인 실화 소설 <MIT 수학 천재들의 카지노 무너뜨리기>는 카지노를 털고 다녔던 MIT 대학생들이 모델인데, 그들은 카드 여섯벌, 다시 말해 카드 312장이 도는 블랙잭 테이블에 팀을 짜서 앉아 머릿속으로 카드를 세서 돈을 땄다. 일명 ‘카드 카운팅’, MIT 대학생들 때문에 불법이 됐지만, 대부분은 쓰라고 판 깔아줘봤자 쓰지도 못할 고도의 기술. 같은 명문대를 다녀도 법대생인 <라운더스>의 마이크(맷 데이먼)나 상경 계열인 <히든카드>의 리치(저스틴 팀버레이크)는 따라할 수가 없는, 이과생들에게만 내린 신의 축복이다.
<21>에 의하면 블랙잭의 승률은 51:49로 도박사가 카지노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게임이지만 <히든카드>에 의하면 도박은 “언제나 하우스가 이긴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 여기 제3의 길이 있다. 10대 시절 사기에 눈뜬 법대생 마이크에게 도박은 노동이자 호구지책, 일확천금을 믿지 않고 인건비라도 건지겠다는 일념으로 밤새워 포커를 쳐서 등록금을 모은다. 평 경장이 설파하는 타짜 제3의 법칙은 “욕심 부리지 마라”였는데, 마이크 또한 “양의 털은 여러 번 깎을 수 있지만 껍데기는 한번밖에 벗길 수 없다”와 “이길 수 없는 패는 일찌감치 던져버려라. 포기는 빠를수록 좋다”를 가슴에 품고 다닌다.
그처럼 건실한 마이크가 어째서 도박을 해야 하는 걸까. 등록금이 없어서다. <21>의 벤(짐 스터지스)은 하버드 의대 입학금과 등록금 30만달러가 없어서 기초수학을 연마하여 블랙잭에 써먹고, <히든카드>의 프린스턴 대학원생 리치도 등록금을 벌려고 코스타리카까지 원정을 떠난다. 통장에 1만5천달러가 있는데도 등록금을 낼 수 없고, 코스타리카에 갈 돈은 있어도 등록금은 없으니, 대체 등록금이 얼마인지 궁금하다.
카지노는 없지만 등록금은 만만치 않게 비싼 한국의 대학생들은 등록금을 벌려고 도박 대신 다단계판매에 빠진다고 한다. 몇년 전 그런 기사를 보다가 후배에게 물었다. “모모씨는 지금 남은 대출이 얼마?” “1천만원이요.” 연봉의 반이군. “다 갚아야 돼?” “… 안 갚으면?” 그 옛날 대학에 들어가 학교 신문을 읽었더니 졸업생 70%가 학교에서 대출받은 학자금을 갚지 않고 내뺀다기에 나도 한번 그래 볼까 했었는데, 지금은 가차없이 받아낸다고. 등록금은 싸지 않아도 시스템이나마 골고루 허술했던 1990년대, 참 좋았던 시절이다. 지금도 시스템은 허술하지만 우리한테만은 빡빡하지.
애 하나 심어놨는데…
도박판의 승자가 되기 위한 두세 가지 무기
연기력
전국의 장터와 논두렁을 돌면서 화투판을 벌이는 <타짜>의 평 경장과 고니는 화투 실력 못지않게 사투리 구사력 또한 현란하다. 평소엔 별로 안 친해 보이는데 부자(父子) 연기도 잘하고, 조금 있다 딸 거면서 돈 잃었다고 속 타는 연기도 잘한다. 화투 대신 바둑돌로 승부를 가르는 영화 <신의 한 수>에서도 ‘선수’라는 사람은 이런 말로 칭찬을 받지. “실력도 실력이지만 연기력이 좋아.”
공부
똑같이 카드 카운팅을 한다고는 해도, 레인맨이야 ‘맨’이 붙는 데서도 알 수 있듯 슈퍼맨을 비롯한 각종 ‘맨’급의 캐릭터이고, 현실에선 MIT의 수학 천재들도 공부는 한다(애초에 공부를 했으니까 MIT에 간 건가). 남는 시간만으로는 블랙잭 공부 시간이 모자라 수업 시간에도 공부를 하는 <21>의 벤, 공부 시간에 공부를 하는 MIT의 진정한 공부 벌레! 집에선 엄마가 차려주는 밥만 먹던 고니는 사부님 모시느라 장작 패고 물 길어다 밥하면서 화투를 공부하고, <신의 한 수>의 태석(정우성)은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은 몰골로 앉아 감방 벽에 바둑판을 그려놓고 공부한다. <라운더스>의 마이크는 착실한 법대생답게 실전과 이론을 두루 학습, 프로 도박사들의 이름과 경력을 줄줄이 꿰면서 그들의 명언을 읊는다. 나도 공부 좀 할걸 그랬지.
조직
<타짜-신의 손>이 이르기를 이북에 평 경장, 전라도에 짝귀, 경상도의 아귀라 했는데, 그중 아귀만 출세한 비결이 무얼까. 조직이다. 전편에서 팔 잘리고 도망간 아귀가 속편에서 그렇게 출세해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어. 밑장빼기를 하는지 아닌지 혼자 알아낼 수는 있어도 그걸 응징하려면 역시 ‘애들’이 있어야 한다. <쉐이드> <21> <라운더스>…. 제대로 한건 하고자 하는 도박사들은 모두 팀을 짜서 움직인다. 나도 사회성 좀 기를걸 그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