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여자와 함께 도망칠 수 있게 된 론 울프(들)
2015-05-07
글 : 박수민 (영화감독)
마이클 만 세계의 점진적 변화 <블랙코드>

IPTV로 직행한 <블랙코드>는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사이버 범죄에 맞서는 미국과 중국 요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미국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 홍콩, 자카르타 등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토르’ 크리스 헴스워스와 탕웨이, 그리고 마이클 만 감독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처참한 흥행 실패를 겪었다. 마이클 만은 극영화 데뷔작 <비정의 거리>부터 <히트> <콜래트럴> <마이애미 바이스> <퍼블릭 에너미> 등 반드시 특정 업계의 전문가인 남성들만을 주인공으로 그렸다. 그리고 <비정의 거리>부터 그들은 ‘론 울프’(외로운 늑대)로 남기로 결심했고 서서히 사랑이란 관념을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블랙코드>에 이르러서는 가상이 현실을 위협하는 세계에서 여자의 도움 없이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 마이클 만의 이상한 실패에 대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연출전공 25기이자 <간증>(2010)을 연출한 박수민 감독이 글을 썼다.

마이클 만의 영화에서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보고 싶어 하거나 보게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은 무엇일까? 강탈(Heist)영화의 장인이 묘사하는 그쪽 업계 전문가들의 고독한 남성성? 창백하고 푸른 LA나 소금기 전 습한 마이애미의 밤을 담기 위해 선구자 격으로 추구해온 HD 미학? 어쩌면 그저, (자동소총의 개머리판을 어깻죽지에 제대로 견착해 격발의 반동까지 포착하게 만들던) 도심 한복판에서 쏘아대는 총격전의 리얼함?

마이클 만 영화에서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그가 매번 되풀이하는 하나의 테마와 그 지속적인 변화 양상이다. 그는 항상 같은 이야기를 조금씩 변형시키며 반복해왔다. 그것은 선택의 기로에 캐릭터를 몰아넣고, 결국 그들 자신의 냉엄한 원칙과 혼자만의 윤리로 당연히 택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보게 만드는 일이다. <히트>(1995)의 한 대사처럼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때, 30초 안에 버리고 나올 수 없는 건 가져선 안 된다”라는 사실의 재확인이며, 전부 가질 것인가/모두 잃을 것인가의 문제이다(그것이 훔친 장물이든, 빼앗긴 마음이든).

<블랙코드>(2015, 원제는 ‘Blackhat’. 까만 모자를 쓴 해커. 주로 ‘Cracker’라고 불리며, 개인의 이익 등을 위해 악의적으로 보안을 뚫는 자들을 일컫는 해킹 용어)는 금고와 은행털이 영화의 장인이 이제 사이버 해킹에 도전한 영화다. 북미에서의 처참한 흥행 실패로 국내를 포함해 세계적으로 줄줄이 극장 개봉이 취소되고 있는 굴욕을 우선 차치(且置)한다면, 마이클 만 영화의 오랜 테마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하며 나아갔는지를 보여주는 뚜렷한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다.

마이클 만은 주로 집중해온 범죄 액션 장르(<비정의 거리> <맨헌터> <히트> <콜래트럴> <마이애미 바이스> <퍼블릭 에너미>)에서 특정 업계의 전문가인 남성들만을 주인공으로 그렸다. 그들은 자기 업계에서 일가를 이룬 경찰이거나, 금고털이, 은행털이, 살인청부업자 등이었다. 몇번의 장르적 변주(<인사이더> <알리>)에서도 그들은 기업의 중역이나 언론인, 복서 등 그 분야의 프로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혼자서 또는 신뢰할 수 있는 동료하고만 작업하며, 미리 정해놓은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 나에게는 오직 자신만이 명령을 내릴 수 있고, 내 일에 있어 남의 명령을 받을 생각이 없는 타고난 자영업자, 프리랜서들이다. 사명감이나 소속감은 미미하되 내 식구는 반드시 돌보는 그들은 외부적 요소가 끼어드는 것, 룰을 지키지 않는 인물이나 지킬 수 없게 되는 상황을 극도로 경계한다. 그러니까 이른바 ‘고독한 늑대’(Lone Wolf)의 성향을 지닌 사내들이다.

물신의 늑대가 관념에 정착하려는가

마이클 만은 그들의 ‘작업’ 자체가 가지는 전문가주의적 사실성을 영화에서 플롯이나 감정보다 실은 더 중요하게 다루어왔다. 극장영화 데뷔작이자 마이클 만 테마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비정의 거리>(Thief, 1981)는 오프닝에서부터 프랭크(제임스 칸)의 금고털이 장면을 분명한 노동으로 보여준다. 계획과 절차대로 중장비를 들고서 말 그대로 금고를 ‘뚫는’ 동안, 금속의 요란한 마찰음은 탠저린 드림의 반복•고조되는 신시사이저 음악과 믹스된다. 이 순간 그는 오직 금고를 뚫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인간이다. 환영처럼 터지는 스파크와 함께 일종의 트랜스(Trance) 상태에 이르는 금고털이 시퀀스에서 그의 노동은 어떤 불가침의 영역에 도달한다. 그것은 고독한 늑대의,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숭고함’이다.

공적인 작업은 이처럼 숭고하지만, 그 반대인 사적 관계는 오로지 ‘유혹적인 것’(das Reizende.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쇼펜하우어의 개념을 빌리자면)으로 그려진다. 만의 영화에서 남녀 관계는 어느 순간 갑자기, 충동적으로 발생한다. 그의 세계에서 남자들은 한번 마주친 여자에게 지그시 시선을 던지다 곧장 말을 걸고, 한번의 진중한 대화를 끝내고 나면 어느새 관계는 시작되어 있다. <비정의 거리>에서 프랭크는 지갑에 인생의 목표를 담은 콜라주 사진을 한장 넣고 다닌다. 그는 제시(튜스데이 웰드)를 거의 납치하듯 끌고와서는 자기 내면의 전부이자 결국 공허함의 단서인 그 사진을 내보인다. 사진엔 커다란 집과 멋진 차와 이루고픈 가족 등의 이미지가 오려붙여져 있다. 이제 남은 목표에서 여자와 자식, 그래서 가정만 만들면 되는 남자의 갑작스런 고백을 여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남자가 여자에게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불가항력의 유혹이다. <히트>(1995)에서 닐 맥컬리(로버트 드니로)가 이디(에이미 브렌먼)를, <마이애미 바이스>(2006)에서 소니(콜린 파렐)가 이사벨라(공리)를, <퍼블릭 에너미>(2009)에서 존 딜린저(조니 뎁)가 빌리 프리쳇(마리옹 코티야르)을 유혹하는 것도 모두 같은 방식이다. 마이클 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렇게 성립된 관계가 작업의 숭고함 앞에서 결국 포기해야 할 선택의 문제가 되는 시점이다. 전문가주의로 치장하고 감춰놓은, ‘남성성’이라는 편협하고 이기적인 진실이 들키고 마는 지점. ‘이 여자를 데리고 함께 도망칠 수 있겠는가?’의 문제는 매번 똑같이 반복된다.

<비정의 거리>에서, 지역 범죄 신디케이트의 보스는 솜씨는 좋지만 오만불손한 주인공을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라 피고용인, 임금노동자, 그러니까 끝내 휘하의 개로만 부리고자 한다. 스스로 상정한 인생 목표에서 가정만이 남았던 남자는 그런 삶이 불가능함을 깨닫자 곧장 여자를 (입양한 자식까지) 냉혹하게 버린다. 잠시 피해 있어, 가 아니라 이 돈과 함께 완전히 꺼지라는, 난 너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고백과 동일하게 일방적이며 완전히 무책임한 작별 통보. 그러고서 남자는 총을 들고 보스와 부하들을 다 죽이러 간다. 무소속 자영업자로 남기 위해(만은 이 영화를 ‘기업 자본주의에 대한 좌파 외연주의적 비판’이라 말한 바 있다) 그들에게 폭력을 관철시키는 동안 탠저린 드림의 음악은 멈추지 않고 이어지니, 결국 이 또한 자신만을 위한 숭고한 작업. 마이클 만의 처음 선택은 외로운 늑대로 남는 것이었고, 단호했다.

<히트>에 오면 이 선택의 문제는 영화 내내 괴로워진다. 이 에픽 사가에 나오는 거의 모든 남자 캐릭터들이 여자를(그래서 가정을) 포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끝까지 고민한다. 닐 맥컬리부터 빈센트 한나(알 파치노), 크리스(발 킬머)는 물론, 단역으로 나온 대니 트레조조차 피떡이 된 상태에서 죽기 직전까지 배신자의 행방보단 자기 아내를 찾는다. 여자를 집 안에 모셔놓고 언제 이 내부의 신전(神殿)이 무너질지 불안하고 초조하고 골치아파하면서 밖에서는 기관총을 난사하는 남자들의 세계. 남자는 이제 여자와 같이 도망치려 하지만, 배신자에게 복수하는 숭고한 마무리 작업까지 포기하지는 못한다. 30초의 막다른 골목(“the heat around the corner”)에서 <비정의 거리>에서처럼 비정하게 버리는 대신 비겁하게 여자를 두고 도망치는 닐 맥컬리 최후의 선택과, 남겨진 이디의 황당해하는 표정은 마이클 만이 도달한 가장 솔직한 대답처럼 여겨졌다. 여자랑 같이 도망치는 일(그래서 같이 살아가는 일)은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 이전엔 더 큰 문제(기업 자본주의?) 앞에서 단호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이 문제(여자!)만이 사실 전부라는 깨달음. 이렇게 살다간 홀로 죽게 되리라는 걸 아는 고독한 늑대가, 살기 위해 도망친 도주의 끝에 결국 쓸쓸히 혼자 죽는다는 것.

<블랙코드> 촬영장의 마이클 만 감독(오른쪽).

만의 영화에서 여자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고, 무슨 장물처럼 도구적으로 다루어져왔다. 여자도 결국 이 세계에서 훔쳐와야 하는 것이다. <마이애미 바이스>에 와서야 여자들은 가정에 종속된 존재들로 괴리되지 않고 남자들과 한팀이 되거나 사업 파트너로 거래를 트며 자기 일을 하는 직업인으로 현실의 중력 아래 서로를 이용한다. 늑대만큼 여우도 외롭다. 콜린 파렐과 공리가 연기하는 소니와 이사벨라는 언더커버 장르 컨벤션 속의 이상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보인다. 남자가 추구하는 대상으로서의 여자―언젠가 아내가 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마침내 동등한 커플이다. 소통 불가능성에 대한 이전 영화의 두려움은 옅어졌다. 다만 서로의 정체를 모를 뿐이다. 미래가 없으니 걱정할 필요도 없다던 커플은, 시간은 행운이지만 자기들 몫이 아니라며 어떤 ‘의리’(Royalty)만을 남긴 채 헤어진다. 여자를 보내고 자기 팀에게 돌아가는 남자의 뒷모습. 헤밍웨이적이라 말하고픈 어떤 강건함으로 찍혀 있는 마지막 장면은 감정의 리액션을 결코 찍지 않는다. 형제애에 가까운 남자 동료(또는 적)의 세계에서 남녀 커플의 세계로 옮겨온 마이클 만은 그 속에서 멜로로 위장할 수 있는 의리를 발견하지만 차마 선택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가능성. 여자와도 ‘의리’를 나눌 수 있을 거란 희망.

그것은 <퍼블릭 에너미>에서 보다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영화에선, 조니 뎁이 연기하는 희대의 갱스터 ‘존 딜린저’보다 그의 연인 ‘빌리 프리쳇’으로 분한 마리옹 코티야르가 더 중요해진다. 모두가 쫓는 최악의 범죄자를 연인으로 둔 여자의 기다림과 희생적인 인내의 표현은 남성영화의 얄팍한 기사도적 제스처로만 머물지 않는다. 역동적인 폭력 행위에 머물러 있던 숭고함은 여자의 버티는 신념, 그래서 관념으로 이동한다. 마이클 만 영화에서 관념이란 곧 ‘사랑’(Love)의 표현이다. 금고 속 현금이나 보석, 눈앞의 여자처럼 물신(物神)만을 알아볼 수 있는 남자들에게 사랑은 관념이며 끝내 알 수 없는 무엇이다. 그들이 그토록 선택의 기로에서 불안해하고 도망치는 이유는 그 관념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자는 돈과 여자를 훔칠 수는 있지만 사랑이라는 관념의 주체는 되지 못한다. 그래서 그 관념은 여자의 것으로 남는다. 의리가 사랑으로 초월하자 남자들의 세계는 유명무실해진다. <히트>처럼 서로를 비추는 거울로서의 두 남자는 의미가 없다. FBI 수사관 멜빈 퍼비스로 나온 크리스천 베일은 이 영화에서 들러리일 뿐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여자에게 남자의 행방을 묻고, 남자를 붙잡아(죽여서) 그 소식을 여자에게 전하며, 매번 남의 여자의 슬프고 강직한 얼굴을 바라보는 일뿐이다. 다른 남자를 통해서만 자신을 볼 수 있었던 <히트>의 남자들은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여자를 자신과 동등하게 바라보기에 성공하고, 이제 <퍼블릭 에너미>에서 남자를 초월한 존재로서의 여성을 발견한다.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공리를 영화의 진짜 주인공으로 바꿔치기하는 데 주춤했던 마이클 만은, <퍼블릭 에너미>의 결말에서 결국 마리옹 코티야르에게 영화를 내준다. 그 과감한 선택은 1930년대 갱스터 이야기를 소니 캠코더로 찍어놓은 것 같았던 HD 미학만큼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자칫 자기 세계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시도처럼 보였다. 물신의 늑대가 관념에 정착하려 한다면, 그래도 그것이 마이클 만의 영화일 것인가?

<마이애미 바이스>

<블랙코드>는 일견 이러한 시도의 도중에 나온 명백한 실패처럼 보인다. 우선 겉으로 보이는 것들이 이전 마이클 만 영화들에 비해 약하게 느껴진다. 금고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뚫고 그 속의 물신을 빼앗던 전작들의 작업에 비해 인터넷 방화벽을 뚫고 데이터를 빼내는 해킹이 보여줄 수 있는 전문가적 사실성은 영화적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다. 현금은 없고 계좌의 숫자만 있다. 키보드를 두들기는 뻔한 장면 대신 전에 없이 컴퓨터그래픽(CG)을 써서 컴퓨터 내부 회로의 틈을 파고드는 코드의 전자기적 형태를 소립자, 미립자 수준까지 보여준다거나 심지어 USB 안쪽 시점까지 표현하고는 있지만 겨우 이런 것들을 마이클 만 영화에서 볼 강탈 시퀀스의 전부라 하기엔 김이 샌다. 해킹 과정과 그 맥락 자체는 실제 해커들과 보안 관계자들이 인정할 정도의 사실성을 담보로 하나, 행위에서 주는 긴장감까지 부여하지 못한다. 총격전은 있지만 그것을 크리스 헴스워스가 보여줄 거란 기대는 완벽히 배반당한다. 중국의 원전이 해킹으로 파괴되는, 블록버스터 외형에 어울릴 오프닝과 사건은 있으나 적의 정체는 원제목에 명시된 그대로일 뿐 그 이상의 음모는 없다. 플롯은 단순하며 기계적인 각본은 캐릭터에게 감정의 결을 촘촘히 심어주지 않는다.

다만 발리의 밤, 힌두교 침묵의 날(Nyepi) 행사를 배경으로 한 클라이맥스는 뇌리에 남는다. 붉은 두건을 두르고 하얀 천을 휘날리는 수천명의 군중과 횃불 사이에서 벌이는 대결은 푸른 LA의 밤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마이클 만의 영화에서 전에 없이 뚜렷한 색채적 시도이다. 이리저리 휩쓸리는 인파의 물결 속에 하나의 틈(Line)을 따라 상대에게 다가가는 모습은 선과 회로를 통해 보여줬던 해킹의 전자기적 형태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네트와 전파 사이에서 서로를 가늠했던 무형의 실체들이 실제로 대면하는 이 장면에서 마이클 만은 액션보다는 관념을 찍으려 시도한다. 이러한 시도는 장르적이라기보다 순수한 시네마를 향해 있다. 극장 스크린이 아니라 IPTV의 화면으로밖에 이 장면을 볼 방법이 없는 것은 대단히 아쉽다. 이제 마이클 만은 두 남자의 동료애를 접고 남녀 커플을 더 매력적으로 그리는 데만 몰두한다. 마이애미에서 시작된 금발 서양남자와 흑발 동양여자 커플링에 대한 만의 페티시는 헤서웨이(크리스 헴스워스)와 리엔(탕웨이) 커플에게 대사보단 손짓 하나에 걸어주는 슬로모션으로 각본에 없는 케미를 부여한다. LA 함지박 갈빗집에서 이번엔 여자의 일방적이고 뜬금없는 대화로 시작된 관계는, 30초 골목의 기로에서 선택 자체를 무효화해버린다. 여자는 남자가 혼자 도망치는 것을 거절하고 거부한다. 친구이자 혈연인 동료가 갑작스레 퇴장하고 공권력이 무참히 패배하자 도망치려던 남자는 혼자여야 할 명분이 없다. 남녀는 사적인 복수에 ‘동행’한다. 탕웨이의 앙다문 입술로 보여주는 분노는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절실하고, 남자는 여자 없이 이 모든 작업을 수행할 수 없다. 그렇다. 앞서 짚어온 변화의 양상으로 볼 때, <블랙코드>는 마이클 만의 강탈영화 계보에서 남자와 여자가 함께 도망치는 최초의 영화다.

<마이애미 바이스>

명백한 실패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계보를 그려보면 이렇다. <비정의 거리>에서 태어나 다른 남자에게서 자신을 보며 여자를 포기했던 <히트>의 남자들은 <콜래트럴>에서 철저히 혼자가 된 뒤 <마이애미 바이스>에선 여자에게서 소통과 의리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퍼블릭 에너미>에선 사랑이란 관념을 인정하고 말았으며, 이제 <블랙코드>와 같이 의리도 장인정신도 없는 가상이 현실을 위협하는 세계에선 여자의 도움 없이 도망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론 울프’는 여자 없이 도망치지 못한다. 키보드가 중장비를 대신하는 세계에서 더이상 그들 자신만의 숭고한 작업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이 세계는 마이클 만의 영화에 있어 이전만큼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수 없다. 편협한 선택과 죽음의 결과가 없는 남성영화의 아이러니. 그러니 다음번에 마이클 만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가? 들리는 소식에, 마이클 만은 인터넷 없는 과거로 돌아가 엔초 페라리의 전기영화 <페라리>로 갈아탈 예정이라 한다. 정든 물신의 세계로 잠시 돌아가겠지만, 그는 또다시 관념을 시도하지 않을까? 여자의 따뜻한 품을 알아버린 이상, 늑대의 고독이 무슨 소용인가? 또는, 이제 이 세계에서 더이상 홀로 고독할 수 없는 늑대들에게, 여자 없이 도망칠 수 없는 남자들에게, 오히려 이 관념이야말로 목숨을 걸어 훔쳐볼 만한, 마지막 남은 최후의 보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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