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내게 프랜차이즈는 <인터스텔라>다
2015-05-19
글 : 김성훈
사진 : 오계옥
<플래시댄스>부터 <인터스텔라>까지 할리우드 대표하는 여성 프로듀서 린다 옵스트를 만나다

한국 관객에게 낯선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린다 옵스트는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여성 프로듀서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비롯해 <썸원 라이크 유>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 같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을 제작했으며, 최근에는 <인터스텔라>를 만들어 전세계 흥행 신화를 썼다. 지난 4월30일, 린다 옵스트가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2015 CT(문화기술) 포럼’(주최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인터스텔라>의 흥행 법칙’을 주제로 강연을 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씨네21>은 포럼 다음날인 5월1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린다 옵스트를 따로 만났다. 지금부터 린다 옵스트 스토리가 펼쳐진다.

필모그래피 <인터스텔라>(감독 크리스토퍼 놀란, 2014) 프로듀서 <거짓말의 발명>(감독 리키 제바이스, 매튜 로빈슨, 2009) 프로듀서 <나는 조지아의 미친 고양이>(감독 거린다 차다, 2008) 프로듀서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감독 도널드 페트리, 2003) 프로듀서 <어벤던>(감독 스티븐 개건, 2002) 프로듀서 <썸원 라이크 유>(감독 토니 골드윈, 2001) 프로듀서 <비상계엄>(감독 에드워드 즈윅, 1998) 프로듀서 <사랑이 다시 올 때>(감독 포레스트 휘태커, 1998) 프로듀서 <콘택트>(감독 로버트 저메키스, 1997)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 <어느 멋진 날>(감독 마이클 호프먼, 1996) 프로듀서 <나쁜 여자들>(감독 조너선 카프란, 1994)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감독 노라 에프런, 1993)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 <행복 찾기>(감독 노라 에프런, 1992) 프로듀서 <피셔 킹>(감독 테리 길리엄, 1991) 프로듀서 <사랑의 로큰롤>(감독 크리스 콜럼버스, 1988) 프로듀서 <야행>(감독 크리스 콜럼버스, 1987) 프로듀서 <플래시댄스>(감독 에이드리언 라인, 1983) 어소시에이트 프로듀서

“오전에 비무장지대(DMZ)에 가서 북한을 봤다. 서울에서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니. (웃음) 인사동에서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샀고. 어젯밤에는 광장시장에서 김치만두와 빈대떡을 먹었다.” 할리우드에서 30년 넘게 활동해온 제작자라고 해서 마냥 화려하고 도도할 줄 알았는데 만나자마자 3박4일간의 서울 여행기를 들려주는 그는 영락없는 이웃집 아줌마였다. 린다 옵스트가 쓴 책 <Hello, He Lied>에 “할리우드가 나를 두고 ‘꼼꼼한(polish) 프로듀서’라는 표현을 쓴 건 돈을 철저하게 관리하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듯이 그는 무척 소박했다.

<인터스텔라>

린다 옵스트. 한국 영화팬들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플래시댄스>를 기획하며 프로듀서 경력을 시작한 뒤 <행복 찾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썸원 라이크 유>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 같은 로맨틱 코미디, <콘택트> 같은 SF영화, <비상계엄> 같은 액션영화 등 다양한 장르영화와 TV시리즈를 만들어온 여성 제작자다. 최근에는 <인터스텔라>를 제작해 전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했고, 자신의 제작사 린다 옵스트 프로덕션을 운영하고 있다. 예순을 훌쩍 넘겼음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영화를 내놓는 걸 보면 열정 하나만큼은 젊은 친구들 못지않다.

<10일 안에 남자친구에게 차이는 법>

스필버그가 떠난 자리 채운 놀란

잘 알려진 대로 <인터스텔라>는 그의 집요함이 없었더라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제작기간이 무려 11년이나 걸렸기 때문만은 아니다. 할리우드에 수많은 ‘맨’, 프리퀄, 리메이크, 리부트영화 제작 붐이 불었던 2000년대 초, 그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그것도 일반인에겐 다소 어려울 수 있는 과학을 소재로 한 <인터스텔라>를 준비했다. 물론 <콘택트>라는 SF 장르를 만들어본 경험도 <인터스텔라>에 도전하는 데 큰 용기를 줬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철학이 과학으로 이끌었다. 과학을 공부하니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우주에 있었다. 우주를 공부했고, 그때 킵손 박사를 만났다.” 킵손 박사는 학계 최초로 웜홀 이론을 만든 미국 이론물리학자다. 시나리오 속 시간여행이 처음에는 블랙홀을 통과하는 설정이었는데, “웜홀이어야 한다”는 킵손 박사의 제안을 받아들여 지금의 영화 속 설정으로 바뀌었다. “그와의 우정을 계속 키웠다. ‘썸’은 없었지만 말이다. (웃음) 워크숍을 열어 과학자들과 시나리오작가들을 만나게 했고, 그들이 나눈 대화 내용이 시나리오에 반영됐다.” 기획•개발 단계에서 과학자들이 시나리오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그렇다고 <인터스텔라>가 과학영화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 영화는 가족의 이별을 다룬 이야기이다. 떨어진 가족을 다시 만나야 하는 아버지(매튜 매커너헤이)의 마음이 이 영화의 핵심 감정이다. 과학은 엔터테인먼트의 일부지만, 영화의 감정이 될 순 없다. 과학과 가족의 이별이 잘 맞물리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정치영화가 잘 안 되는 이유가 아이디어는 좋지만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감정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린다 옵스트의 설명이다.

과정은 이랬다. “스필버그가 시나리오를 보길 원한대.” 어느 날, 린다 옵스트는 에이전시 CAA로부터 스티븐 스필버그가 <인터스텔라> 아이템에 관심이 있으니 당장 시나리오를 가지고 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시나리오는커녕 초고도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린다 옵스트는 작가들과 함께 부랴부랴 작업해 이틀 만에 초고를 완성했고, 스필버그는 초고를 읽은 뒤 <인터스텔라>를 맡기로 결정했다. 킵손 박사, 스필버그, 조너선 놀란(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동생이자 <인터스텔라> 시나리오작가)과 함께 시나리오를 쓰면서 세운 원칙은 “이야기가 물리학 법칙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010년쯤인가. 스필버그가 여러 사정으로 프로젝트에서 하차하면서 린다 옵스트는 다시 시련을 맞게 된다. “스필버그가 떠났을 때 그 슬픔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나타난 구세주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조너선 놀란이 추천한, 자신의 형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었다. 평소 <인터스텔라>에 관심이 많았던 크리스토퍼 놀란이 내건 조건은 단 하나. “먼저 계약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2012)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2년 기다린 뒤 크리스토퍼 놀란과 함께 작업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감독을 찾아 당장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린다 옵스트는 한치의 고민 없이 크리스토퍼 놀란을 기다리기로 결정했고, 크리스토퍼 놀란이 약속을 지키면서 제작 진행은 급물살을 탔다. “2년이나 기다려서 크리스토퍼 놀란을 잡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었다. 그런데 당시 할리우드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영화로 만들어졌던 과거와 달리 당시는 세계 시장을 겨냥해 슈퍼맨, 배트맨 같은 프랜차이즈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프랜차이즈 영화가 아닌 <인터스텔라>에 스필버그, 크리스토퍼 놀란 같은 최고의 감독들이 군침을 흘린 건 이야기가 올바르고 신선했기 때문”이었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무언가가 되기 전에 저널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인터스텔라> 제작 과정만 보면 머릿속에 오로지 영화만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린다 옵스트가 사회 경력을 영화 일로 시작한 건 아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남들보다 영화를 많이 보며 자랐다. 영화를 좋아해 딸을 극장에 데리고 다녔던 엄마 덕분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영화들, 예술영화, 성숙한 영화들을 봤다. 심지어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 영화를 열살 때 봤을 정도였다. 엄마 손을 잡고 극장에 가서 봤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랬나 싶다. 엄마는 자신의 친구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이 섹스하는 영화를 봐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세련된 취향을 가졌던 것 같다”는 게 그의 회상이다.

미국 포모나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하자마자 <뉴욕타임스> 기자가 되었다. 기자가 된 계기는 간단했다. “세상일을 알고 싶다면 저널리스트가 되면 된다. 모든 일을 알 수 있다.” 훗날 <행복 찾기>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감독과 프로듀서로 호흡을 맞추게 될 노라 에프런도 <뉴욕타임스>에서 인연을 맺었다. “노라 에프런이 내 멘토였다. 그녀의 남편은 워터게이트 특종 보도로 유명한 칼 번스타인이었다. 노라 에프런이 그랬다. ‘무언가가 되기 전에 반드시 저널리스트가 되어야 한다.’ 그 말이 내겐 성경이었다.” 취재기자 린다 옵스트가 처음 담당했던 분야는 공교롭게도 할리우드였다. 첫 기사도 ‘우먼 인 할리우드’였다. 할리우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여성들을 취재해 소개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철학, 과학, 천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맡았다. “일에 몰두하느라 37살에 임신할 만큼 <뉴욕타임스> 생활은 즐겁고 뜻깊었다.” 하지만 기자는 천직이 아니었던 운명일까. 린다 옵스트는 임신한 다음해 기자를 그만두고, 남편의 회사 일 때문에 뉴욕을 떠나 LA로 이사해야 했다. “정말 뉴욕을 떠나기 싫었다. 하지만 한살짜리 갓난아기 때문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LA에 건너갔더니 미친놈들(abnormal) 천지였다.”

별종들의 세계, LA에서 린다 옵스트는 인생 2막을 열었다. <뉴욕타임스>에서 할리우드 담당이었던 까닭에 자연스럽게 프로듀서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낮에는 피츠버그의 한 제철공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나이트클럽의 플로어 댄서로 일하는 18살 소녀가 댄서의 꿈을 키우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도 그때쯤이다. 토머스 헤들리 주니어(당시 이름은 톰 헤들리), 조 에스터하스 등 두 작가와 함께 시나리오를 써서 파라마운트에 판 영화가 <플래시댄스>였다. 그녀의 프로듀서 데뷔작이었다. 당시는 아이디어만 있어도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기였다. 코믹북이냐, 프랜차이즈냐, 아시아 시장을 염두에 둔 캐스팅이 있는냐 등 이리저리 재는 게 많아진 지금 할리우드와 분명 달랐다. “옛날 별종(old abnormal)들이 득실거리던 그때는 하룻밤 사이에도 영감이 떠오르면 피칭해 팔 수 있는 시기였다. 지금에 비하면 기술적으로는 부족했지만 아이디어만 있다면 프로듀서, 감독, 작가 모두 함께 일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용기 하나만 가지고 말이다. 마약에도 아주 미쳤고. (웃음) 미국 국내 관객만 고려하던 시기라 가능했다.”

<플래시댄스>

로맨틱 코미디는 사람들을 다시 모이게 할 것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린다 옵스트가 주로 만든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였다. 특히 노라 에프런과 함께 만들었던 <행복 찾기>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같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극장 개봉 당시 한국 관객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데이트를 하고, 친구가 되고,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아이를 만드는 건 인간의 본성이다. 물론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걱정하는 영화는 아니지만 사랑은 사람에게 중요한 감정이다. 최근 휴대폰이 사람들 사이를 떨어뜨려놓고 있다. 로맨틱 코미디는 그들을 다시 모이게 할 것이다. 과거에 비해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많이 줄었지만 다시 만들 거다. 많은 사람들이 내 트위터에 들어와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언제 나오냐고 묻는다. (웃음)” 린다 옵스트표 로맨틱 코미디를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차기작으로 <10일 안에 남자를 잊는 방법>이라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제작될 거라는 소식이 영화 DB사이트 IMDb에 떴다.

린다 옵스트는 자신이 쓴 책 <Sleepless in Hollywood>를 통해 할리우드가 지난 10년 동안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앞에서 잠깐 설명했듯이 코믹북을 원작으로 한 영화, 프랜차이즈영화, 프리퀄, 리부트, 리메이크영화가 늘어나면서 스튜디오들은 ‘텐트폴’(tentpole, 여름과 겨울 성수기를 겨냥한 블록버스터)이나 ‘갱버스터’(gangbuster) 제작에 혈안이 됐다. 중국, 인도, 러시아, 한국, 동남아시아 등 신흥시장이 출현하면서 캐스팅과 아이템 기획•개발이 전세계 시장의 영향을 받게 됐다. 그러다보니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영화화되는 경우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이 같은 산업 환경의 변화가 린다 옵스트를 비롯한 할리우드 프로듀서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내겐 배트맨, 스파이더맨 같은 프랜차이즈 아이템이 없다. 내게 프랜차이즈는 <인터스텔라>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만들어질 수 있는 영화, 개봉한 뒤 40년이 지나도 즐겁게 볼 수 있는 영화,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도 매력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 다른 사람은 못 만드는 영화 말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전세계 관객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위기가 곧 기회다. 좋은 아이디어만 있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는 게 할리우드다. 린다 옵스트 역시 이 사실을 잘 안다. “할리우드엔 세상에서 가장 이상한 사람들만 모였다. 소시오패스도 성공할 수 있는 곳이다. 가방끈이 짧아도 성공할 수 있다. 반면 하버드, MBA 출신이라고 해서 성공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누구도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지만 말이다. (웃음)” 그런 할리우드에서 30년 넘게 개성 있는 영화들을 내놓고 있는 린다 옵스트야말로 멋진 별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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