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순위로 캐스팅 제안을 받는다는 것, 배우에겐 매우 짜릿짜릿한 일이다.” 윤재구 감독은 배우 임수정을 생각하며 <은밀한 유혹>의 지연을 써내려갔다고 한다. 지연은, 가족도 친구도 없이 마카오에서 하루벌이 인생을 살다 마카오 카지노 그룹 회장(이경영)과 그의 비서 성열(유연석)을 만나 삶의 행로를 급선회하게 되는 기구한 운명의 여자다. 성열의 계획하에 회장과 결혼을 하고 그의 유산을 상속받지만, 회장의 초호화 요트에 승선한 순간부터 지연의 삶은 그녀의 의지를 벗어난다. 수수한 동시에 우아하고, 여린 듯하지만 강하고, 세속적이지만 로맨틱한 꿈을 꾸는 지연은 임수정을 통해 현실감을 얻는다.
임수정이 지연에게 끌렸던 이유는 그녀가 단순히 신데렐라의 유리구두만 탐하는 여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신데렐라가 되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지연이 주체적으로 자기의 삶을 극복하려고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이 여자 매력 있다’라고 생각했다.” 십대 때 패션잡지 표지 모델로 데뷔했고, <장화, 홍련>(2003)으로 인상적인 신인배우의 등장을 알린 후 줄곧 주연배우의 자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임수정도 신데렐라가 되는 꿈을 꿔본 적이 있을까. “가끔 꾼다. 현실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런데 꿈은 꿈일 뿐이더라. 현실엔 그런 왕자님이 없다. (웃음)” 왕자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수동적 여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지연과 임수정은 닮았다.
“배우여서 참 좋다”
지연은 성열과 회장 사이에서 미묘한 “애증의 삼각관계”를 이루지만, 현장에서 임수정은 선배 이경영과 후배 유연석과의 삼각구도 속에서 본인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어느덧 현장에서 선배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아졌다. 책임감 있는 언행과 연기력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심리도 느껴졌다. 사랑받고 예쁨받는 여배우가 아니라 현장을 리드하고, 베풀고, 보듬어주고, 파이팅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된 거다. 어렵다. 마냥 사랑받고 응석부리고 싶을 때도 있는데.” 캐릭터에 몰입하고 극에 집중하는 것 외에도 책임감 있는 선배로서의 과제가 추가되었던 거다. <은밀한 유혹>의 촬영을 끝낸 뒤 “개인적으로 부쩍 성장한 것 같다”고 느낀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현장에서 무뚝뚝하고 애교 없는 형처럼 굴었던 것 같은데 방긋방긋 더 많이 웃을 걸 싶더라.”
영화에서 회장은 지연에게 거울 속에 비친 현재의 모습이 어떤 것 같냐고 묻는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거라는 말과 함께. 마침 임수정은 며칠 전 거울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내가 배우여서 참 좋다!” 연기의 무게에 마냥 짓눌려 있었던 20대 때에는 차마 하지 못했던 생각이다. “좋은 배우로 인정받아야 해, 좋은 필모그래피를 쌓아야 해…. 20대 땐 만족스런 커리어를 쌓기 위한 것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지금은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가 즐겁다. 그땐 그렇게 지긋지긋했던 세트장 냄새가 지금은 왜 이렇게 좋을까? (웃음)” <내 아내의 모든 것>(2012) 이후 3년 만의 신작. 실질적 휴식기는 1년 정도이지만, 대중이 체감하는 공백기는 그보다 길다. <은밀한 유혹>의 촬영을 마치고 곽재용 감독의 신작 <시간이탈자> 촬영까지 끝낸 임수정은 현장에서 에너지를 완전히 충전한 듯 보였다. “계속해서 찍어야겠다. 자주자주 관객을 만나고 싶다”는 말이 참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