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토머스 해리스는 1981년에 발표한 소설 <레드 드래곤>에서 법의학 정신분석의이자 연쇄 식인 살인마인 한니발 렉터 박사를 처음 등장시켰다. 그런데 렉터 박사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아니었다. 애초 등장 분량 자체가 10페이지가 채 되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토머스 해리스는 뒤이어 1988년에 발표한 <양들의 침묵>과 1999년에 발표한 <한니발>, 그리고 2006년에 발표한 <한니발 라이징>에 이르기까지 연달아 한니발 렉터를 전면에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소설 <레드 드래곤>을 원작으로 해 가장 처음 영화화된 <맨헌터>에서는 원작에서와 마찬가지로 한니발 렉터의 비중이 크지 않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렉터 역을 맡았던 브라이언 콕스는 1940년대와 1950년대를 거치며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맨해튼 출신의 스코틀랜드 연쇄 살인마 피터 매뉴얼을 참고하며 연기하는 정성을 보였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한니발 렉터 박사라는 캐릭터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계기는 조너선 드미 감독의 <양들의 침묵>의 앤서니 홉킨스를 통해서다. 조너선 드미 감독과 앤서니 홉킨스는 이 영화를 통해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상징적인 악역을 만들어냈다. 거기엔 의상도 한몫했다. 아카데미 의상상을 여러 차례 수상한 의상감독 콜린 앳우드가 <맨헌터>에 이어 <양들의 침묵> 의상도 담당하면서 한니발 렉터의 상징과도 같은 마우스피스와 수감복을 입은 모습을 만들어냈다. 그녀는 애초 하키 선수들이 쓰는 마스크를 떠올리며 순백색에 윤택이 나는 마스크 디자인을 주문했지만 소품 제작 스탭이 거의 피부색에 가까우면서도 꼬질꼬질한 스타일로 만들어온 것이었다. 그 마스크를 본 콜린 앳우드는 망설임 없이 설정을 바꿨고 지금의 마스크가 영화에 등장하게 됐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소름 끼치도록 아무 생각 없이 저질렀던” 순간의 판단이 영화 역사에 길이 남는 소품 디자인을 탄생시킨 것이다. 그렇게 앤서니 홉킨스는 <양들의 침묵> <한니발> <레드 드래곤> 3편에 모두 출연하며 다른 어떤 배우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일생일대의 아이콘 캐릭터를 얻게 됐다.
<한니발 라이징>에서 렉터 박사의 청년 시절을 연기한 가스파르 울리엘과 드라마 <한니발>에서 렉터 박사를 맡은 매즈 미켈슨은 모두 제각각 개성 있는 그들만의 한니발 렉터를 탄생시킨 배우들이다. 그중에서 특히 매즈 미켈슨은 원작이나 영화와 달리, 새롭게 탄생한 드라마 안에서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렉터 박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영화들에서 등장했던 한니발 렉터를 연기했던 대부분의 배우들이 표정이나 동작을 통해 다중적인 감정을 지닌 인간형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노력했다면 매즈 미켈슨은 오히려 그 반대로 과장하거나 주저하는 등 드러내는 방식으로 캐릭터에 접근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말끔한 슈트 뒤에 철저히 감춘다. 그것이 마치 ‘신사의 매너’처럼 포장되어 그의 잔혹성이 배가된다. 의상을 맡은 크리스토퍼 하가든이 개발해낸 킬러 슈트, 즉 살인을 저지를 때 렉터 박사가 입는 비닐 가운의 디자인은 그러한 ‘신사의 매너’를 더욱 부각시킨다. 그는 슈트를 벗지 않고 그 위에 섬유재 한올 흘리지 않는 완벽하게 밀폐된 비닐 가운을 입고 살인을 저지른다. 캐릭터의 성격에 맞춰 그를 둘러싼 캐릭터 묘사 방식이 점점 진화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