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부터 봐도 끝까지 봐야 하는 영화들이 있다. 나에겐 <이퀼리브리엄>이란 영화가 그런 영화들 중 하나다. 크리스천 베일 흉아가 나오는 SF영화인데, 정부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전체주의 사회가 그 배경이다.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마저 통제되는 조지 오웰적인 세상은 평온을 넘어서 평형적으로 보이는데, 그래서 그 세상의 이름도 평형상태, 즉 이퀼리브리엄(Equilibrium)이다.
베일 흉아는 이퀼리브리엄의 평형상태를 지키는 경찰로 등장하는데, 아뿔싸, 미지의 여인을 만나면서 심정의 변화를 겪게 된다. 베토벤의 교향곡을 듣고 예이츠의 시를 읽으며 감정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반란군을 돕고 내란을 음모하기까지 한다(내란음모를 방조하는 영화라니. 제한상영가감이다). 베일 흉아는 본분을 잊고 점점 해서는 안 될 짓만 골라서 한다. 미지의 여인이 기어이 죽음을 맞이하고, 베일 흉아가 이를 막으려고 달려갈 때쯤이면 나 같은 <이퀼리브리엄빠>는 수십번 본 결말을 처음 보는 것마냥 긴장하며 보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베일 흉아의 평형상태가 무너질수록 영화의 긴장감은 증가한다. 아항 그렇다면 평형상태는 깨지기 위해 존재했구나.
정상과 비정상의 도치
모든 영화는 평형상태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평형상태가 어떤 이물질에 의해서 깨지면서 이야기는 전개된다(이를 업계에선 선동적 사건, 도입 사건, 최초 사건 등으로 부른다). 평온한 휴양지에 식인상어가 나타나면서 일대혼란이 일어나고(<죠스>), 평범한 경찰관이 사이보그가 되면서 분노감이 커지고(<로보캅>), 평범한 꼬마들이 보물지도를 주우면서 모험이 시작되고(<구니스>), 평범한 샐러리맨이 춤바람이 나면서 일탈이 시작된다(<쉘 위 댄스?>). 딱 봐도 평형상태는 정상적이고 이물질은 비정상적이다. 그리고 극적 긴장감은 평형상태와 이물질 사이의 간극이 클수록 극대화된다. 이를테면 식인상어가 아저씨를 먹기보단 아가씨를, 아가씨를 먹기보단 아기를 갈기갈기 찢어죽여야 긴장감이 더 커진다(예끼, 비유를 들어도 이런 끔찍한 비유를).
그런데 평형상태-정상성/이물질-비정상성의 구도를 따르지 않는 영화들이 드물게 있다. 둘의 간극을 크게 해서 긴장감을 높이려다보니 아예 둘의 성질을 도치시키면서 벌어지는 해괴망측한 경우다. 말하자면 사람들을 잘 잡아먹던 식인상어가 아기를 기르게 되는 이야기쯤 될 테니 해괴망측할 수밖에. 윌리엄 러스티그의 1980년작 <매니악>이 적당한 예일 듯한데, 사이코 연쇄살인범이 환청을 듣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묻지마 살인을 하고 다니는 게 최초의 평형상태이고, 그런 사이코에게 처음으로 사랑하는 여인이 생기는 게 이물질이다. 상황이 이쯤 되니 관객이 영화 내내 경험해야 하는 건 사랑을 거부하려는 주인공의 내적 분열과 반대급부로 더 잔인해지는 살육행위뿐이다.
이런 영화들은 불편하다. 감정이입이란 단어를 떠올리기엔 평형상태가 지나치게 크레이지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크레이지하니 관객도 어지간히 크레이지하지 않으면 영화를 감당할 수 없다. 이런 크레이지한 영화들은 두 가지로 분류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가해자영화이고, 또 하나는 망상증영화다. 가해자영화는 말 그대로 주인공이 가해자인 영화로, <매니악>을 포함해서 <헨리: 연쇄살인범의 초상>,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 등이 있겠지만, 대부분의 가해자영화는 허셸 고든 루이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고어영화들이다. 사실 허셸 고든 루이스의 <2000매니악스> <피의 축제>만 해도 피해자(혹은 형사)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서 살육의 충격을 다소 덜 크레이지하게 “전달”하려 하는데, 이후의 현대적 고어영화들, <피를 빠는 변태들>(Blood Sucking Freaks)이나 <기니어피그> 같은 영화들은 아예 살인범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피범벅의 비주얼 쇼크를 “전달”이 아니라 “동참”시키는 악취미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고어영화들은 플롯이 중요하지 않으므로 지루하기 십상인데, 크레이지하면서도 나름 긴장타는 플롯으로 시선 고정시키는 영화들이 바로 망상증영화들이다. 망상증영화들은 말 그대로 주인공이 망상증에 시달리는 영화들로, 최초의 평형상태가 과대망상, 편집증, 분열증, 다중인격, 기억상실, 우울증 등 온갖 정신병을 다 모아놓은 “언덕 위의 하얀 집스러운” 상태다. 하지만 가해자영화처럼 불편하지만은 않다. 섹스에 중독된 기생이 주인공인 <감각의 제국>은 일본 제국주의를 풍자하고 비난하며, 관음증에 탐닉하는 찍사가 주인공인 <피핑톰>은 현대인들의 비인간성과 정신병을 진단하고, 단기기억상실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나오는 <메멘토>는 차진 긴장감으로 스릴러적 쾌감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망상증영화들 역시 비정상적인 평형상태로 시작하기에, 그리고 영화 내내 주인공의 과대망상을 동참해야 하기에 어지간히 크레이지한 관객이 아니라면 즐길 만한 것은 아니다.
똘끼 대신 안전빵
그렇다면 한국의 가해자영화와 망상증영화는 어떤 것이 있을까? 불편한 영화를 극딜하는 한국영화 풍토상 크레이지한 영화들이 많을 리 없다. 그런데 기적처럼 레전드급의 가해자영화와 망상증영화가 한편씩 있었으니,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과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다.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가해자영화와 동명 타이틀인)<복수는 나의 것>은 정확히 말해서 가해자의 시점으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플롯의 알콩달콩 오밀조밀 밀당은 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리고 오로지 캐릭터들의 파멸하고 자멸하고 공멸하는 절망감만을 그리다 보니, 즉 평형상태가 나의 절망이고 이물질이 너의 절망이다 보니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불편할 정도가 아니라 불쾌할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영화의 크레이지함에 걸맞게도 크레이지한 관객의 열광이 있었으니, 흥행은 대참패했을지언정 박찬욱의 최고작으로 이 영화를 꼽는 크레이지한 분들이 여전히 많은 것이다.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는 더 레전드다. 차승재 대표님의 말에 따르면 시사회 이후 “한국영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데뷔작이고, 최소한 200만 이상 볼 것이다”라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소문은 진실이었다. 관객수 200만만 빼고. 결과적으론 흥행에서 참패했지만, <지구를 지켜라!>는 한국영화 역사상 거의 유일하게 망상증환자를 다룬 크레이지한 상업영화로 꼽힌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할 거라는 망상에 시달리는 환자가 주인공이라니. 정신적인 크레이지함도 불편한데, 물파스 고문에 동참해야 하는 물리적인 크레이지함도 있으니 관객은 불쾌를 느낀 게 아니라 아예 이해조차 할 수 없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크레이지한 <지구를 지켜라!>는 크레이지한 대한민국을 가장 선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계급과 역사는 물론이고, 의식과 기억의 문제까지, 심지어는 맨살과 물파스의 생체학적(!) 이슈까지 포괄하면서 <지구를 지켜라!>는 가장 대한민국적인 영화가 되었다. 그만큼 크레이지한 대한민국을 표현하려면 크레이지한 포맷을 쓸 수밖에 없고, 안타깝게도 관객은 대한민국을 보러 극장을 찾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을 잊으려고 극장에 찾는다는 게 극적으로 방증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복수는 나의 것>이 2002년, <지구를 지켜라!>가 2003년에 개봉했었다. 흥행 참패를 할지언정 크레이지한 영화에 자본이 투여되고 제작이 성사되는 크레이지한 똘끼가 허용되던 때였다. 하지만 지금 그 똘끼는 부서진 평형상태마냥 온데간데없고 안전빵이라는 새로운 평형상태가 도래했다. 안전하게도 정상적인 정의감이 있는 주인공, 안전하게도 정상적인 죄책감이 있는 주인공, 안전하게도 정상적인 책무감이 있는 주인공들이 득세하는 안전한 평형상태뿐이다. 덕분에 관객은 아주 편하게 대한민국을 잊으며 영화를 잘 보고 있다. 똘끼가 그립다. 지독하게 해괴망측한 평형상태를 내세워서 관객을 불편하게 하고 불쾌하게 하고 구토나게 하고 그 크레이지함 속에서 대한민국의 속살을 물파스로 벗겨내던 <복수는 나의 것>과 <지구를 지켜라!>가 그립다.